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색의 스펙트럼이 한 화면 안에서 미세하게 흔들리는, 공기나 액체의 표면을 따라 흐르는 듯한 이미지를
마주한다. 구체적인 형상을 지시하지 않는 그림의 표면 위로 관객의 그림자가 포개지면 이미지는 그림자와
함께 일렁인다. 관객은 화면 안으로 자신의 시선과 집중력을 수렴시키다 특정할 수 없는 감정적 층위와
온도, 감촉을 느낄 수도, 그 시각의 자장은 어떤 잔여를
남길 수도 있다.
김지영의
근작 〈붉은
시간〉은 ‘촛불’이라는 특정한 대상에서 작업의 단초를 찾는다. 그러나 이 연작은 대상을 재현하지 않는다. 작업은 침몰하는 배나
무너져 내리는 시멘트 건물 등을 구체적으로 드러냈던 〈파랑
연작〉(2016–2018)이나 까맣게 그을린 심지를 드러내며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초-조각, 〈이 짙은 어둠을 보라〉(2019)와
같은 선상에 있지만 형식적으로 다르게 등장한다. 〈수면〉(2015)이
죽음과 희생의 모티프를 잠든 얼굴에 겹쳐 놓으며 재현을 시도했던 것과도 그 양상은 구별된다. 〈붉은 시간〉은 대상의 모방적 묘사에
의존하지 않는다. 이 그림들은 흔히 말하는 ‘구상적인’, 구체적인 형상을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어떤 상태’에 불과한 일렁임, 불의
이미지를 구현한다. 크롭하고 확대된 이미지가 원본 대상과 멀어지고 추상화되듯, 눈앞의 회화는 촛불이란 대상의 설명적 요소를 소거한 시각적 이미지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김지영의 작업은 ‘재현’의 논리로 설명되곤 한다. 그 이유는 그의 작업이 줄곧 2014년 4월 16일의 사건을 환기해왔기 때문이며, (〈붉은
시간〉의
경우) 촛불이라는 대상을 시각화했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이유로 김지영의 작업은 암시적이고 우회적인 방식으로 무언가를 재현하다고 얘기된다. 〈붉은 시간〉 연작은 정말로 재현을
방법으로 취하는가? 이 회화는 붉은빛을 띠는 커다란 색면을 보여줄 뿐이지 않은가? 이로부터 우리가 보는 것은 무엇인가? 작업은 비극과 재난을 지속적으로
환기하지만 그 비극과 재난의 광경을 결코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모호하고 뿌옇게 그려진 이 아름다운
그림이 결코 재현을 취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피터
오스본(Peter Osborne)은 ‘추상적 이미지(abstract images)’ 라는 제목의 글(1997)¹에서 리히터가 80년대 후반에 선보인 추상적이고 미적인 회화를 두고 일어난 비평적 논의를 재검토한다. 그는 리히터의 포토페인팅에서 사진적 특성이 어떤 대상의 형상적 닮음이 아니라 지표(index)로 기능한다고 설명한다. 나아가 이미지를 끌개 등을 이용해
밀어 버리는 결정은 도상적 유사성이 없이 지시적 기능만을 취한 결과라고 말한다. 추상적 이미지가 도상적
닮음이 아니라 다만 지시성을 통해 기호와 의미, 사유를 발생시킨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어쩌면 김지영의 그림은 리히터의 1980년대 추상회화가 처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곤란을 마주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2014년 4월 16일의 사건을 상기함에도 ‘추상적’이며, 형식주의로 보일 지나치게 ‘미적’인 것으로 간주된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김지영의 근작은 미적이고 추상적인
가운데, 구체적인 도상적 닮음을 호소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의미를 불러일으키는 지시적 기호로 작동한다. 그 기호는 은유와 상징을 경유하지 않은 채 사진과 영상을 비롯한 당대의 매체적 조건을 딛고 작동한다.
이를
전제로, 작가의 과거 작업과 〈붉은 시간〉 연작의 관계를 따져볼
수 있다. 가시적 대상의 재현을 포함한 과거 작업, 그리고
그 작업의 일부가 되었던 동시대 미디어와 사진, 영상, 텍스트의
재현적 기능을 바탕에 두고 최근의 근작이 도상적 닮음이 아닌 무언가를 나타냄을 무색하는 것은 아닌지 유추할 수 있다. 일례로 우리는 그의 영상 작업 〈빛과 숨의 온도〉(2020)에서
팽목항을 본다. 2014년 이래 우리로 묶을 수 있는 임시적 공동체에게 팽목항과 인근의 바다는 특수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해명되지 않은 비극, 세월호의 희생자들, 적절히 끝마치지 못한 애도와 애도의 참석자들을 품고 있으며, 끊임없이
어떤 문제를 상기시켜야 하는 윤리적 책무를 호출한다. 이 영상의 지시적 상태는 분명 회화 작업을 보는
데에 꽤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럼에도 추상적 회화는 정확하게 말하자면 비극의 장면 자체와 멀어져 가는
모습이다. 이로부터 영상과 회화 사이, 지시적 기호와 물리적
흔적의 사이, 팽창하는 의미와 무의미의 사이의 간극이 확인된다. 이렇듯
불투명한 이미지는 기호, 의미, 재현의 가능성과 불가능성
사이에 계속해서 난점을 낳는다. 섣불리 의미의 닻을 내릴 수 없는, 알
수 없고 먹먹한 감정만이 유추되는 색면의 이미지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확인케 한다.
그렇게
추상적이라 말하는 편이 좋을 〈붉은
시간〉
연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촛불’과 그를 둘러싼 몇몇 의미망을 형성하면서 그날의 비극에 관여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김지영의 그림은 희생자를 상실한 자, 즉 애도하는 자의 위치에서 시도된다. 이를 위해 작가는 비극적 참상을 재현하기를 택하지 않고, 다만 그것을
지시하는 상태를 이미지 내부에 심어둔 채 애도의 방법을 구체화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다만, 촛불 혹은 비극이 흘러간 바다를 환기한다고 여겨지는) 추상적 회화는 애도와 관계 맺는다.
주디스
버틀러는 “나는 애도가 언제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지, 또는
다른 사람에 대한 애도가 언제 충분해지는지를 확실히 알지 못한다”²라고 쓴다. 이 문장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애도를 영원히 지속하자는 것도, 불가사의함을
영영 불가사의한 상태로만 내버려 두자는 것이 아닐 테다. 대신, 바삐
다음을 약속하는 일 이전에 결코 성공적일 수 없는, 불가사의함의 상태 자체를 마주하는 일을 성실하게
옹호한다. 김지영의 회화는 바로 이 불가사의한 애도와 상실의 사태에 참여하는지도 모른다. 작가가 보여주는 이미지는 희생자의 필사의 노력과 고통을 나 자신의 슬픔 속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상실한 자, 애도하는 자의 자리에 있다. 작가는 우리를 사로잡고 장악하는 슬픔, 끝마치지 않는 애도의 불투명성을 이미지의 한 성질로 파악한다.
관객으로서
우리가 보는 것은 단순한 사실로서 추상적인 회화, 색과 빛을 따라가는 붓질의 흔적뿐이다. 그렇게, 〈붉은 시간〉 연작은 보이는 이미지가
곧바로 특정한 의미에 들러붙기를 쉬이 허락하지 않는다. 나는 작가의 근작을 촛불이 상징적으로 포섭하거나
굴절시키는 여타의 의미로 설명하길 주저한다. 어떤 마음과 시간, 행위의
흔적으로서의 붓질은 구체적인 선언과 형상의 지시 없이도 충분히 의미심장하다. 그의 회화는 미적인 형식을
통해서, 순수하게 시각적인 상태로서의 불투명성을 남겨둔다. 다시
말해, 회화에서 이미지의 출몰 방식은 그 내부의 해명 불가능성을 일종의 필수 조건으로서 삼는 것이다. 김지영의 작업은 상실이 가져온 불가해한 슬픔을 부둥켜안고, 그 자체로
알 수 없는 사태를 형상화함으로써, 비극을 간편하게 기억하고, 또
외면하는 일이 아닌 것으로 만든다. 여기 회화-이미지에서
추상성과 불투명성은 버틀러가 말하는 성공할 수 없고 충분할 수 없는 애도를 내부적이고도 현재적인 것으로 마주하게 한다. 그렇게 작업은 밝혀지지 않은 모호한 사실들과 정념화된 은유에 휩쓸리지 말고,
그림 안에서 혹은 당신 안에서 이미 유래하는 상실을 마주하라고 말한다. 이 모든 과정을
상실의 불가해함을 마주하는 애도의 절차에 유비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시도되는 애도는, 어떤 대상이 삶을 끝마쳤을 뿐 아니라 내 안에서 세계가, 타자가
사라졌다(내 안에 이미 저 밖이 있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¹Peter Osborne, “Abstract Images: Sign, Image, and Aesthetic in
Gerhard Richter’s Painting”(1998), in Gerhard Richter (Ed. Benjamin Buchloh),
pp. . (The MIT Press, 2009)
²주디스 버틀러 (윤조원 옮김), 『위태로운 삶』, p.48. (필로소픽,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