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조영주의 작업에 진입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입구는 ‘여성’일 것이다. 그는 그간 자신의 여성으로서의 경험과 관점을 재료 삼아 타자화되고 전형화된 여성성의 기호들을 비판적으로 재구성하는 영상, 퍼포먼스, 설치 작업을 선보여왔다. 요컨대 유럽에서 유학하던 시절 백인 남성의 티셔츠를 마치 ‘전리품’인 양 하룻밤 빌려 입고 초상을 찍는 프로젝트인 〈원 나이트 위드 썸원스 티셔츠 인 마이 베드〉(2006~2007)는 동양인 여성에게 덧씌워지는 편견을 어떻게 ‘자원’으로 이용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실험이다. 귀국 이후, 중년 여성을 이르는 명칭인 ‘아줌마’의 자기 표현을 주제로 삼은 시리즈의 대표작 〈꽃가라 로맨스〉(2014)는 ‘아줌마’다운 키치한 복장의 퍼포머들이 추는 어설픈, 그러나 진지한 군무를 통해 단일한 집단으로 환원될 수 없는 여성 개인의 삶과 욕망을 은근슬쩍 폭로한다. 비교적 최근 출산과 육아 경험, 그리고 코로나 시기를 거치며 ‘돌봄’은 작가의 또 다른 주제로 자리 잡았다. 주짓수와 레슬링의 동작을 참조해 만들어진, 각기 다른 스타일의 여성들이 번갈아 과격하게 서로에게 접촉하는 움직임을 담은 〈입술 위의 깃털〉(2020)은 양육자와 피양육자 간에 발생하는 힘의 역학에 대해 다룬다. 이 작업에서 애무와 폭력을 가르는 기준은 분명하지 않다.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퍼포먼스 〈인간은 버섯처럼 솟아나지 않는다〉(2021)와 이를 재편집한 영상 〈꼼 빠니〉(2021)는 작가에 의해 신체적 제약을 하나씩 할당받은 퍼포머들이 때론 경쟁하고 때론 협력하며 목적지에 도달하는 (조영주의 작업으로서는 드물게도) 서사 혹은 우화를 재현한다. 흔히 사람들이 ‘돌봄’이라는 개념에 기대하는 순진한, 혹은 낙관적인 상호공존의 유토피아는 그의 우화에서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서 출현한다.

이처럼 조영주의 작업은 조영주라는 한 명의 개인에서 출발하지만 자기 서사로 귀결되지 않고, 또한 특정 유형으로 범주화되는 여성들을 주제 삼지만 그로부터 작가 자신이 온전히 분리될 수 없다는 점에서 일종의 자기-민족지라 할 수 있다. 거칠게 요약해 조영주에게 여성이란 (자신을 포함해) 연구의 대상이다. 여기서 ‘여성’은 여성’만’의 특수한 역사와 경험을 축적하고 매개하는 물질적 토대를 가리킨다기보다는, 오히려 오랫동안 그것을 구성하는 사실들로서 간주되어 온 일련의 문화적 기호들을 의미한다. 그는 여성이라는 본질 혹은 자연으로부터 여성성의 기호를 분리해 이를 퍼포머들의 몸을 매개로 반복하고 변주하며 그 기호들이 자기 분열을 일으키는 지점까지 ‘갖고 논다’. 아마도 좁은 의미에서 이러한 ‘갖고 놀기’의 욕구, 또는 필요는 그간 그가 유럽, 남성, 이성애, 정상 신체 중심적인 기준으로 틀 지워진 숨 막히는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붙잡을 수밖에 없었던 “자율성의 작은 틈”(오드리 월런)에서 기인할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그런 견고한 세계에 손가락 하나쯤 들어갈 구멍을 내기를 원한다. 작업(하기)는 그 구멍을 통해 세계로부터 빼앗긴 주도권을 되찾는 방식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이러한 ‘갖고 놀기’, 즉 전유의 즐거움은 못마땅한 것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조영주는 자신에게 주어진 재료들, 쉽게 말해 동양인 여성이자 엄마로서의 경험과 정체성에 수반되는 기대와 편견을 비난하거나 해체하는 대신 그것에 의존하고 이용하는 방식을 택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 그의 작업은 시각적 기호의 과잉된 재현을 통해 그러한 전형화된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데에 일조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조영주의 목표가 전형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전형성을 더럽히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파괴는 단 한 번 일어나지만 오염은 여러 번 반복될 수 있다. 무엇보다 오염의 최악인 점은, 그것이 보이는 방식으로든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든 강한 전염성을 띤다는 것이다.

‘여성’과 ‘돌봄’, 그리고 나아가 협업을 주된 방법론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공동체’라는 주제로 확장될 수 있을 그의 작업을 놓고 일견 부정적인, 심지어 해롭게 들리는 ‘전염’을 운운하는 것은 다소 과한 해석일 수 있다. 하지만 이번 개인전이 포함하는 그의 신작 〈이산 신체 해후〉(2024)와 〈이산 신체 재회〉(2022)가 여성성의 기호들을 과도하게 반복함으로써 발생되는, 혹은 그러한 기호들에 ‘들러붙는’ 감정(정동) 자체를 내용 삼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작업이 가진 이른바 전염의 ‘능력’을 재발견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지하 2층에서 상영되고 있는 〈이산 신체 해후〉는 과거 TV 프로그램에서 차용한 이원생중계 형식으로 제작된 퍼포먼스를 재편집한 영상이다. 유럽에서 ‘포용적으로’ 받아 들여지는 동양인 여성의 제각기 다른 전형을 연기하는 네 명의 배우들은, 마치 서스펜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자신을 연출한 신디 셔먼의 〈무제 영화 스틸〉 시리즈를 연상시킨다. 또한 이들은 제각기 다른 시공간에서 살아가지만 비슷한 운명을 지닌 것처럼 묘사된다는 점에서 페미니스트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영화 〈디 아워스〉를 떠올리게 만들기도 한다. 〈무제〉 시리즈, 〈디 아워스〉와 마찬가지로 〈이산 신체 해후〉에서는 뭔가를 기다리는 듯한 초조한 표정의 배우들이 아무런 대사도 없이 텅 빈 공간의 몸통을 그저 불안으로 꽉 채운다. 뚜렷한 원인도 없이 주체를 습격하는 불안은 “놀라운 지속력”을 지닌 “카타르시스가 없는 감정 상태”(시안 나이)다. 구조적 차별에 의해 불안에 자주 노출될 수밖에 없는 소수자들에게 불안은 “일상화된 [실존적] 위기”(로렌 벌렌트)인 동시에, 공적으로 표현된다면 그저 ‘히스테리’ 혹은 “과잉 반응”으로 치부될 “소수적 감정”(캐시 박 홍)이기도 하다. 젊은 동양인 유학생으로서, 한국인 여성으로서, 아이의 엄마로서 조영주가 품었던 불안은 마치 자신을 추방한 세계에 복수라도 하듯 스크린을 매개로 귀환한다. 표현되고 발화되기보다는 차라리 작업의 분위기로서 유유히 떠도는 불안은, 역설적으로 관객들을 일시적인 ‘불안의 공동체’로서 결합한다.

마찬가지로 이원생중계 형식을 차용한 퍼포먼스를 재편집한 영상인 〈이산 신체 재회〉는 지난 수십 년간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있었던 비극의 역사를 요약하는 여성들의 신체 표현을 안무로 재구성한 작업이다. 조영주의 다른 작업에 비해 이 영상에서 강하게 감지되는 외설성, 달리 말해 불온함은 뉴스 보도나 다큐멘터리 장르에서 재현되는 분노와 슬픔, 고통과 상실의 성차화된 신체 표현을 그것의 원인이 되는 역사적 사건으로부터 분리했다는 점에 있다. 〈이산 신체 재회〉 속에서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 삿대질은 단순히 퍼포머들의 체력을 소진시키는 패턴화된 안무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퍼포머들은 단지 삿대질을 지속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분노와 슬픔, 고통과 상실로 가득 차 보인다. 이러한 판단은 오랫동안 우리의 시각적 인식 체계 내에서 특정한 주체의 신체 표현이 특정한 감정과 단단히 결합하여 왔음을 반증한다. 감정(정동)은 “자본”처럼 기호나 상품이 소유한 것이 아니라 오직 “순환의 효과일 뿐”(사라 아메드)라는 관점을 빌리자면 이러한 결합, 즉 ‘여성의 신체 표현’과 ‘과잉된 감정’의 결합은 그간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고 보도해온 대중 매체들이 여성들을 타자로서 재현해 온 전형적인 방식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이산 신체 재회〉는 오열하고, 주저앉고, 삿대질하는 감정적 ‘동물’로 재현되어 온 여성들을 양각하며, 동시에 관객으로 하여금 그들이 환기시키는 거대한 정동에 ‘전염’되도록 만든다.

끝으로, 협업에 관해서. 조영주의 이번 개인전 제목인 ‘카덴짜’는 협주곡에서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멈춘 구간이자 독주자가 자신의 화려한 기교를 뽐내는 구간을 뜻한다. 곡의 테마를 홀로 변주하고 연주하는 독주자의 카덴짜는 관객들에게 있어 그의 악기를 다루는 기술과 곡을 해석하는 능력을 판가름할 수 있게 해주는 결정적인 순간이다. 오케스트라가 멈추고 카덴짜의 전조가 나타나면 청중들의 호흡은 멈추고 시선은 독주자에게 고정된다. 지난 수십 년간 협업, 바꿔 말해 협주를 작업의 조건 삼아온 조영주에게 있어 카덴짜의 독주자란 당연하게도 작가 본인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전시의 동선상 출구에 배치된 작품이자 또한 그의 새로운 프로젝트를 예고하는 입구가 되기도 하는, 이주 여성들의 합창을 다룬 영상 〈솔리스트들〉(2024)의 제목은 번역하자면 ‘독주자들’이다. 언제나 ‘떼’로 등장할지언정 그의 작업에서의 몸들은 자신만의 악보를 가지고 있다. 똑같은 카덴짜는 있을 수 없다. 이 차이 나는 몸들에게 귀 기울이기 위해 잠시 호흡을 멈추는 그 순간, ‘우리’는 잠깐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