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더
쉬퍼가 베를린 지점에서 전현선의 첫 개인전 《이해할수록 우리는 빛을 잃겠지》를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올해 2월 전현선이 에스더 쉬퍼 소속 작가로 발표된 이후 선보이는 첫 전시로, 신작 회화 10점이 공개된다.
전현선은
나무, 과일, 일상의 사물 같은 구상 요소와 추상 형태, 색면, 그리고 2014년
이후 점차 강해진 기하학적 도형들을 조합해 자신만의 독특한 회화 언어를 구축해왔다. 그녀의 화면 속
형상들은 차원과 의미를 넘나들며 끊임없이 변형되고 전환된다. 예컨대 원뿔은 삼각형 형태로, 색채 그라데이션을 통해 입체감을 암시하는 면으로, 혹은 화산, 산, 모자 등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전현선의 회화는 여러 회화적 스타일을 차용하고 혼합하며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는 전방위적인 성격을 띤다. 붓질이 느껴지는 장면, 점묘화적 구성, 디지털 렌더링이나 픽셀화를 연상시키는 도상들이 한 화면 안에서 공존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세 면의 벽에 작품들이 자유롭게 느슨한 그룹으로 설치된다. 작품들 사이의 빈 공간은 화면
속 도상들이 겹치고 중첩되는 것처럼 활성화되며, 하나의 가상 공간처럼 느껴진다. 이 효과는 마치 컴퓨터 화면의 여러 창들이 중첩되는 모습이나 동아시아 전통 병풍화 속 트롱프뢰유 정물화를 떠올리게
한다.
회화는
전통적으로 이차원 평면 위에 삼차원 공간의 환영을 구축해왔지만, 전현선의 작업은 오히려 ‘평평함(flatness)’을 강조하고 즐긴다. 그녀가 선호하는 수채화는 얇은 물감층을 통해 강한 채도와 얕은 깊이를 동시에 구현하며, 그 물성은 보는 이에게 끊임없이 화면의 평면성과 환영의 얇음을 환기시킨다. 때로는
화면에 뚫린 구멍이나 중첩된 파편들을 통해 시선이 그림 안으로 들어가게 만들지만, 그 안에 펼쳐진 것이
실제가 아니라는 점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전현선은
민담, 신화, 종교 속 이야기 구조에 매료되어 회화만의 고유한
내러티브를 찾고자 했다. 과거 제단화 속 종교 인물 뒤편의 풍경에서 영감을 받아, 성인도 죄인도 사라진 세계를 구축하며 그 자리에 색과 붓질, 형상이
머무르게 한다. 중세 제단화를 참조한 구성 방식이 여전히 화면에 남아 있지만, 그 미학은 지금-여기, 동시대에
기반하고 있다. 특히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세대, 그리고
비디오 게임을 통해 시각적으로 사회화된 경험이 그녀의 조형 어법에 깊이 스며 있다. 전현선에게 회화란
디지털 특성을 아날로그 방식으로 번역하는 장이다. 그 디지털의 특성은
‘명료함, 선명함, 매끄러움, 반짝임, 피상성’ 등이다.
그녀가
지닌 ‘응시’에 대한 진지한 태도는 폴 세잔(Paul Cézanne)의 회화에 대한 애정으로도 드러난다. 세잔이
젊은 친구 에밀 베르나르에게 전한 말, “자연을 원기둥, 구, 원뿔로 다뤄야 한다”는 조언은 전현선에게 깊은 울림이 되었고, 오늘날까지 그녀의 회화적 시선을 형성하는 중요한 원칙으로 작동하고 있다. 전현선의
회화는 서사를 전달하거나 장면을 재현하지 않는다. 하지만 화면 속 모든 형상과 색면, 도상에 대해 질문을 던지도록 유도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이 불확실한
세계의 감각을 고요하게 전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