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영, 이 짙은 어둠을 보라, 2019, 유토, 초, 가변크기 ©국립현대미술관

“전국이 흐리겠으며 남부지방에는 비 오는 곳이 많겠다.”

은박으로 단정히 재단된 ‘기상예보’의 문장이 유리창에 가지런히 붙어 있었고, 창 너머의 하늘이 점차 어두워지더니 정말로 비가 오기 시작했다. 잔뜩 가라앉은 창밖의 풍경과 유리를 타고 미끄러지기 시작한 빗줄기 위로 겹쳐진 이 문장이 비범해지는 순간이었다. 같은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어 내려갔다.


“전국이 흐리겠으며 남부지방에는 비 오는 곳이 많겠다.”

세월호 참사 5주기 추념전의 서울 전시가 열리던 지난 4월 9일의 일이었다. 여느 전시의 오프닝과는 달리, 창밖의 풍경만큼이나 창 안의 풍경도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재난을 애써 말하는 자리, 그것을 잊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자리, 상실의 슬픔 따위는 떨쳐내고 어서 산 자들의 일상으로 돌아오라는 충고가 아니라 이 서러운 상실을 재차 기억하고 애도할 것을 주장하는 이 자리는, ‘미술’이라는 재현의 체계 또한 ‘세월호’라는 특정 사건을 위시한 재난과 상실의 고통에 직면해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이 문장은 단지 날씨를 알리는 서술을 넘어 참사의 그날을 현재로 소환하고, 어떤 심연의 슬픔을 일깨워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정치적 문장으로, 그리하여 이 슬픔의 정치가 향해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의지의 문장으로 점차 변해갔다.

〈내일의 날씨〉(2019)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세월호 추념전이 열리는 몇몇 전시장의 유리창 곳곳에 자리했다. 각 문장은 모두 세월호와 유사한 특정 재난과 참사가 벌어진 날의 기상예보이다. 김지영은 세월호 참사 이후 거의 실어증에 가까운 그 침묵의 당혹감을 이해해 보고자 팽목항으로 향한 적이 있다고 했다. 영문 모를 두려움에 잠식된 두 계절을 이미 보내고야 난 다음이었다고 했다. 그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간 어느 특별하고 잔혹한 바다가 아니라, 여전히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바다였다. 간혹 방향을 바꾸는 꾸준한 바람에 실려 오는 비릿한 바다의 냄새, 무한히 반복적인 움직임과 소리를 실어 나르는 파도, 아름다운 빛이 부딪쳐 바스러지는 수면을 보며 작가는 이 비통함 뒤에도 여전한 그 바다가 이상했다. 그는 매일매일의 날씨를 기록했고, 자꾸 바다를 그렸다. 맑은 뒤 구름이 많아질, 눈 또는 비가 내릴, 점차 흐리고 또 개일, 혹서의 혹은 혹한의, 밝고 고요한 바다와 어둡고 무서운 바다를, 시시각각 움직이고 변하는 파도를, 매일매일 바다 위를 떠도는 바람을, 바다 밑에 수장된 비통한 목숨들의 미명(微鳴)을.

김지영은 팽목항이 보여준 변함없는 바다를 보며 하나의 신념을 따르기로 한다. 침묵하지 않겠다는, 협상하지 않겠다는 재현의 의지이다. 김지영의 첫 프로젝트 《선할 수 없는 노래》(2015)는 “타인의 고통을 재현하는 것은 윤리적이지 않다(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는 아도르노식의 ‘재현 불가능성’에 맞서 기꺼이 “선하지(윤리적이지) 않음”을 선택하기로 한다. 이즈음 더욱 절박해져 가는 세월호 희생자/실종자 가족들의 투쟁은 날마다 고통의 수위를 갱신해갔고, 세월호를 둘러싼 언설들은 자주, 발설되어서는 안되는 ‘곤혹’에 가까운 것이 되어갔다. 김지영의 첫 번째 개인전 《기울어진 땅 평평한 바람》(2015)은 그럼에도 미술가의 소임은 다름 아닌 ‘재현 가능성’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함을 용기 내어 제안한다. 참사 이후 매일매일의 풍속을 기록해 비트로 전환한 북소리(〈바람〉(2015))가 살아 숨 쉬는 이들의 맥박처럼 가슴을 치고, 위태로운 기울기를 한 바닥을 타고 미끄러지는 물방울(〈바닥〉(2015))이 어느새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로 자리를 바꾼다. 검은 목탄 가루가 빈틈없이 눌려 들어찬 시꺼먼 바다(〈파도〉(2015))와 가만히 눈을 감은 얼굴(〈수면〉(2015))들을 마주하며 모든 인간에게 평등하게 다가올 죽음을 사유할 수 있는 우리는, 미술의 오랜 뿌리인 ‘재현(mimicry)’이 비로소 ‘재–현(re–presentation)’으로 확장되어감을 감지하게 된다.

김지영의 이러한 재현의 태도는 2016년부터 시작된 〈파랑 연작〉(2016–2018)으로 이어져 두 번째 개인전 《닫힌 창 너머의 바람》(2018)에서 물러섬 없이 단호해진다. 종이 위를 수천수만 번 오갔을 오일파스텔의 힘센 획들이 강렬한 마찰의 흔적을 남기며 참을성 있게 재난의 풍경을 그려냈다. 거칠고 뿌연 이미지로만 남아있을 먼지투성이의 아카이브로 깊숙이 들어가, 이 반복되는 재난의 구조를 밝혀주리라 기대되는 자료를 들추고 그러모아 보고 또 보고 곱씹어 읽는 행위, 그 집요한 수행이 그림을 그려내는 손의 수행으로 이동한다. 꾹꾹 힘주어 누르고 때론 가벼이 미끄러지며 형태와 부피를 조형해내는 손의 감각과, 수 겹의 지층을 켜켜이 비축하거나 뜻밖에 발색하는 오일파스텔의 묵직한 정서가 큰 내적 울림을 불러낸다. 이 고통스러운 이미지들로부터 끝내 도망치지 않은 화가의 책무를 쉬이 지나칠 수 없다. 고통을 재현하기 위해 그 고통에 마주해야만 하는 더 큰 고통의 역설을 넘어서는 일은 아마도 내내 쉽지 않았을 것임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을 이 집요한 재현의 의지가 종종 ‘희망’이며 동시에 ‘우울’인 푸른색의 모노톤 회화로 다시–현현(re–presentation)해 우리를 찌른다.

김지영의 작업은 몫 없는 이들이 처한 고통의 감각이나 그것을 발생시키는 부조리한 구조를 재현해 온 경향이 짙다. 재난의 역학을 파헤치는 일만큼이나 재현의 방법론을 부단히 다시 구성하는 일은 그에게 매우 중요하다. 작가가 마주한 최초의 사건들로부터 그 사건들을 명명백백하게 기억하고자 하는 끈질긴 노력을 경유해, 사건의 안팎을 요동치는 슬픔의 정동에 적극적으로 감응하는 성찰적 개입의 시간을 보내는 것, 다만 슬픔의 감정을 넘어 기꺼이 그에 연대하는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을 구성해내는 것이야말로 작가가 재현을 멈추지 않음으로써 가까이 다가서고자 한 것이었을 테다.¹

그런데 이제 막 자신의 양식을 단단히 구축하고 예술적 커리어를 시작해 나가는 소위 ‘신진작가’가 재난의 시대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세월호 이후, 침몰하는 배의 은유는, 쉴새 없이 출렁이는 물의 이미지는, 교복을 입은 학생들의 형상은 분명히 이전과는 다른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다. 관습적 은유는 종종 반윤리가 되고, 안온했던 이미지가 뜻밖에 정치적이 되어가는 이 시대, 김지영의 미술 실천은 ‘윤리적 재현’이라는 하나의 정언명령을 향한 도전이 될 수 있을까? 이 고통 속에서도 끝내 살아내야 하는 이들, 재난 그 이후, 슬픔의 주체로서 ‘남겨진 자’들을 위한 재현의 윤리를, 그는 다시 구성해 옹호할 수 있는 것일까? 작가 김지영의 새로운 실천이 또한 어디를 향하고 있을지 기대되는 시간이다.

 

¹파커 J. 파머,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왜 민주주의에서 마음이 중요한가』, 김찬호 옮김 (파주: 글항아리, 2012).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