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공간이 있다. 그 안에 동그란 형태 하나가 출현하고, 유사한
둥근 모양이 옆으로 나란히 펼쳐진다. 쌍을 이루는 두 형태들은 종이접기처럼 꺾이더니 줄을 지어 위아래로
이동한다. 배헤윰의 작업을 보고 있으면 이처럼 마치 무대 같은 사각형의 캔버스 평면 안에서 형태들이
자유롭게 자신들만의 공간을 만들어나가며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그림 속 형태는 현실의 대상을
재현하거나 상징적 의미를 지시하는 도상이 아니다. 이 형태들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이며, 고정되어 있는데도 왜 활동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돌이켜보면
배헤윰은 〈상은 어떻게 오는지〉(2016)와 같은 작업에서부터 이미지와 회화 평면에 그려지는 추상적
형태의 관계를 다루었다. 이러한 형태의 탄생에는 작가의 시지각이 개입된다. 무언가를 볼 때는 대상을 이미지로 기억하는 인지 과정이 수반되는데, 여기에서
기억된 상과 본래의 대상이 완전히 일치할 수 없는 오차가 생긴다. 내가 바라본 어떤 대상을 충분히 알고
있다 생각할 때조차도 실상 머리에 남는 것은 주관적으로 형성된 추상적 덩어리와 같은 이미지 잔상이다. 기억에
개입되는 상상력은 이러한 이미지를 보다 자유롭게 변형시킨다. 결국 그 이미지는 실제 대상과의 완벽한
일치가 불가능한 채 유사관계를 지닐 뿐이다. 배헤윰은 당시 이국적 식물의 독특한 외양에 흥미를 느껴
그것과 유사한 둥근 형태들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이 형태들은 실상 출발점이 된 현실의 대상과 어떠한
필연적 관계도 없이 자의적으로 존재한다. 그가 애초에 그림 속에 형태화한 것은 현실적 대상이 아니라
자율적인 이미지의 세계이다. 그는 이미지와 실제 대상과의 연결 관계를 의도적으로 더 느슨하게 만들어서
이미지에 더 많은 활동 공간을 열어주고, 인식 과정에서 일어나는 이미지의 능동적 진화과정을 수용함으로써
재현에서 벗어난 것이다.
〈말이
되지 않을 때 가능한 어떤 질서〉(2018)에서 배헤윰은 색종이를 연상시키는 색면들을 회화 평면 안에
다양하게 조합했는데, 이 색면들은 현실에 있는 대상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작가의 상상 속에서 창조된
이미지이다. 그것은 색종이와 유비관계에 있는 색면이지만 색종이를 지시하지는 않는다. 사회적 규약으로서의 언어적 기호체계에서 귀속되지 않은 채로 현실 위에 평행 상태로 떠 있는 비물질적인 이미지의
세계를 조형화한 결과이다. 이 비물질적인 이미지들은 작가에 의해 회화 평면 안에 하나의 형태로 자리
잡으며 얇은 몸을 부여받았다. 물리적 좌표가 있으면서도 볼륨을 가지지 않는 이 ‘얇은 몸’이야말로 현실과
유비관계에 있는 이미지의 세계를 상정하며, 물질로 구현되었으면서도 붙잡을 수 없기에 여전히 가상적인
영역에 걸쳐있는 회화적 형태들의 위상을 생각하게 한다.
배헤윰은
〈면〉(Face, 2018), 〈랜딩〉(Landing, 2018), 〈칸
이동 중〉(Traveling between stairs, 2018) 등의 작품에서, 대상을 재현한 것은 아니지만 무언가를 연상시킴으로써 현실 근처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형태들을 조형적 관계에
의해 배치하여 동적인 인상을 만들어냈다. 색면이 문처럼 열리거나 종이처럼 가벼운 도형들이 공중에서 내려와
착지하거나 나비 같은 형태들이 위로 아래로 이동하는 듯한 환영을 안겨주는 것이다. 형태들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 같은 인상은 배헤윰의 작품을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무대로 느끼게 만든다. 배헤윰은 흡사 무대 연출가처럼
사건을 상상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형적 얼개를 만들어서 일종의 설계도와 같은 그림의 ‘플롯’을 만들어왔다. 관람자는
추상적인 이 플롯을 통해 사건을 유추한다. 〈플롯탈주〉(Away
from the Plot, 2019)라는 제목에서 전해지는 바와 같이, 배헤윰은 최근 이러한
플롯 자체에서도 벗어나 정해진 목표 없이 그림을 만들어가는 시도를 하고 있다. 색채 간의 조화나 대비, 색면의 면적, 물감의 점도나 붓질의 방향, 배경과 형상의 배치를 만들어가는 그리기의 과정은 한층 더 중요해졌다. 2차원
평면 위에서 상승하고 하강하며 접히고 겹쳐지고 펼쳐지는 형태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들은 보는 사람에 따라 각기 그 모양이 달라진다. 그것은 흡사 몇 개의 단어들로 말을 건네는 시와도 같다.
루돌프
아른하임(Rudolf Arnheim)은 생각이 이미지를 요구하며 이미지들이 사고를 포함한다고 보고, 이를 “시각적 사고(visual thinking)”라고 명명한 바
있다. 회화에서의 조형화의 과정은 작가의 시공간 감각과 연동하는 사고에 자리를 부여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배헤윰의 작품들은 형태들이 생성되는 ‘조형(造形)’의 과정을 상상하게 만든다. 작가의 사고의 진행과정과 동기화되는
형태화 과정을 유추하면서, 관람자 역시 형태들이 공간을 채워가며 생성되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배헤윰의 작품에서 환기되는 움직임의 환영은 관람자 자신의 자발적 사고를 통해 발생하는 것이다. 시퀀스가 없는 하나의 평면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환영에 의해서만 작동하기에 완전하게 가상적인 것이며, 이미지를 조형화하는 작가의 사고 과정과 그가 그린 형태를 바라보는 관람자의 인식 속에서만 실현 가능하다. 또한 형태들이 무대의 주인공처럼 움직이며 확장되는 조형적 상황은 보는 이의 사고 안에서 지속적으로 새롭게 환기되는
것이기에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배헤윰은 이미지를 통한 시각적 사고를 추동하고, 논리적 인과관계에서 벗어나는 시적인 세계를
활성화한다. 배헤윰에게 있어 회화평면이란 자유로운 이미지들의 세계에 최소한의 정박지를 제공함으로써 아직
밝혀지지 않은 질서를 좌표화하는 장소인 것이다. 어떤 것도 될 수 있는 배헤윰의 그림은 여전히 알 듯
모를 듯한 신비로 남아있지만, 우리 안에 있는 세계를 열어주면서 우리가 맨 처음 색연필을 잡고 그릴
때에 만들어진 형태가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그리고 그 답은 여전한
수수께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