Installation view of 《Dig Around in Empty Pocket》 (Gallery KICHE, 2022) © Gallery KICHE

1. (오래된) 수건 그림

매일 얼굴을 훔치던 오래된 수건은 가운데가 움푹 파인 것처럼 부드러움을 잃고 납작하게 헝클어져 있다. 물기가 마르면 한껏 단단해진 질감을 드러내며 누군가 펼쳐 놓은 방식대로 제 형태를 불러낸다. 여러 날 여러 해를 지나는 동안, 물기에 섞여서 옮겨진 몸의 얼룩들은 (순수한) 어떤 동물의 살갗 같던 수건에 흐릿하고 메마른 표정을 남겨 놓는다. 흐릿하고 메마른 것처럼 식상한 것이 또 있을까. 세월만 짊어진 형태는 어떠한 상상도 불러오려 하지 않고, 잠시 지연된 것처럼 보였던 소멸의 순간을 다시 예고한다. 물기 묻은 얼굴을 문지르는 동안 둘 사이의 반복적인 마찰은 힘과 얼룩을 교 환하고, 서로는 형태의 변형을 감수한다. 닦아냈다 말리고 다시 닦아냈다 말리는 행위가 둘 사이에 일어난 사건의 전부인데, 그 행위의 유산으로 (어느 한 쪽의) 닳고 흐릿해진 형태 변화는 불가피한 일이 된다.

먼지 낀 유리창만큼 대수롭지 않은 낡고 해진 수건에 대하여 이런 진지한 말로 서술하는 것이 인 간다운 사유와 성찰 보다 어쩌면 세계와 나를 비대칭의 나르시시즘으로 조명하는 미숙한 망상처럼 보일 지도 모르겠다. “수건”과 “나(의 얼굴)” 사이에서 일어난 내밀하고도 점진적인 상상은, 사실 일 종의 대체물처럼 조금 더 근본적인 사건에 관해 에둘러서 말하려는 한 사람의 망설임을 내포한다. 박노완은 「수건 그림에 대해서」라는 제목으로 네 단락의 글을 써서 내게 보냈다. 그는 끝 단락의 (괄호 친) 마지막 문장에서 매일 사용했던 수건을 큰 그림으로 옮겨 그리는 일이 누군가에게 내심 “힘 빠지는 농담처럼 여겨질 것”을 기대한다고 했다. 누구나 세로의 길이가 290cm이고 가로가 250cm인 색면추상회화로서 파란색이 (세월과 습도의) 얼룩처럼 섞인 분홍색의 추상적인 그림과 마 주하고 나면 코앞에까지 가서 그 압도적인 평면을 빈틈 없이 훑어보게 될 것이다. 이 장면에 대한 그의 기대는, 곧 어떤 (새로운) 단서가 회화의 모서리에 달라붙은 채로 “이것은 수건입니다”를 폭로할 것이라는 소소한 반전을 암시한다. 수건은 회화를, 이를테면 추상적인 거대한 색면회화를 대체한 다. 그는 “무작정 수건을 큰 캔버스 화면에 옮겨 그려보고 싶었다”고 했다. 어디선가 기념품으로 받 아와서 사용한지 오래된 얼굴 수건을 말이다.

〈큰 수건〉(2022)을 앞에 두고, 그와 나는 둘로 나뉜 대화를 이어갔다. 하나는 수건의 시간에 관 한 말들이고, 또 하나는 오래된 회화에 관한 말이었다. 한 사람이 수건에 대한 기억을 말하면 다른 누구는 회화에 대한 질문을 던졌고, 서로가 변명과 추궁처럼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 같은 대화를 계 속했다. 무작정 수건을 그려보고 싶었다는 박노완의 말은, 무엇이든 그림이 될 수 있다는 전제와 조건 아래 “어떻게”라는 그리기의 방법과 태도를 특정함으로써 “이것은 회화입니다”라는 결론을 확정 짓겠다는 (혹은 갱신하겠다는) 용기로 들렸다. 하지만 그는 회화의 조건과 그에 대한 매체적 방법을 비약적으로 교차시켜 놓았다는 스스로의 망상에 대해 의구심을 표하면서, 일련의 회화적 성취에 대 한 진지함을 농담인 양 얼버무려 놓은 채 다시 유보하고 만다. 표피적으로 드러난 이러한 변덕은 사 실상 “수건 그림”으로 당위성을 얻게 된 박노완의 회화에 관한 정체성-콤플렉스와 극복-을 가늠하 게 한다.

박노완은 자취를 하면서 집에서 가져 나온 “부천광림교회” 수건을 몇 년 동안 사용하다가 그것을 정물 삼아 큰 그림을 그릴 수 있겠다는 회화에 대한 가능성을 생각해냈다. 복슬복슬하고 특유의 성근 수건 표면과 그 끄트머리에 조야한 잉크로 인쇄된 교회 이름은 회화 표면의 질감과 그것의 자율 적 형식 논리에 그대로 대입되어, 그에게서 (비약적인) 모방과 동일시를 이끌어냈다. 오래된 교회 기 념품 수건에 대한 기억은 오래된 회화와 관련된 (역사적이고 현실적인) 경험과 뒤섞여, “수건 그림” 에 대한 이중의식을 구축해낸다. 이 “오래된” 대상들에 대한 일종의 콤플렉스가 강박적 집착과 더불 어 그에 대한 순수한 애정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우산〉(2022)과 〈부츠〉(2022)도 같다. 박노완은 닳고 망가질 때까지 사용한 우산과 부츠를 그렸 다. 살이 녹슬어서 어정쩡하게 벌어진 우산과 밑창은 갈라지고 가죽이 삭아서 형태가 일그러진 부츠를 그는 버리지 못한다/않는다. 더 이상 쓸 수 없는 지경이 된 것을 캔버스에 꽉 차게 그려 놓고는, 그 오래된 물건들을 모든 것이 붕괴한 폐허의 이미지로 치환해 놓는 셈이다. 이때, 그는 오래된 물 건을 거의 (물질 상태의) 유일무이한 상태로 몰아붙여 캔버스 안에 추상적인 이미지로 밀어 넣으려는 사람처럼, 그의 신체는 현실의 무기력한 이미지를 (폐허같이) 적막한 그림 표면을 향해 강렬하게 쏟아낸다.


 
2. 흐릿해질 때까지

박노완의 〈큰 수건〉에는 (파란) 얼룩이 있다. 이 얼룩은 그의 그림 전체에 스며있다. 그는 그것이 그 림에 때가 낀 것처럼 얼룩덜룩한 것이라고 말했는데, 가만 볼 때 그 파란색 톤이 그림 전체를 흐릿 하게 열화시켜 뜻밖에도 추상적인 감각을 도모한다. 파란 얼룩의 실체는, 아마도 기독교 대한감리회 소속 “부천광림교회”를 표기한 파란색 잉크가 사각의 거대한 분홍색 평면을 수건으로 (재)인식하게 하는 경험처럼, 회화의 평면에 대입한 무기력하게 열화된 현실의 이미지를 다시 추상적인 회화로 용 해시키는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교회 전단지 부분〉(2022) 연작과 〈줄기세포에 관한 이미지〉(2022) 연작을 보면, 회화의 평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파란색의 흐릿한 윤곽선을 볼 수 있다. 〈교회 전단지 No.1, 2, 3〉는 길에 떨어져 있던 교회 전도용 전단지를 주워 한 부분을 삼면화처럼 나란한 세 개의 캔버스에 옮겨 그린 것이고, 〈줄기세포에 관한 이미지 No.1, 2〉는 길에서 의료 광고 이미지를 보고 와서 그린 그림이다. 그가 파란색 윤곽선을 통해 회화의 표면을 열화시키는 방식은 미세하게 조금씩 다르다. 크게 두 가지로 압 축해 보면, 하나는 윤곽선을 다른 색과 섞이게 해 계속해서 지워내는/닦아내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이전 작업에서 더 강조됐던) 형태의 윤곽을 화면 속에 비약적으로 우겨 넣는 방식이다. 둘은 별 개로 진행되기도 하지만, 사실 동시에 같이 작용한다. 길에서 주운 교회 전단지에는 초월적인 신의 대속과 구원을 전하는데 있어 천국에 대한 세속적 욕망이 저급하고 노골적인 형태로 그려져 있는데, 박노완은 그렇게 망가져버린 현실과 (심지어) 오작동하는 듯한 구원의 세계를 회화적 상황에 대입해 의도적으로 “실패”를 공유한다.

그는 이 실패를 지속할 요량으로 언제든 그림의 표면을 다시 녹여낼 수 있는 수채 물감을 사용한 다. 수채 물감에 고무액을 섞어 질감과 두께를 확보한 후, 그렸다가 닦아내고 말리는 회화의 노동을 강박적으로 반복해 그림의 표면이 흐릿해질 때까지 그린다. 파란색 윤곽과 다른 수채 물감이 일련의 과정 속에서 형태를 얼버무리듯 뒤섞일 때, 박노완은 그림 표면의 열화와 추상화 사이의 긴장을 늦추지 않고 이 사태를 핑계 삼아 극단의 평균점을 찾는다. 이는 〈줄기세포에 관한 이미지〉 연작에서 시각적으로 두드러진 것처럼, 형태의 왜곡을 감행함으로써 열화를 추진하는 행보와도 연결된다. 그는 캔버스의 모서리를 강하게 인식한다. 그 평면적 조건을 추상적 색면 회화의 가능성으로 살피는 것과 동시에 그는 역설적이게도 열화의 조건으로 동일시해 놓는다. 말하자면, 박노완은 평면의 캔버스에 파란색 윤곽선으로 형태를 옮겨 그리는 과정에서, 형태의 완벽한 재현이나 구조적인 완성도 취하지 않고 회화의 프레임에 순응하는 형태의 왜곡을 의도적으로 초래한다. 이러한 의도적인 회 화적 실패를 통해 그는 열화된 추상성을 파편적인 회화 언어로 짜깁기한다.

창가의 장식용 석고상을 그린 〈무제〉(2022)와 〈말린 당근과 배춧잎〉(2022), 〈아이스크림 홍보 풍선〉(2022) 등은 이미 현실의 열화된 대상을 회화적 평면에 대입해 보려는 한결 같은 시도를 드러낸 다. 무언가를 모방하거나 대신하거나 닮아 있는 “모조의” 열화된 대상들에서, 그는 동시대의 회화가 취급되어 온 일련의 형편을 교차시켜 본다. 그가 마련한 회화의 평면적인 조건 속에서 대상이 흐릿해질 때까지 수채 물감을 그렸다가 닦아내는 일은 열화된 형상을 단지 회화적으로 복원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는 오래된 수건만큼이나 뻣뻣해진 회화 자체의 오래된 표면을 녹이고 훼손시켜, 그 표에서 뭔가 그릴 만한 얼룩이 더 남아 있는지를 살피며 스스로 얼버무림을 감수하는 중일 테다. 조금 더 추켜 세우자면, 회화의 얼룩을 상속받은 자로서 완수해야 할 일일 테니까 말이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