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정은영은 거의 잊혀지고 사라져가는 전통예술을 현재로 소환하고, 현대미술 맥락 안에 위치시켜 끊임없이 발전시켜가면서 예술, 문화, 정치, 사회적 논의를 이끌어냈다. 작가는 2008년부터 약 10여 년에 걸쳐 여성배우들로만 이루어진 한국의 공연예술 ‘여성국극’을 연구하고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그는 여성국극의 행위자들인 배우와 관객, 무엇보다 남성 역할을 수행하는 남역배우들을 통해 여성국극 무대와 무대 밖 일상에까지 연결되는 성별의 정치학을 다루며 퀴어적 해석을 시도한다.

《올해의 작가상 2018》에 정은영 작가를 추천하는 첫 번째 이유는 끈질기게 질문하고 실천하는 작가라는 점이다. 현 시대의 속도를 거스르며 그는 역사 속에 공인되지 않은 이들의 인생과 예술로 뛰어들어 가장 가까이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고 질문하면서, 아주 천천히 그리고 단계적으로 여성국극의 역사를 살아있는 것으로, 현대미술과의 접합을 통해 새로운 예술적 생산으로 일궈냈다. 정은영은 자신이 처음 여성국극 배우들을 만나 매혹된 경험부터, 이후 그들과 일상사를 공유하면서 느낀 지리멸렬한 감정들까지 생생히 간직하면서, 가장 가까이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기록하다가 점차 개인적 경험과 여성국극의 재맥랙화 사이의 거리를 넓혀간다. 그는 배우들의 리허설 장면, 인터뷰 등으로 구성된 초기 작품에서 다큐멘터리 작가처럼 대상과의 거리를 조율하는데 신중을 기하며 일종의 여성국극의 아카이브를 만들었다면, 이후에는 그 배우들을 위한 무대와 영상을 마련하면서 여성국극에 대한 작가주의적 개입과 미적, 예술적 변용을 실험한다. 이러한 단계적인 과정과 긴 시간 속에서 작가는 뚜렷한 전략을 갖고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유보를 거듭하며 자신이 왜 여성국극을 재현할 수밖에 없는지 신중하게 그리고 끊임없이 질문한다. 정은영의 여성국극 프로젝트는 어떤 완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미완 속에서 작가 자신이 예술을 하는 이유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정은영은 여성국극 프로젝트를 통해 고정되지 않은 젠더라는 측면에서 성별의 정치학을 다룬다. 작가는 젠더라는 것이 결국 삶을 통해 변화하고 드러난다는 사실을 여성국극 배우들의 무대와 삶들 속에서 발견하고, 그것을 구술채록, 이론연구, 사진, 영상, 퍼포먼스 등으로 소환해낸다. 〈(오프)스테이지〉(2012)에서 무대에 선 여성국극 남역배우는 무대에서 멋진 남성을 연기하기 위해서 무대 바깥에서도 남성이어야 했던 개인사를 회고한다. 남역을 전수하는 수업을 재현하는 〈마스터클래스〉(2010, 2012, 2013)에서는 여성국극이 실현하려는 남성이 매우 과장된 것으로 실제 남자의 모습과 거리가 멀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환상에 가득찬 남성성을 연기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통해 통상적인 젠더의 관념을 비튼다. 무대 안팎에서 ‘되고자’ 노력했던 남성성이란 결국 허구라는 것을 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그 태도 자체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앞선 작업들에서 작가는 여성국극 배우들의 목소리를 통해 그들이 실제 과거 무대에서 하지 못한 얘기를 풀어낼 자리를 만들어준 한편, 2014년 아르코미술관에서 그리고 2017년 HKW(Haus der Kulturen der Welt)에서 선보인 렉쳐퍼포먼스 〈칼잡이들〉에선 작가가 퍼포머가 되어 여성국극에서 성별의 이분법 바깥에 놓은 새로운 성별의 논의를 펼쳐낸다.

2015년 아트 스페이스 풀에서 열린 개인전 《전환극장》에서 작가는 자신이 수집, 참조한 아카이브 자료들에서 추출한 이미지 몽타주에 “개인적이고 공적인 아카이브”라는 제목을 붙인다. 이 전시의 기획자 안소현은 어떤 명확한 중심을 설정하지 않는 상태에서 읽히는 이미지들의 경항성이 사람들에게 기입된 어떤 사회적 관심에 의지하거나 그 관습을 전복시키는 데에서 드러난다는 점이 젠더 형성과 아카이브 전시의 공통분모라고 설명한다. 정은영은 2016년 남산예술센터에서 극장 기반 작품 〈변칙 판타지〉을 통해 여성국극 프로젝트를 다른 국면으로 끌고 간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여성국극의 탄생 배경과 그 안에서 실현된 ‘성별연기’를 주목하면서 ‘쇠퇴 이후에 남겨진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작가는 여성국극 마지막 세대 남역배우 남은진의 운명과 아마추어 게이남성합창단 ‘지보이스’의 목소리를 통해 “마땅한 ‘자리’를 갖지 못한 이들의 불완전한 삶에 잔류하는 디오니소스적 미학을 일깨워내고자” 한다(작가 노트). 〈변칙 판타지〉가 보여준 것은 여성국극의 실패한 역사에 괄호쳐진 수많은 이유들(특히 남성 중심의 근대화에서 의도적으로 누락되어 타자가 된)을 동시대의 시점에서 사유하고, 현재의 성별정치에 관한 논의를 적극적으로 펼쳐간다는 점이다.

추천서를 쓴 후 일년이 지나 《올해의 작가상 2018》 전시에서 정은영의 신작 〈유예극장〉(2018)을 본 소감을 짧게 덧붙이고자 한다. 나는 이 작업을 정은영이 지난 10여 년간 여성국극에 다가가고 관찰하고 기록하고 현재화하는 등 일련의 과정을 거쳐, 지금, 왜, 이것을 해야만 하는지, 다시 작가 자신에게 질문하는 것으로 읽었다. 극장이라는 배경 안에서 작가는 여성국극의 마지막 세대 남역배우, 가곡창자, 드랙킹, 세 퍼포머들에게 지금 하고 있는 장르에 대한 생각을 묻고, 각자의 답을 교차시키면서 무수한 질문을 끌어올린다. 여기에서 세 명의 퍼포머 모두 각자 장르에 대한 열정 혹은 매혹을 표현하지만 그에 대한 태도는 상반되거나 차이를 드러낸다.

작가는 특히 자신과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작업해온 여성국극 배우에게 날 선 질문을 계속 던지면서, 당신이 그리고 우리가 왜 지금 여성국극을 재현하는 일을 하고 있는지 비판적으로 성찰해보자고 청하는 듯하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여성국극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이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냐는 작가의 질문에 여성국극 남역배우 남은진은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게 흐름을 잘 짜서 만들면 가능하지 않겠냐고 답하는데, 작가는 “안가능할 것 같다”고 응수한다. 다양한 전통문화의 하나로서 사라져가는 장르인 여성국극이 지속되길 바란다는 남역배우, 이에 작가는 가곡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서 공연하는 가곡창자 박민희의 현재 “가곡의 위치는 어디에도 없다”며 “한 시절 아름다운 것이 사라지는 게 그리 큰 일은 아니다”라고 하는 냉소적 태도를 병치하면서 전통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를 극명히 보여준다. 이는 전통과 과거를 동일시하고 그것을 고정된 것으로 이해하여 무조건 부정하거나 옹호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하는 태도와 전통을 끊임없는 경합을 통해 이어져온 연속체로 이해하는 것의 차이와 다소 유사해보인다.2

장면은 다시 남역배우와 드랙킹 아장맨을 교차한다. 전통 여성국극에서 가상의 남성성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했던 과장된 제스처와 남성적 소리를 전수받아 연습해온 남역배우와 지금 자신의 성정체성을 수행하고 해방시키는 장으로서의 무대에서 노래하는 드랙킹 사이에, 작가는 성별의 정치에 관한 논의를 슬며시 드리운다. 그러나 작가의 의도가 설령 전통과 현재, 그리고 성별 정치에 대해 질문하고 논하기 위함이라 할지라도, 이 세 명의 퍼포머들이 드러내는 것은 전통이나 역사에 관한 거시적인 관점이 아니라 결국 나 개인에게 필요해서, 살아가는 얘기를 들려주고 싶고 사적이고 사소한 노래를 만들어 부르고 싶어 이러한 작업을 한다는 고백 아닌 고백이며, 이것이 사실 어떤 말보다 크게 들린다.

작가가 수집해온 여성국극 아카이브의 자료와 영상, 1세대 배우 조영숙의 인터뷰 클립이 교차된 후에, 작가는 근대 남성 중심의 국악계에서 여성국극을 의도적으로 폄훼하고 훼손시켜온 역사적 자료를 직접 읽어 내려간다. 그 글은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까지 인용하며 여성들의 활동을 비판하는 가운데, 종국에는 다시 남녀 창극인 모두의 화합을 통해 전통 창극을 정립하라고 요청한다. 작가는 여기에서 다시 “남녀”와 “전통”을 끌어올려 되묻는다. “이 장르가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나요?” 이어 “내가 좋아하는 것이 살아남기를 바란다. 개인적인 바람이다”라고 하는 남역배우. 그러나 다시 영상 화면은 1960년대 여성국극 배우들이 남성 중심의 국악계와 맞서고자 했던 치열한 의지를 보여준 기사를 비춘다. 정은영의 〈유예극장〉은 전통과 현재, 이분법적 성별의 문제를 세 명의 퍼포머들의 인터뷰를 통해 해체하고 다시 재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만을 암시적으로 드러낸다. 작가는 여성국극의 역사를 되짚어보고 현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도, 1세대 배우들의 무대와 무대 밖 일상이 하나가 되었던 그 뜨거운 정동과 마지막 세대 남역배우의 막연한 희망을 품은 정동 사이에서 다시 접합점을 찾는 것 같다.



1. 이 글은 《올해의 작가상 2018》에 정은영 작가를 추천하면서 2017년에 쓴 글을 수정하고 《올해의 작가상 2018》에 전시된 신작에 관한 내용을 덧붙여 보완한 것이다.

2. 이영욱, 박찬경, 「앉는 법: 전통 그리고 미술」, 『앉는 법』 인디프레스 전시도록, 2016, p.24. 이영욱이 기획한 전시 《앉는 법》의 글에서 이영욱, 박찬경은 김수영의 시 〈거대한 뿌리〉(1964)에서 출발해 전통의 개념을 다각도에서 접근하며 한국 현대미술의 주요 사례를 접목한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