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대의 문이 열린다. 망원경을 통해 우리 눈이 보지 못하는 저 너머에 있는 별들을 보게 될 줄 알았지만, 너무 환하게 밝아지며 빛 속으로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다. 나의 눈인지 너의 눈인지 모를 눈동자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내가 본적도 느껴본 적도 없는 제3의 눈에 대한 이야기가 세 번 반복된다. 나는 무언가를 보러 왔는데 자꾸 눈을 감으라고 한다. 큰 돌이 나온다. 누군가 누워 있다. 박제된 새들이 등장한다. 무엇인가 누워서 보는 시선인 것 같은데 인간의 시선을 벗어난 360도의 화면인 것 같아 어지럽다. 박제된 새들이 등장한다. 누군가 어딘가를 바라보면서 새 이름을 부르고 있다. 전반적으로 화면은 적외선 망원경으로 보는 것 같은 풍경이 이어진다. 새들이 떼를 지어 하늘을 날아 이동한다. 새들이 내려앉는다. 물 위에서 떠 있다. 새들이 물 속으로 들어간다. 새의 모습을 양안의 시선이 합쳐진 것이 아니라 분리되어 보게 되는 것 같이 느껴진다. 암전이 일어난다. 새소리와 벌레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어느 숲에 와 있는 것 같다. 박제된 새가 그들이 들어가 있는 전시장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화면이 전개된다. 나도 그들과 함께 있는 것 같다. 정확하게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약간의 어지러움과 불편함을 느끼는 것을 보면 여러 공간을 넘나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다른 방에서는 VR을 쓰게 되었다. 이미 주입식 교육을 받으며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는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안내자가 덮어준 구조용 은박지 안에서 따뜻한 돌을 손에 쥐고 자리에 누워 ‘나’의 묫자리를 찾아 떠났다가 차갑게 식은 돌을 쥐고 돌아오는 여정을 겪었다. 나는 그 여정 동안 여기저기 두리번대며 시선을 돌리는 동시에 하늘 높이 저 너머로 올라갔다가 추락하기도 했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영상을 보는 내내 무엇인가 서로 다른 장면들이 교차하며 생긴 혼선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아마도 이런 것들이 쌓이고, 무엇인가를 보는 내내 들려오는 귀를 자극하는 소리는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어떤 흔적을 강하게 남길 것 같았다. 나는 계속 이동하고 있었다. 아니 나는 계속 한 자리에 누워있었다. 나는 이것들을 모두 받아들일 수 있었다. 즐거웠다. 즐거웠다. 즐거웠다. 나에게 이것은 즐거운 게임 같았다. 그러나 누군가는 영상을 보는 동안 어떤 감정이 솟구칠 수도 있고, 논리적으로 어떤 구조를 파악하려 생각에 빠지기도, 완전히 넋을 놓고 보다가 그대로 푹 자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그게 쉽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에게는 난해한 이야기, 불편한 사건으로 기억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나조차도 이 모든 것을 영원히 온전히 보지 못할 것이 확실하다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상했다. 이상했다. 이상했다.

《미련 未練 Mi-ryeon》을 보면서 임영주에게 무엇을 본다는 것은 이런 것이라는 막연한 공감이 일어났다. 인간은 자신에게 보이는 것에서부터 보이지 않는 것까지 호기심 어린 태도로 인간의 감각기관 너머의 것을 보려고 노력해 왔다. 그렇기에 그는 우리에게 원래 있었지만 퇴화한 제3의 눈을 떠야 한다고 말한다. 그럼, 제3의 눈이 떠지면 우리는 무엇을 보게 될까? 일단 제목인 《미련 未練 Mi-ryeon》부터 살펴봐야겠다. 미련은 깨끗이 잊지 못하고 끌리는 데가 남아 있는 마음을 뜻한다. 무엇인가가 남아 있다는 것은 너와 나 사이에 충족되지 않는 것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면서 그것조차 비워버려야 평온하게 다음 단계로 나갈 수 있음을 알려주기도 한다. 또한 연(練)은 삼년상을 치르면서 입는 상복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여기서 미련은 아직 상복을 벗지 못한 상태를 뜻한다. Mi-ryeon은 영상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인 것 같다. 이와 같이 그가 붙인 제목은 어떤 일이 일어났지만, 일어났다고 보기 어려운 상황, 어떤 이유로든 다음 혹은 다른 단계로 아직 넘어가지 못한 인간의 모습을 은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왜 이런 방식으로 그는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까? 나는 그가 다른 차원을 상상하고 이해하기 위해 불가사의한 현상, 믿을 수 없는 이야기, 환상, 환각, 빙의, 전생, 자의식에 관해 관심이 있음을 알고 있다. 이런 모든 행위의 시작은 보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을 포함하여 보이지 않는 저 너머를 알기 위해 문화적으로, 기술적으로 다양한 인식 장치들을 창조해 냈다. 예를 들면 사실의 증거, 흔적, 단서를 찾아 연결하여 종교, 신화, 설화, 괴담 등등의 이야기를 만들거나, 과학적으로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를 보기 위한 현미경, 망원경, 나침반, 레이더, 라이다 센서와 같은 기술 장치를 개발하고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의 결과로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양한 경계와 시공간을 만들어 왔다. 그리고 우리는 이들을 통해 무엇인가를 보면서 인식하는 모든 것을 수용, 배척, 대립하는 과정을 거쳐 계속해서 어딘가로 이동시키고 있다.

이렇듯 눈은 이러한 인간 시공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다. 여기서 나는 우리는 정말 그런 능력을 사용하는지 그리고 그의 말대로 우리는 정말 이동할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우리가 아마 그랬다면 완벽하게 파악된 믿음의 세상에서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머무르며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러하니 이 모든 것은 인간의 눈이 가진 능력의 한계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상상, 명상, 몰입, 각성, 건너뛰기 같은 임영주가 관심을 보이는 행위들은 오랜 시간 동안 무엇인가 다른 것,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해 공간을 이동하는 방법이 되어 왔다. 그가 축시(丑時)처럼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어디론가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시간을 이야기하는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보는 것이 무엇이 실재, 가상 혹은 진짜, 가짜일지 하는 의심은 인간 존재와 함께 변하지 않고 따라오는 또 하나의 필요조건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그 어떤 대상을 진짜로 보는지 그것이 무엇인지 정말 이동하는지 이런 질문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가 어떤 도구를 통해 보고 있는지 그 장치를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그는 내가 《미련 未練 Mi-ryeon》을 보는 동안 실제로는 한 자리에 머물러 있었지만, 계속해서 필터를 바꿔가면서 무엇인가를 보면서 멈추지 않고 이동하는 감각을 살며시 주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나는 이런 생각에 이미 빠져 들었기에 나의 묫자리를 찾아가는 상황이 임영주가 외부를 향하여 무작위적으로 발산하여 전파하는 보편타당한 이야기가 아니라 ‘나’를 이동시키는 나만을 위해 부르는 특별한 노래와 같이 느껴진다.

문득 내가 쓴 안경을 벗어보았다. 모든 것이 흐릿해 보여 답답했다. 그러다가 안경을 쓰고 보는 것과 벗고 보는 것 어떤 것이 진짜인 걸까 의심의 마음이 들었다. 무엇인가가 안경을 통해 보는 선명하게 보이는 풍경과 안경을 벗고 보는 모든 것이 흐릿하게 보이는 풍경 중에서 우리는 선명하게 보는 것으로 눈을 교정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 바로잡아야 하는 것일까? 안경을 접고 한쪽 눈에만 대어 보니 두 눈으로 보이는 상이 겹치면서 어지럽다. 어지럽다. 어지럽다. 이 또한 내가 어떤 필터를 통해 보게 되는 여러 방법의 하나였구나! 아 소름이 끼쳤다. 그렇다면 안경을 벗고 그 흐릿한 시각에 적응하려 노력하는 것도 명상과 제3의 눈을 뜨는 것처럼 새로운 차원으로 나를 이동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점점 이상한 상상이 밀려온다. 이제 나에게는 나만의 수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먼저 여러 가지 다양한 필터들을 통해 보는 것을 최대한 많이 연습해 봐야겠다. 하지만 여기까지 생각하게 되니 인간의 시각은 직접적인 경험이 아니라 언제나 어떤 필터를 거친 간접적인 경험에 불과하다는 나만의 결론에 다다른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제3의 눈이 사실은 《미련 未練 Mi-ryeon》을 구성하는 VR 장치, 망원경, 유리 벽, 모니터, 빔프로젝트와 같은 실체가 명확한 장치뿐만이 아니라 그가 이전부터 관심을 가져왔던, 인간이 만들어온 신화, 미신, 전설, 종교와 같은 믿음에 대한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가진 모든 필터로 인한 시공간의 이동 그 자체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정확한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갑자기 내가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막에 둘러싸인 것만 같다. 우린 영상에 등장하는 은행잎처럼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변함없이 이 상태로 지금까지 존재해 왔을까? 그 잎을 보면 변함없는 그 모습이 경이로우면서도 이질감이 느껴진다. 이처럼 지금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장치들은 그 무엇도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지만, 여전히 우리 앞에 흔하게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만들어질 것이다. 답답하다. 답답하다. 답답하다. 그저 이것이 나를 갇히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다른 막으로 옮겨갈 수 있는 시공간이 될 수 있으리라 믿는 수밖에 없다. 자연스럽게 이동하기 위해 연습은 해야겠지만 말이다. 지금 나는 실제로 내 몸이 차원을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장치와 인식을 통해 계속해서 일시적으로 순간적 이동을 반복하고 있는 것으로 감각하고 있을 뿐이다. 이는 마치 다른 영상에 나온 빙글빙글 도는 몸과 같은 것이리라. 아마도 이러한 생각이 허황한 것임을 혹은 그저 꿈같은 비현실적인 생각이라 치부해 버릴 수도 있다. 그렇다면 차원을 넘는다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인가? 우리에게 가장 명확한 차원을 건너뛰는 것은 죽음이 아닐까?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알려줄 수 없다. 죽음, 그것이 어떤 상황이든 모두 각자가 언젠가는 도달하게 되면, 우리는 다른 차원으로 완벽하게 넘어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가장 확실한 상황은 죽음이다. 그런데 나는 그것에 대해 하나도 모른다. 모른다. 모른다. 죽음이 끝인 동시에 다른 단계로 넘어가는 시작점이라면, 우리는 죽음 이후에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르게 무엇인가를 보게 될 기회를 얻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가 《미련 未練 Mi-ryeon》에서처럼 어떤 필터들을 통해 끊임없이 어딘가를 보며 내가 존재하는 시공간을 건너뛰기 위한 시도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만약 실패한다면 우리는 죽음이라는 좀 더 확실한 기회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무서우면서도 호기심이 생긴다. 그런데 갑자기 새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을 마주 보는 장면이 떠오른다. 철새의 이름을 부르는 그 처연한 행위와 소리에 기괴하면서도 웃음을 자아내지만, 왠지 슬프고 아련한 느낌이 드는 것은 뭐라 단정할 수 없는 나의 지금 상황과 맞물려 감정적 파동이 되어 다가온다.

결국 우리가 본다는 것은 저 멀리 날아가 사라지는 새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것 혹은 누군가의 뒷모습만 보게 되는 상황이나 유사하다. 그것은 《미련 未練 Mi-ryeon》의 모든 영상이 1시간으로 정확하게 맞춰서 돌아가는 점, 모든 공간에 자유롭게 들어갈 수 없는 상황, VR 기계장치를 통해서 보게 되는 시선이 다른 영상에 옮겨지는 구조에서 드러난다. 그의 이런 설치 방식은 본다는 것을 지식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설명하거나 규정하기 힘든 난해한 이동이라는 감각적 경험으로 고스란히 느끼게 만드는 일일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본다는 것과 대조되는 언젠가는 명확하게 다가올 미래인 나의 죽음이라는 이동을 아무런 것도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무(無)로 돌아가는 비어버린 시공간이라 규정해 본다. 그러니 그때까지는 나에게 주어진 최대한의 도구를 모두 사용해서 보고 또 보고 또 보는 과정을 통해 감각적인 상호작용이든 물리적인 체화든, 확장된 시공간이든, 꿈이든, 현실이든, 진짜 혹은 가짜이든 상관없이 많은 것들이 교차하는 경험으로 쌓여가는 삶을 살기로 다짐해 본다. 갑자기 바니걸스의 <우주여행> 노래 중에 ‘지구로 돌아오라고’라는 가사를 흥얼거리게 된다. 이제 출발점으로 돌아가야겠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아까와는 다르게 죽으면 또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 모든 것이 리셋되어 완전히 다른 것들을 보게 될 새로운 시공간을 상상하며, 그곳에 도달하고 싶은 욕망이 순식간에 그 자리를 차지한다.



덧붙임

내가 쓴 <미련 견문록(見聞錄)>을 다시 읽어보니 임영주가 정교하게 만들어 놓은 그물망에 확실하게 걸려든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든다. 그러니 고백해야겠다. 사실 나는 내가 보고 들은 모든 것을 기록하지 않았다. 어떤 것은 보았고 어떤 것은 잊었다. 미처 못 본 것도 있고, 빛으로만 느낀 것도 있고 소리가 여전히 잔향으로 남아 귀에 들리는 것도 있다. 그러나 나는 느꼈고, 변했고 그렇게 여전히 어딘가로 넘어가는 중이다. 그러니 이 견문록은 당신들에게 또 다른 구멍, 함정, 입구, 혹은 안내서가 될 것이다.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아무런 것도 아닌 게 될지도 모르겠다. 모르겠다. 모르겠다. 다시 죽음을 떠올린다. 글이 과거, 현재, 미래 시제가 섞여 있는 것처럼 나도 아직 진짜로 죽음을 겪지 않았기에 그 무엇도 확실한 것은 없다. 그 순간에 도달하기 전까지 우리는 수많은 선택지를 통해 여전히 무엇인가를 보게 되겠지. 그러나 진짜로 어딘가로 이동하는 그 순간은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도래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나는 또 어떤 견문록을 쓰게 될까? 아니면 ……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