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는다는
것은 우리 시대의 새로운 윤리다. 불꽃의 가장 뜨거운 색 파랑으로, 하얀색
종이가 뜨겁게 타올라 파란색 불꽃의 일부가 될 것처럼 김지영은 『닫힌 창 너머의 바람』(2018)을
썼다. 1950년 6월
28일 〈한강인도교
폭파〉
사건부터 2015년 1월
10일 〈의정부아파트
화재〉까지, 오래된 신문 기사를 뒤져 한국 현대사에 기록된 서른두 건의 폭파, 붕괴, 화재, 침몰 등의 사건일지를 재편집한 책. 다리나 지하철 같은 공공 건축물이나 호텔, 아파트, 유람선 같은 대중 집합 시설에 관한 현대적인 표준 안전 시책이 수립되기 이전,
그리고 안전 기준이 마련된 이후에도 유사 고유명사로 안착한 ‘안전불감증’이 불러온 사고들.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이곳에서 일어난 대형
인재 참사의 목록을 훑으며 스트레이트 기사 풍의 건조한 문장으로 작성된 글을 읽다 보면, 2014년 4월 세월호 사건의 기억이 근 과거의 단편적인 사건이 아니라 현대 사회의 원형과도 같은 도시형 재난의 역사적
계보 속에 있는 것으로 다가온다.
이
사고들은 살인 사건보다 시각적으로 더 충격적인 이미지로 대중의 머릿속에 저장된다. 공공장소나 공공건축물을
매개로 한 사건 현장의 기록은 스펙터클한 수준이다. 그 기념비적인 재난의 이미지들은 물리적이고 정서적으로
압도적인 폭력의 힘을 등에 업고 당대의 사람들에게 트라우마를 남긴다. 최초의 충격적인 경험 이후에 유사한
사건은 새로운 자극이 아니라 체험의 반복으로 인지된다. 사건들은 수용자의 마음 안에서 떨어져 있지 않고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최초의 충격, 일상을 무너트리고 그동안의
삶과 사회를 낯설게 보게 되는 순간의 경험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그 후의 반복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주관이 수립되기 이전, 어린 시절에 맞닥트린 사건 사고 중에서도 분명 당시의 일상을 깨트릴
만큼 강력한 것이 있었을 텐데, 김지영이 세월호 사건을 일상과 창작에 있어서 특별한 계기로 맞이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안다는
것과 이해한다는 것 너머에 체감한다는 것이 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정보와 지식의 양이 경험의 감각과
인지 능력을 초과하는 시절이 지나고 나면, 문득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으로 아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게 되는
일들이 생긴다. 일상의 모든 것을 멈춰 세우고 말문을 틀어막는 고통스러운 체험을 대하는 태도는 제각각이다. 고통에 맞서는 것은 이미 고통에 마비된 사람에게는 더욱 더 두려운 일이기에 많은 사람은 침묵의 길을 택한다. 운을 떼는 사람 역시 매우 느리고 무겁게 시작할 것이다. 하나의
고통스러운 순간을 겨우 견디고 나서 다가오는 연속되는 고통의 경험들은 이제 그것의 면역력이 된 침묵과 함께 홀로 넘길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흑인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오드리 로드(Audre LORDE,
1934–1992)가 말하듯이 우리의 침묵은 우리를 지켜주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필요한 언어와 그것의 의미를 중시하기보다 두려움을 더 중시하도록 사회화되어 왔지만,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진 사치스러운 최종적 순간만을 기다리며 침묵한다면, 그 침묵의 무게는 우리를 질식시킬 것이기 때문”이다.¹
그러므로
김지영은 온전히 떨쳐지지도 않을 두려움을 그러안고 다시 창작을 시작한다. 종이가 일어나고 찢어질 정도로
목탄을 짓이겨 그려낸 〈파도〉(2015)를
두고 “목탄이 [그림의 재료 중] 가장 가벼운데 이것으로 최대한 검어질 때까지 부딪혀서 만들어내야만 [다시
그림을 그리는 게] 조금이라도 가능해지겠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한다.² “흑연의 응집력이 때 묻지 않은 종이에 의해서 점착력으로 부추겨진다. 종이는 스스로의 순결함의 잠에서 깨어, 하얀 악몽에서 깨어난다.”³ 이것은 프랑스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884–1962)가 어느 낭만주의 작가의 리얼리즘에 관하여 “(외부적 세계가 아니라) 물질이 존재한다.”고 설명하며 언급한 말이다.⁴ 작가에게 있어 리얼리즘이란 외부적 세계가 아니라 그가 다루는 물질에 존재한다는 말은 물론 전자의 전적인 부정이라기보다
후자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겠지만, 작가의 삶의 모습에 따라 전자와 후자의 경중을 논하는 것이
무의미해질 때가 있다. 흑연의 자기 고립하는 응집력이 종이에 부딪혀 점착력으로 변화하고, 종이가 순결함과 하얀 악몽에서 깨어난다는 근사한 표현은 무자비한 현실의 은유로서도 강력한 힘을 지닌다. 김지영에게 있어 캔버스와 안료의 세계에 머무는 것과 생활 세계의 사건과 사람을 마주하는 일은 몸의 체감 정도에
있어 구분되지 않는다. 양자는 서로를 부추긴다.
생존은
더 이상 사유와 무관한 본능적이고 자동적인 ‘먹고사니즘’의
삶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한때 윤리적 화두는 일상에서 벗어난 예외적인 비상사태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사회학자 김홍중에 따르면 우리가 직면한 일상으로서의 인류세라는 “냉혹하고 초현실적인 생태–존재론적 위급상태의 이름”은 “생존주의를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정치적 자원으로 전환시킬 기회를
제공”한다.⁵ 이러한 존재론적 전환은
사건에 적당히 거리를 둘 수 있는 관찰자로서 “파상의 핵심(...) 환멸이나
실망을 통한 자아의 변형”(김홍중)을 통해 도달하게 되기도
하고,⁶ 사건에 휘말려 억압받고 상처받은 자가 “이미
그 고통을 모두 겪고 살아남았음을 되새기”(오드리 로드)며
일어나기도 한다.⁷ 어느 쪽이나 그러한 전환의 과정은 그 자체로 고통스러우며, 전환 이후의 삶 역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삶
그 자체가 분투이기에.
김지영의
작업하는 삶은 육체적으로 고되어 보인다. 약 한 달에 가까운 시간 동안 하나의 화면을 구축하기 위해
집중하며 특정한 상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매일 직장인들처럼 작업실에 출퇴근해서 시간을 보내며 겹겹이
화면을 쌓아간다. 화면이 평평해지지 않고 특정한 레이어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유화 물감을 빨리
마르게 하는 각종 미디엄을 사용하지 않는다. ‘붉은 시간’(2020–2021)
연작에서 화면은 대체로 크고 비율은 제각각이다. 80호 정사각형에는 초의 형태가 보이도록
하고, 좀 더 큰 화면에서는 위아래로 번지는 빛을 담았다. 큰
화면의 연작 회화는 작가의 체력을 소진해서 만들어진다. 그림 속의 대상은 언제나 촛불 한 자루. 작업실의 형광등 불빛 아래 조용히 심지가 타들어 가며 대기나 바람에 흔들리며 발광의 상태가 달라지는 촛불을
집요하게 바라본다. 촛불은 몽상의 매개가 되어 재난을 겪은 사람들에 관한 생각으로 이어준다. 불은 계속 흔들리며 변화하지만 언제나 뜨겁다. 한 대의 심지가 다
타들어 가는 시간 동안 밝혀지는 촛불에서 인간의 생명을 본다. 몽상의 과정에서 신체적 노동이 필수적으로
수반된다. 재난과 고통의 재현이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은 끼어들 틈이 없다. 무엇을 그리든 그것이 형상적이거나 상징적으로 무언가를 재현하는 것이
되어 버린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재현의 창작을 그의 몸이 버틸 수 있을지, 끝까지 버티는 것을 지켜봐야 한다.
공허한
생존주의와 다른, 윤리로서의 생존은 우리 시대 작가들의 창작하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다. 사회적 사건이든 개인적인 고난의 체험이든, 고통을 기억하는 작업은
신체를 소진시킨다. 그러한 소진은 촛불이 심지를 따라 타들어 가듯, 외부로
빛과 온기를 방출하기 위해 불가피한 것이다. 불빛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멀리까지 도달할까? 빛이 사그라지고 온기만 남은 때라도 그리
늦지는 않을 것이다. 기억은 현재가 아니라 오지 않을 것으로서의 미래를 향하는 것이므로.
¹오드리 로드, 「침묵을 언어와 행동으로
바꾼다는 것」(1977), 『시스터 아웃사이더』, 주해연, 박미선 옮김(서울: 후마니타스, 2018), 53쪽.
²2021년 8월 19일 인천아트플랫폼에서 대화 중 김지영의 발언.
³가스통 바슐라르, 「물질과 손」, 『꿈꿀권리』, 이가림 옮김(파주: 열화당, 2007/1980), 78쪽.
⁴같은 책, 76쪽.
⁵김홍중, 『은둔기계』(파주: 문학동네, 2020),
231쪽, 234쪽.
⁶김홍중, 앞의 책, 77쪽.
⁷오드리 로드, 「서로의
눈동자를 바라보며」(1983), 앞의 책, 33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