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주 작가를 세상에서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인천행 지하철에서 그녀가 출간한 『괴석력』을 읽고 있었다. 그녀가 웃기는 사람인지 진지한 사람인지 머리가 비상한 사람인지 가늠할 수 없는 상태로 나는 그녀의 언어유희, 상호배제적 프레임을 상호간섭하게 만드는 비상한 지성에 놀란 채로 건너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개의치 않으면서 연신 폭소를 터트렸다. 푸코가 보르헤스의 책을 보면서, 서양인이 라블레의 『가르강튀아』를 읽을 때 이런 느낌이었을까, 라는 생각도 해가면서. 그러나 내가 보르헤스에게서 푸코가 발견한 폭소나 라블레에게서 서구인들이 발견한다는 웃음은 문화적 차이로 인해 넘을 수 없는 경험, 그저 정보/지식의 일부였기에, 『괴석력』이 유발하는 웃음을 그들은 정녕 웃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가령 “도를 아십니까”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포함한 세속의 많은 믿음(체계)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을 가족이나 친구로 두고 그래서 그들과 함께 믿음의 장소에 동석했던 임영주가 “돌을 아십니까”라고 말하는 듯 강원도 촛대바위, 남근석, 운석이나 사금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을 취재차(?!) 따라다닌 데서 나온 결과물인 『괴석력』은 과학적 프레임을 차용해서 웃기고 진지하고 즐겁고 기괴한 믿음에 ‘합리적’ 정당성을 수여하려는, 질적연구 방법론을 활용한 ‘석사논문’, 심지어 박사논문 수준에 육박하는 의사(擬似)-책이었다. 객관적 자료들에 대한 엄청난 리서치와 인용, 구술사 방법론에 기초한 인터뷰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버팅기는 과잉의 수사(修辭), 작가의 능수능란한 언어유희, 한바탕 농담으로서의 삶에 대한 작가의 긍정, 등등 내게 『괴석력』은 근면성실한 기록자, 명민한 분석가, 집요한 수사학자가 함께 협력해서 엮은 이상한 사물, 마침내 작품(oeuvre)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 책은 어떤 주어진 범주, 프레임에도 맞지 않으며, 어떤 ‘정의’도 거부하기에 반­근대적이고, 어떤 이름으로도 불릴 수 없다는 점에서, 그럼에도 책이고 기록이고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탈­근대적이다. 임영주 작가는 『괴석력』의 마지막인 <마치며>에서 자못 진지하게 믿음을 신념과 신앙으로 나누고 자신은 신앙에 대해 주관적으로 말하려는 사람이라고 고백한다. 작가에 의하면 신념이 주체의 의지에 의한 것이라면 신앙은 나도 모르게 내게 “붙은” 것, 바깥의 영향력이다. 3세기 교부 터툴리안의 “불합리해서 믿는다(Credo quia absurdum)가 임영주 작가가 말하는 신앙의 핵심일지 모르겠다. 혹은 증명할 수 없고 객관화할 수 없는, 그렇기에 근대의 종교로 진입하지 못하고 사이비, 광신, 민간신앙과 같은 주변으로 밀려나버린 것들이 임영주가 말하는 신앙의 근대적 이름일 것 같기도 하다. 포스트담론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분이라면 이미 알고 있겠지만, 종교는 의사종교에, 과학은 의사과학에 의지한다.

자율적이라고 가정된 근대적 체제가 이미 항상 자신의 타자, 바깥에 의해 오염되고 그렇기에 이름 없는 것들, 밀려난 것들을 자신의 ‘기원’으로 하고 있다는 전복적 주장은 가짜들, 사이비들, 임영주 작가가 말하는 신앙들의 일상성, 비합리성, 편재성에도 비스듬하게 함축되어 있다. 물론 임영주는 이런 타자의 복권, 그것들에게 말과 이름을 되찾아주는 것과는 조금 다르게 움직인다. “샤먼은 사람들을 더 위로해주지만 예술가는 더 이기적이다”라는 작가의 말처럼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아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한다. 혹은 임영주의 작가관은 사회적이기보다는 개인적이다.

그녀는 약해서 믿는 이들의 불안이나 고통이나 욕망을 작가로서 대신하려는/짊어지려는 게 아니라 주어진 세계의 상호배제적 프레임들을 뒤죽박죽 섞었을 때 발생하는 웃음, 가벼움, 편평함, 혹은 작가­주체의 힘에 강조점을 둔다. 웃음은 프레임을 따르는 자가 아닌 프레임을 보는 자,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를 간질이는 자가 획득하는 신체적 작용이고, 또 웃음은 프레임에 ‘갇힌’ 이들의 무거움이 아닌 프레임을 잃은 기표들, 기호들, 상징들의 무차별적 교환과 대체의 놀이가 선사하는 생리적 작용이다.  

그래서 나는 임영주를 명랑 샤먼이라고, 그녀의 작용(operation)을 무차별적 평등에의 시도라고 부르게 된다. 무겁고 진지한, 그래서 비극적인 세계에서 가볍고 유쾌한 그래서 희극적인 반응은 분명 위로의 일종이다. 이 위로는 더 나은 세상이나 더 좋은 구조에 대한 희망이 아닌 지금 작동하는 세계를 재서술, 재배치함으로써 획득되는 작가­주체, 인간­욕망의 승리이기에 특이하다. 이 위로는 우리를 지금 살고 있는 이 구체적이고 물질적이고 현실적인 세계로부터 끌어올려 기체 상태나 무중력 상태로 집어넣는 위로이다.

작가는 주어진 세계에 충실한 틀린 이야기에 저항하면서 옳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어진 조각들을 맥락/프레임에서 뜯어내고 한데 섞고 다시 풀고 또 엮는, 그러면서 명랑하게 놀다가 허송세월하는 부류의 잉여들임을 임영주가 또 방증한다. 수사학자들, 이미지주의자들의 텅 빈 말, 소리, 이미지에의 헌신은 그 무익한 열정으로 우리를 위로한다. 그 무차별적 평등의 세계에서 우리는 길을 잃고 막 싸돌아다니다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고 그러면 ‘도를’과 ‘돌을’이 청각적으로 동일해지는/동일하다는 것이 드러나는, 그러므로 시각적/이성적 세계관이 흔들흔들, 웃음이 삐질삐질 새나오는 임영주의 장소에 도착하고 있는 것이다.  

임영주의 신작 <요석공주>는 『삼국유사』의 ‘원효불기’에 나오는 원효와 하룻밤을 지낸 것으로 알려진 이름 없는 공주 이야기를 소재로 한다. 작가는 “상황은 있지만 이름은 없는” 인물들, 가령 원효불기의 요석공주, 또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 특히 초등학생들 사이에 퍼진 괴담의 ‘홍콩할매 귀신’을 요즘들어 우리가 자주 접하는 “인터넷에 떠도는 썰”과 뒤죽박죽으로 이어 붙여 시대의 변화나 발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이상하고 흥미롭고 두려운 이야기들의 편재를 알리려 한다. 작가가 직접 배우들을 출연시켜 찍은 영상과 여기저기서 갖고 온 짤이나 사료들은 작가의 의도인바 “말도 안 되는 소리, 이상한 소리와 상황”에 맞춰 접합되었다. 아무 곳에서나 갖고 온 이미지들, 혹은 평소 작가가 관심을 갖고 보고 모아둔 자료들, 원효 대사와 요석 공주의 ‘관계’에 대한 원전에 근거하지만 재현적 가치는 거의 갖지 않는 이야기, 작가의 일상적 경험에서 갖고 온 상황들이 “말도 안 되게” 이어붙여졌다.

그래서 원효의 역할을 맡은 배우는 파티에서 사용된다는 민머리 가발을 썼기에 원효이고, “도를 아십니까”를 따라갔다가 요석공주가 된 배우는 윗저고리만 입고 요석이고, 심지어 형체를 알 수 없는 홍콩할매귀신은 싸구려 가발이 대역이다. 전체는 부분으로 대체되고, 그 부분은 각자의 맥락에 의거하여 상징‘처럼’ 작동한다. 그래도 우리는 그것이 누구인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기호는 맥락에 의해, 서사에 의해 안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의 이야기가 도대체 무엇에 대한 것인지 무엇을 전달하려는 것인지는 정녕 해명되지 않는다. 상호배제적인 맥락들에 ‘속한’ 기호들, 상황들이 상호간섭적으로 공존하고 연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진지한 배우들의 역할이 불안정한 기호들 때문에 흔들리고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변하고, 이미지를 보충설명해야 할 사운드와 캡션이 이미지와 충돌하거나 튕겨져 나가기 때문이고, 맥락과 전혀 맞지 않는 장면이 불현 듯 개입하기 때문이고, 종국에는 이해하고 분석하려는 관객의 욕망이 실패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관객의 자리는 어느 순간 보고 있고 듣고 있다는 감각적 경련 외에는 어떤 반응이나 해석도 불가능해지는 자리로 위태로워진다. “원효는 계율을 범하였다”라는 문장은 세 번 반복되지만, 그것이 왜 세 번이나 반복될 만큼 중요한지는 해명되지 않으며, 내한 공연 중 난입한 관객을 옆에 두고 송풍기가 틀어대는 바람을 맞으며 크레인 위에서 과잉의/감동적인 퍼포먼스를 진행한 마이클 잭슨의 공연 영상이 사막에 부는 바람에 날리는 모래 한 알처럼 화면 위를 움직일 때 왜 이랬어야 하는지는 송달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맥락이나 서사에 잘 맞춰진 영상이나 사운드는 우리를 자극하지도 매혹시키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긋나거나 과도하거나 불필요하거나 없어도 되었을 이미지나 사운드는 바로 그 모호성이나 무가치함 때문에 우리를 사로잡고 심지어 우리에게 “붙어버린다”.

임영주의 영상은 작가가 우리에게 가하는 난폭함이나 불친절함, 혹은 작가의 이기적인 욕망에 포획된 관객의 무력감, 말하자면 굳이 안 따라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심리적 상태를 전제로 그녀만의 “도/돌”을 아십니까의 동선을 만들어낸다. 지척에 있는 집을 거의 잊고 온갖 곳을 떠도는 작가가 애용하는 즉석밥이 전자렌지에서 데워지는 1분 59초 동안, 합정역에서 어떤 이상한 여자(작가가 맡은 배역)에게 붙들린 여자가 ‘모처’에 도착해 요석공주가 되고, 그러는 사이에 우리는 ‘43분 10초’라는 시간에 붙잡혀 있었음을 알게 되는데, 그 사이에 그나마 우리가 보고 듣고 이해하려고 했던 것이 얼마나 황당무계하게 짜여졌던 것인지는 가늠할 수 있을 터인데...... 따지고 보면 이 세상이 얼마나 이해불가능한 괴상한 말도 안 되는 서사로 우리를 속이고 감동시키고 울리고 자극했는지도 덕분에 떠올려보게 되는 것이다. 물론 나는 <요석공주>를 보면서 웃다가 위로받는 타입의 사람인데, 당신은 어떤 기분이었는지 속은 것 같은지 재미있었는지 짜증이 났는지 뒤에 뭐가 남았는지는 모르겠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