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림을 그리시나요?”
작가가 회화과를 나왔다는 것을 감안하면 어쩌면 실없을 수 있는 질문이다. 무의미할
수도 있는 질문을 한 것은 임영주의 작업 세계를 관통하는 주제에 회화라는 매체가 적합한가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임영주는 초기부터 지금까지 믿음의 기제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줄곧 다뤄왔고,
진짜 같기도 하고 사기 같기도 한 아슬아슬한 지점을 작업 자체로 구현해왔다. 풍수지리를
다룬 <술술술 아파트>(2014)나 촛대바위와
우상화에 대한 <애동>(2015), 월석과 사금을
찾는 사람들을 찍은 <돌과 요정>(2016) 등
그녀의 대표작들은 한편으로는 허황된 것에 빠진 사람들에 실소하게 하고, 다른 한편 무엇이 그들을 그리도
홀리게 하는지를 궁금하게 만들어(나아가 작업을 보다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게 되어) 그 자체가 현실(관객)과
딴 세상(등장인물)을 연결하는 영험한 도구로 작동했던 것이다. 도구라는 점에서 볼 때, 이미지,
소리, 글(자)
등 조작할 수 있는 요소가 많아 미혹의 덫을 놓기 용이한 영상에 비해, 말도 없고, 물성도 조소에 비해 약하며, 캔버스와 물감이라는 단 두개의 표현수단을
지닌 회화는 홀리게 만들기에는 너무 뻣뻣하고 고집 센 수단으로 보였던 것이다.
물질 ⇔ 비물질
뜬금없다면 뜬금없는 나의 의문은 작가의 설명을 들으며 두 가지 해답으로 귀결되었다. 첫째는
영상과 회화를 각기 분리된 플랫폼에서 구현한 이번 전시(《오메가가 시작되고 있네》(산수문화, 2017)의 구조가 암시하고 있었다. 임영주의 작업에서 영상과 회화는 하나가 다른 하나에 종속된 것이 아닌 독립된 두 개의 항으로 기능한다. 허나 이 둘은 서로 무관한 개체라기보다 스스로의 존속을 위해 다른 항이 필요한 상호의존적 공생 관계라고 보는
편이 적합하다. 다시 말해 그림이 존재하려면 영상이 필요하고, 영상
역시 다른 한편 그림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임영주가 작업을 하는 방식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녀의 하루 일과는 심신의 균형을 조율하기 위한 잘 정돈된 계획이다. 아침에
일어나 아침드라마를 보고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그림을
그린 후, 점심을 먹고 오후 3시부터 7시까지 영상을 편집하고 저녁드라마로 마무리하는 일과는 생물학적 리듬과 매체의 리듬을 적절히 통제하기 위한 정교한
장치다. 유화를 재료로 하는 그림의 경우 물감이 마르는 시간이 소요되므로 일상생활의 속도보다 상대적으로
느린 시간 감각을 지닌다. 반면 초 단위의 편집이 요구되는 영상은 프레임 단위로 생각을 하게 만들어
빠른 속도감을 지닌다. 더욱이 무한정 재편집이 가능한 열린 구조는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끝없이 손을
대게 만든다. 이런 속성 탓에 영상 작업은 사람을 성마르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회화는 영상의 초조함을 누그러뜨리는 상충 효과를 내는 듯하다.하루를
회화의 속도로 천천히 발동을 걸고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면 영상의 빠른 감각에 빠져들었다가 피로가 올 무렵 하루를 마무리하는 일정은 각 매체의
특수성과 생체 리듬을 조화시킨 최적화된 루틴이다. 그림과 영상은 같은 시기에 제작되고 소재 면에서도
동일하지만, 서로 다른 속도와 작업 방식으로 상호 보완을 이루며 각자를 뒷받침하는 버팀목으로 기능한다.
하지만 그림과 영상의 교호관계는 단순히 제작 과정의 물리적 지원에 그치지 않는다. 결과물의
형식에 서로의 영향이 녹아난다는 것이 이 상호협력의 흥미로운 점이다. 일례로 영상을 미리 본 내게 전시장에
설치된 회화의 배치는 마치 영상 속 스틸 이미지의 연결처럼 다가왔다. 영상작업 <애동>의 소재인 촛대바위 그림들이 좋은 예로, 각각 원경의 바다-촛대 바위 전경-확대한
바위 표면이 3개들이 세트로 그려진 <밑_물렁뼈와 미끈액>(2017)은 줌아웃과 줌인을 반복하는 영상의
단계를 하나씩 끊어내어 물화시킨 듯하다. 기둥이 튀어나온 경계면을 활용해 일종의 낙차를 만들어 단층을
조합해야 그림이 완성되게 한 트릭도 그림의 배치를 편집 개념으로 접근한 흔적이다. 복수의 캔버스를 바로도
거꾸로도 연결시키고 캔버스의 모양과 개수를 조합해 새로운 배열을 만들어내는 방식은 정확히 영상의 편집에 해당한다.
추상과 구상을 넘나드는 회화의 기법 역시 줌인과 줌아웃을 반복하며 흩어졌다 떠오르는 영상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다른 한편, 영상 역시 회화의 영향을 받는데 이야기 중심에서 이미지
중심으로 이행한 작업방식의 변화가 대표적이다. (이 분기점은 2016년
작 <돌과 요정>으로, 이후의 작업인 <총총>(2017)이나 <극광반사>(2017)는 이미지만의 향연이다.) 회화의 영향은 영상 속 이미지들의 결합에 흔적을 남긴다. 이를테면
같은 제목의 <밑_물렁뼈와 미끈액>의 또 다른 세트는 가늘고 긴 촛대바위의 외형이 무릎으로 바뀌는 사고의 비약을 보여준다. 이러한 자유연상 기법은 영상에도 반영된다. 우주에 보낸 메시지가
아기공룡 둘리가 유래한 빙하 장면으로 도약하고, 이것이 다시 빙하로 덮인 해왕성 이미지로 이어지는 <총총>의 이미지 연쇄는 회화인 <밑_물렁뼈와 미끈액>의
공간적 비약을 시간적 비약으로 전환한 사례일 것이다.
두 매체의 상호작용 외에 회화가 필요한 또 다른 이유로 추정되는 것은 물성의 문제다. 임영주는
그림을 걸어놓는 방식에 관심이 있다고 말했다. 그 말인즉슨 그려진 내용 못지않게 그림을 담는 프레임을
중시한다는 뜻일 테다. 정형화된 사각 캔버스 외에 원형이나 타원형 등 다양한 캔버스를 사용하는 것은
특정한 모양과 크기를 지닌 ‘물체’로 회화를 간주하는 태도다. 네모난 그림 옆에 동그란 그림을 걸거나
그림틀 위에 돌을 올려놓는 행위 역시 사물 대 사물로 회화를 배치하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임영주가 영상
외에 회화나 오브제를 품고 가는 것을 비물질인 영상이 채워주지 못하는 물성을 이들 매체에 기대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까? 이 지점이 실상 재미난 부분인데, 일반적으로 물질에 기대하는 ‘진짜’의
감각, 만지고 느껴지는 덩어리의 실재감이 이 작가에게는 방점이 아닌 듯하다. 성과 속,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이 백지장 한 장 차이로 엇갈리는
임영주의 작업에서 진짜와 가짜라는 이분법적 구분은 무의미하다. 그보다 그녀의 의도는 믿게 만드는 효과들을
최대한 다양하게 시험해보려는 실험에 가깝다. 어떤 종교단체든 음악과 그림, 영상, 퍼포먼스가 다 갖춰져 있다는 작가의 말은 이를 이해하는 단초가
된다. 영상이 구현하지 못하는 지점을 사물로서의 회화 및 오브제가 공간적으로 보완하고, 회화의 평면성을 영상의 입체적 층위가 지원하는 총체적 무대 효과가 그녀의 전시가 지향하는 방향일 것이다.
무엇이 믿게 만드는가
전술했듯 임영주의 전작은 믿음을 만들어주는 구조에 관심을 둔다. 운석과 사금을
채취하는 동호회 회원들을 따라다니며 이들의 탐사를 담은 <돌과 요정>은 인터뷰 및 동행 취재에 기반한 다큐멘터리인 동시에 요정님을 찾는 판타지물이다. 여기서 유사 종교로 보이는 탐사동호회 문화는 허황된 믿음을 의미심장하게 만드는 효과에 의해 증폭된다. 에코가 깔린 내레이션의 음성, 알 수 없는 선문답(보고싶습니다-보일 것입니다-보고
있습니다의 삼단 콤보), 신비한 인상을 주는 효과음, 전지적
시점과 참여자 시점을 왕복하는 다중 시점, 확대와 반복의 카메라 워크 등이 보는 이를 빠져들게 하는
착란의 기제다. 이렇듯 형식이 내용과 달라붙는 찰진 정합성은 임영주의 작업이 지닌 중요한 매력이다. 특히 영상 작업에서 내용과 형식의 합치가 두드러지는데, <애동>, <총총>, <극광반사>에 나타나는 ‘효과’의 사용은 상당히 능수능란하다.
일출부터 일몰까지 1시간 간격으로 촛대바위를 촬영한 <애동>의 구조는 비교적 단순하다. 카메라를 고정시키고 줌인과 줌아웃을 반복 촬영했기에 영상의 구도는 거의 동일하다. 약 3분쯤 걸리는 한 주기 동안 촛대바위가 확대되었다가 다시 멀어지는
것이 영상의 내용이다. 변하는 것이라고는 해가 뜨면서 서서히 바뀌는 바다색과 조광, 조금씩 달라지는 클로즈업 부위 정도다. 매 주기마다 ‘동해~물과’를 각색한, 지나치게 장중한(그래서
코믹한) 음악이 강박적으로 반복된다. 이 영상을 감상하는
경험은 꽤나 기묘하고 괴롭다. 30여분 동안 같은 음악에 비슷한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주입하면 감각이
마비된다. 영상을 꺼도 뇌리를 울리는 후크송 수준의 사운드가 특히 영향이 크다. 눈을 감아도 떠오를 것 같은 시청각 폭격은 판단을 마비시킨다. <애동>의 가장 큰 특징인 반복은 실상 촛대바위라는 소재와 붙어 있다. 촛대바위는
본래 능파대라 불리던 절경 중 하나로 추암이라 불리는 바위군의 하나였다. 그러다가 애국가 영상의 첫
장면에 등장하면서 유명해졌고 대표적인 해돋이 명소가 되었다. 작가에 따르면 요즘 이 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풍경 전체가 아닌 촛대바위 하나만을 찍는다고 한다. 그것도 모두 동일하게 촛대바위를 확대하는 구도로. 맥락을 제거하고 아이콘이 된 대상만을 빠르게 똑같이 소비하는 행태는 우상화의 본질이다. 이 선정적인 바위 이미지의 소비 행위에서 작가는 포르노를 연상한 듯하다. (제목인
애동은 야동에서 따온 것이다.) 스토리나 감정선 없이 목표 지점만을 확대해 카메라로 훑는 촬영 방식과
반복적인 제작 및 소비 패턴이 촛대바위와 야동을 이어준다. 능파대 → 추암→ 촛대바위로 축약되는 의미론적
줌인은 영상의 클로즈업과 합치되고, 반복이 주는 중독과 판단 정지는 촛대바위와 작업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최근작인 <총총>과 <극광반사>는 내용보다 효과에 더욱 집중한다. <총총>은 사람들이 무언가를 믿게 만드는 효과 자체를
주제로 한 작업이다. 모스 신호, VHS 글리치 효과, 아폴로 13호의 지구대기 재진입 등 우주와 관련된 여러 시청각 자료를
조합한 영상은 묘한 최면효과를 일으킨다. 여기서 두드러지는 영상 기법은 ‘루핑’이다. 마치 명상센터의 지시문 같은 묘한 문구(“눈은 코를 봅니다-코는 입을 봅니다-입은 배꼽을 봅니다”)는 “다시”라는 말을 기점으로 계속 반복된다. 이때 재생되는 이미지는
달리는 차창 위 물방울을 찍은 <물체 발견>(2016)이다. 여기서 재미난 점은 “다시”에 반응하는 것이 음성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왼쪽으로
흘러내리던 물방울은 “다시”를 듣고 오른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한다. 앞으로 가다 뒤로 가는 순환은 영상
전체의 구조에도 적용된다. <총총>의 첫 장면은
이미지와 사운드의 불일치를 보여주는데, 유성을 발견한 사람들의 흥분된 목소리는 사실 지구 대기권에 재진입한
불타는 인공위성을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에 속하는 것이다. 이로써 처음과 끝은 이어지며 하나의 순환 고리를
형성하게 된다.
한편 <극광반사>는 이미지
합성에 쓰이는 그린 스크린의 녹색에서 출발한다. 이 작업은 가짜를 진짜처럼 보이게 하는 편집 기법을
노출하는데, 이는 믿음을 만드는 효과에 대한 관심을 영상 기법에 적용한 경우로 볼 수 있다. <애동>의 촛대바위 이미지들이 깨지면서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에 초록색(오로라) 선이 생기는 첫 장면은 영상 전체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재현한다. 실제처럼 보이기 위해 최대한 노출하지 않아야 하는 형상의 이음매가 여기서는
주인공이 되어버린다. 하나의 색으로 보이나 실제로는 미묘하게 다른 2채널
영상이 화면 조정을 거쳐 하나로 맞아떨어지는 또 다른 장면은 이 작업의 백미다. 여기서 두 채널의 이미지와
사운드는 모두 시차를 지닌다. 이미지는 원이 두 채널의 경계를 지날 때 단차를 내며 갈라지고, 사운드의 경우 두 음을 한꺼번에 눌렀을 때처럼 불일치가 발생한다. 이미지와
사운드가 완벽히 동기화되는 순간 영상이 우주로 진입하는 장면은 폭소를 자아내는데, 이러한 깨알 같은
편집은 디테일에 강하며 유머를 진지함과 뒤섞는 작가 특유의 면모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금기시되는 실패한
편집은 여기서 눈속임을 주는 과정을 드러내며 이미지에 신뢰성을 가하는 기제에 대해 생각하게 이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보면 그렇게 보입니다.”
물생활을 하는 누군가가 말했다는 이 말은 믿음에 대한 임영주의 생각과 다르지 않다. 유리섬유
플라스틱으로 돌 표면을 떠 만든 가짜 바위(백스크린)는 적절한
맥락에 배치되면 진짜처럼 보인다. 믿음 역시 그러하다. 진짜처럼
보이게 해주는 적절한 장치만 있으면 사람들은 대상이 무엇이든 사실로 믿을 준비가 되어 있다. 과학적
통계, 표준화된 제시 방식, 객관적 말투 등이 마련되면 신뢰가
올라가고, 점쟁이 같은 말투, 근거 없는 추정, 비논리적 연결이 보이면 신뢰가 줄어든다. 전자에 속하는 일기예보와
후자에 속하는 오늘의 운세가 맞지 않기로는 비슷하더라도 말이다. 임영주가 믿음을 대하는 자세는 믿고자함이
아니요(역으로 모두 믿는다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이 어떤
효과를 지니는가에 있으니, 이런 태도는 실상 신앙인보다 관찰자에 가깝다. 구조를 바라보려면 함몰이 아니라 거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녀의 작업은 미술의 작동 기제를 타고 노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녀가 마련한 장치들을 통해 작가의
의도를 믿는 구조에 대해 “다시”, “또 다시” 실험하면서 말이다.
문혜진은 미술비평가이자 번역가, 미술사연구자다.
KAIST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재료공학과 미술이론을 공부했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에서
강의한다. 주관심사는 사진, 영상, 뉴미디어 등 기술매체의 형식적 특질, 장르융합 관련 학제간 연구, 한국현대미술이다. 쓴 책으로 『90년대
한국 미술과 포스트모더니즘』(현실문화, 2015), 옮긴
책으로 『사진이론』(두성북스, 공역, 2016), 『테마현대미술노트』(두성북스, 2011)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