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끼는 사람은 믿음 안에서 수행하는 자이죠. 베끼는 자는 나고살고죽는 인간의
불멸에의 욕망을 예시하는 은유이자 이미지일 겁니다. 보통 베끼는 자인 그(male)는 신의 말씀, 대가의 걸작이나 경전을 베끼면서 불멸의 존재/이름을 숭배하는 자입니다. 그는 지금을 사는 대신에 시간의 우연성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것, 초시간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를 획득한 것을 모방하고 흉내 내면서 시간성(temporality)을 뛰어넘으려고 합니다. 그는 오직 변화일 뿐인, 그러므로 무의미한 삶에 충실하는 대신, 변화와 우연성에 영향받지
않는 삶의 (비)존재(non)를
믿으려고 합니다. 그는 도피하고자 합니다. 베끼는 자는 지금
읽고/보고 있는 것으로 도피합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이 진심으로 잘 베끼면 마침내 그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고, 아니
베끼는 행위가 그 세계를 불러일으키는 수행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자입니다. 이 광기, 비이성, 희망. 미숙한
초심자의 베끼기의 질적 도약의 순간은 이미지나 문자가 진짜 세계로 돌변하는 순간일 것입니다. 혹은 그는
이미 그 세계가 실재한다고 믿는 자라는 점에서 글자와 이미지의 물질성이나 육체성에 사로잡힌 자일 것입니다. 여하튼
필사자는 누구도 피해 나갈 수 없는 평등의 실현인바 죽음을 부정하거나 죽음을 지연시키고자 불멸한 텍스트들, 경전들, 말씀들과 함께 머무르려는 자이겠죠. 양피지에 신의 말씀을 베끼는
수도승이나, 명화를 베끼는 아마추어 화가들이나, 제 키에
육박할 원고지 분량으로 걸작을 베끼는 습작생을 떠올립시다. 양피지와 깃털 펜, 물감과 붓과 캔버스, 비단 천과 분채물감, 원고지와 펜 등등의 시대적, 문화적, 분과적 조건을 전제로 그들은 시간의 부침을 이기고 살아남은 것들의 헤게모니를 떠받칩니다.
여기 『태평광기(太平廣記)』, 『요재지이(聊齋志異)』
등등을 베끼는 화가가 있습니다. 처음 듣는 ‘경전들’입니다. 네이버 검색을 해봅니다. 이
작가를 사랑해야 하는 순간이 되었으니 논문도 겸사겸사 찾아보며 새로운 세상에 눈뜨게 됩니다. 간략히
정리하자면 『태평광기』는 신선, 여선(女仙), 도술, 방사 등이 등장하는, 송나라
시대에 편집된 500권의 설화집이군요. 『요재지이』는 귀신과
여우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중국 청나라 초기 소설가 겸 극작가”
포송령의 단편 500여 편을 모은 지괴(志怪) 소설집입디다. 『요재지이』 번역본은 아동용부터 어른용까지 여러 출판사에서
출간되어 있습니다. 만화본도 있네요. 최수련 작가는 영어본도
소장하고 있는 걸로 보아 귀신이 나오는 허무맹랑한 중국 설화에 관한 한 오타쿠적 취향을 갖고 있다고 보입니다. 한자를
배웠지만 일상에서 한자가 지워진 세대에 속한 작가는 집에 비치된 아동용 『요재지이』를 읽었고, 십 대에는
당시 한국 사람 대부분이 그랬듯이 중국이나 홍콩의 고전 판타지 (도사)영화나
비디오를 즐겨 보았다고 합니다. 『요재지이』를 원전으로 한, 귀신과
순박한 청년의 사랑 이야기인 (1987)은 다들 보셨죠? 대학원까지
서양화/회화 전공자로서 배움을 마친 작가는 무엇을 그릴까를 놓고 고민하던 중 자신의 성장에 지대한 기여를
한 중국의 귀신 설화집, 홍콩 영화 베끼기에 착수합니다. 동시대
사회에 대한 이야기도 작가 자신의 주관적 표현도 아닌, 자신이 한때 매혹 당했던 허무맹랑한 이야기나
영화 이미지를 필사하고 베끼는 작업을 화가의 ‘정체성’을
가진 작가가 지속하고 있으니 잘 보아야 합니다. 최수련의 작업은 설화집을 ‘원전/경전’으로 한 필사이고, 접근 불가능한 한자를 이미지처럼 그리고 글자 하나하나에 뜻을 달고 한글로 번역된 내용 전체를 필사해놓은 성실한
학생의 노트 차용이고, 잘 그리지 못한 초심자의 망친 캔버스 제작이고,
레트로 감성의 ‘궁서체’의 향연이고, 관객의 시야를 가로막으며 계속 나타나는 ‘죽었다(史)’란 결구(結句)의 포격이고, 한자와 나란히 명기된 영어번역문의 낯섦이나 웃김입니다. 당연히 어려서 믿고 즐긴 것은 커서 (굽어)보면 작고 보잘것없습니다. 그 시차,
그 거리가 작가의 작업 스타일에서 감지됩니다.
저는 작가의 작업을 보자마자 웃은 자로서, 작업의 가벼움이나 작업이 지향하는 ‘자유’를 정당화해야 하는 임무가 있을 것입니다만, 우선 이 작가의 작업의 ‘성찰성’을
지적해야 합니다. 화가나 작가의 자리를 초심자나 학생이나 아마추어의
‘형식’으로 대체하는 이 작가의 ‘빼기’의 스타일을 놓고 먼저 이야기해야 하는 것은 오리엔탈리즘과 회화/서양화의 ‘관계’입니다. 자신이
어렸을 때(무지했을 때?) 즐겼던 문화가 오리엔탈리즘의 일환이었음에
대한 작가의 각성이 있습니다. 서구적/보편적 합리성이 비합리적인
지역문화를 제거하는 근대화라 불리는 과정에도 불구하고 귀신 이야기는 설화집이란 문학 범주 안으로, ‘이국적인’ 홍콩 영화 안으로 숨어들어 잔존합니다. 서양이 자신의 거울-이미지를 위해 동양을 타자화하면서 만들어낸 오리엔탈리즘이 동양의 자기-이미지로
둔갑/변형되는 일이 비서구의 근대화의 일환이었음은 잘 아실 겁니다. 스피박(Gayatri Chakravorty SPIVAK, 1942~)은 1세계가
투사한 이미지를 이상적인 자기-이미지로 수용하면서 출현한 3세계와 1세계의 ‘관계’를 “세계화(worlding)”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 동양화와 서양화, 혹은 정관사(The) 회화와 지역화의 이분법도 이 작가에게는 문제의 대상이 됩니다. 서양화가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동양 이미지나 동양적 설화를 소재로 삼는 것의 이유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죠. 서양이
동양이란 타자의 발명을 통해 비로소 자기-정의에 이르렀듯이 회화/서양화의
자기 정의에 작가는 ‘동양풍’을 전유해 들임으로써, 자명한 것들의 질서를 교란하고 불안을 조성하고, 누군가에게는 결국
숨겨둔 웃음(이미 알고 있는 자의 제스처?)을 꺼내게 만듭니다. 베낄 가치가 없는 한낱 귀신들, 신의 지위로 올라가지도 인간의 권선징악에도
흡수되지 못한 타자들이 죽음의 공포를 몰고 다니면서 속이고 구원하고 단죄하고 사랑해주는 이야기들이 캔버스에 단단히 안착되는 데 실패한 흐린 이미지들, 덜 쓴 글자들, 형광펜이 난무하는 열성적인 학생의 필사 장면들, 단연코 이것은 회화가 아니라고 항변하는 광고문구 같고 전체주의 국가의 선전 포스터 같은 회화에 슬쩍 묻고, 흩날리고, 지워져 있습니다. 인용되자마자
부정되고, 나타나자마자 사라지고, 고지되자마자 허튼 말이
되는 이런 전통/교훈/가치라면, 이런 필사라면, 시간의 부식성을 회화적 형식과 스타일로 현시하는
이런 미적 구성이라면, 원본/경전/걸작의 횡포에 기식하는 동시대 권력들, 체제들에 대한 이 필멸에 바쳐진
작가의 작업 앞에서 웃는 일은 작가의 미적 태도에 대한 지지와 연대의 행위로 보아도 되겠지요.
설화집에 나오는 귀신, 주로 남자를 유혹하고 속이고 어려움에서 구해내는 여자(female)의 모습으로 인간계에 개입하는 귀신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빨아들이면서 공포를 ‘육화하는’ 타자를 부르는 이곳의 이름입니다. 그들이 나타나면 명료한 권선징악의 서사가 부식됩니다. 기성 사회의
도덕과 가치로 환원되지 않는 공포나 욕망을 전담하는 것이 귀신입니다. 제가 귀신이 나오고 누가 “죽었다”로 끝나는 설화집의 이야기를 베낀 작가의 ‘그림’을 보면서 웃었던 것은 이제 제 나이가 더 이상 귀신이 무서운
나이가 아니고, 귀신도 슬픈/약한 존재라는 것을 어느 날
깨달았기 때문일지 모르겠습니다. 작가는 세속의 시간성이 제거된 전시장에서 불멸의 캔버스를 감상하려는
관객의 눈앞에 “죽었다”가
‘각운(脚韻)’처럼 사용되는 이야기를 끝없이
늘어놓습니다. 죽음을 피해서 ‘작품’을 보러 왔는데 ‘작품’은
없고 죽음만 난무합니다(말씀집인 구약의 각운이 ‘낳고 낳고
낳고’임을 떠올리시면, 이 작가가 왜 타자의 설화집에서 ‘죽고’를 발견해냈는지를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베낀 이미지, 수없이 돌려보느라 해상도가 최저상태에 이른, 환영성이 거의 지워진 이미지인 선녀나 ‘태평녀’는 하늘에 대고 삿대질하거나 발악하는 여자들, “감정을 드러내는” 여자들이고, 예쁜 여자들의 옷을 입고 못생긴 여자의 표정을 갖고
있기에 ‘삑사리’ 나는 이미지이고, 웃음의 대상이 되어도 무방한 ‘가난한’ 이미지입니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숭고한 이미지가 아니라 동시대에 다시 재생산되면서 변형, 왜곡된, 우스꽝스러운 조악한 이미지를 다룬다”고 말합니다. 국가를 위시한 공동체가 모셔 받드는 진지한 이미지가 아니라 여전히 죽지 않은 채 세속에 횡행하는 이미지들, 막 쓰이고 더럽혀지고 낡고 결국 스러지는, 거의 초월적인 것에 의지하지
않는 생(生)의 물리적인 변화를 현시하는 이미지, 그러나 결코 죽지도 온전히 사라지지도 않을, 언데드(undead)의 상태로 불멸의 타자적/다른 형상을 포획한 귀신, 여자들인 귀신인 이미지가 작가의 회화, 작가의 말로는 “회화적 제스처”입니다.
신성과 인성 사이에서 사는 귀신(鬼神)이 ‘추한/욕망이 깃든’ 얼굴을
한 여자행세를 하는, 인생은 어떤 교훈도 없고 ‘우리’는 결국 ‘죽는다’는 초-휴머니즘적 거대서사가 압도하는, “전단지나 표어 선전물이나 광고 현수막”의 형식으로 쓰여지고 그려진 텍스트의 시시함이 결국 죽음을 희롱하고 웃김의 소재로 써먹는, 이 “웃기고 무서운”, 작가의
자리는 지워버린 이 비인칭적 글쓰기로서의 회화를 볼 때마다, 읽을 때마다 저는 제 웃음의 원인이 웃길
대상을 간구하는 저인지 최수련이 마침내 회화라는 그물로 낚은 바람 때문인지 알지 못합니다. 회화적 제스처, 라고 앞서 작가가 말했잖아요.
옴(唵)!
***
양효실은 미학자, 미술비평가로, 서울대학교
미학과에서 「보들레르의 모더니티 개념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현재 서울대학교, 한예종 등에서 강의를 한다. 주디스 버틀러의 『불확실한 삶』(부산: 경성대학교출판부,
2014), 『윤리적 폭력 비판』(고양: 인간사랑, 2013), 『주디스 버틀러, 지상에서 함께 산다는 것』(서울: 시대의 창, 2016) 등을
번역했고 『권력에 맞선 상상력문화운동 연대기』(서울: 시대의
창 2017), 『불구의 삶, 사랑의 말』(서울: 현실문화, 2017) 등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