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view ©KICHE

핑크는 남성부르주아 문화 속으로 태어난 여자아이가 입는 색이고 옷이다. 귀엽고 발랄하고 부드럽고 무구한 소녀, 동시에 어리석고 취약하고 안전하고 미숙하고 유치한 소녀가 핑크다. 핑크는 소녀의 무지한 행복을 상징하고, 핑크 소녀는 1인칭 ‘나’를 대신해 3인칭의 사회적 이름으로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텅 빈 자리이다.
 
핑크 소녀는 상상계적 자아의 작동방식과 동시에 그것의 허구성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리고 레드는 소녀를 피 흘리는 암컷(female), 가임기 여성이라는 문화적 정체성으로 밀어 넣는다. 주기적인 자궁 내막의 탈락과 가랑이 사이로 흐르는 검거나 붉은 피는 생물학적 사실이지만 그 사실은 임신, 결혼, 출산과 같은 문화적 의미 안에서 맥락화되기에 소녀에서 여성으로의 변화는 남성(인간)주의를 위해 봉사한다.

레드는 아물지 않는 상처처럼, 잊을만하면 도지는 통증처럼 직접적으로 신체의 타자성을 함축하지만, 그것을 인간화하고 길들이려는 상징 언어로의 진입과 동시에 여성이 겪는 분열도 함축하게 된다. 타자인 신체와의 공생은 줄줄 흐르고 축축하게 젖고 불길하게 번져가는 붉은 색에 대한 문화적 검열 속에서 억압적으로 영위된다. 생리는 안이면서 밖인 자궁, 신체 내부의 빈 곳이 일으키는 교란이고, 나이면서 타자인 이 피를 가시화하고 가치화할 수 없는 문화적 조건 속에서 여성은 자신을 혐오하고, 또 혹여 주기적인 생리혈의 배출이 없을까/있을까 두려워한다.

자신을 혐오하고 두려워하는 여성의 무의식적 상태는 여성이 자신의 신체를 비체로 감각한다는 증거이다. 여성은 자신의 구멍에서 새어나오는 붉은 피 때문에 더욱 사회적 삶에 필수적인 주체화에 무능하다. 여성은 3인칭 이름 대신에 1인칭 주체로 이야기해야할 즈음 그 주체로 말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데, 자신의 신체와의 이접적인 관계로 인해 자기동일성을 성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징계에서 살아가는 여성은 따라서 핑크 소녀를 그리워하거나 경멸하면서, 붉은 실재와의 연접을 두려워하면서 봉합불가능한 구멍, 상징계를 횡단하고 있는 실재의 일부로 작동할 수 있다.

여성은 구멍이고, 그 구멍은 구멍이기에 비어있다고 가정되지만, 그곳은 시뻘건 피가 분출하는 곳이고, 그 피는 여타 다른 붉은 물질들로 환원되지 않은 차이로, 부정적인 것으로 기표화된다. 착상되지 못하고 죽은 것이 흐르는 도랑을 갖고 있는, 혹은 도랑으로서의 여성은 남성 부르주아 문화가 억압·삭제·배제한 것들을 자신의 신체로 현시한다. 여성(의 신체)은 남성의 문화적 삶을 위한 상징계에서는 비가시적 타자, 재현불가능한 결여이다. 여성은 결핍이고 비어있고 따라서 늘 죽음을 알리러 오는 타자의 기호이자 물질이다.

그리고 텅 빈 구멍을 무해한 것처럼 즐기는 포르노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포르노는 남성 부르주아 문화 전체의 시각장(visual field)을 함축하지만, 일단 장르로서의 포르노로 한정해서 포르노가 여성을 소비하는 방식을 분석해보자. 포르노의 쾌락은 실재적 죽음의 분출을 가리는 베일, 즉 안전한 거리를 확보한 남성의 시선으로 여성의 신체, 구멍을 무한히 보는 데서 유래한다.

발기된 자지의 사정을 위한 이성애자들의 포르노에서 여성은 구멍으로 환원된다. 자지를 갖고 있거나 남근을 욕망하는 주체들을 위한 포르노에서 여성은 눈은 있지만 ‘눈알’은 없으며, 입은 있지만 이빨은 없고, 눈­입­보지의 동일성은 거세공포를 동반한 관음증적 시선의 쾌락을 증폭시킨다. 특히나 아시아 여성이 등장하는 포르노에서 여성은 ‘얼굴’이 빠진 채 물화된다. 리얼돌에 육박하는 이 수동적 여성들은 꿰뚫리기 위해 거기에 있다.

물론 이는 포르노의 다양성이나 차이를 간과한 분석이다. 이는 장르로서의 포르노의 일반성을 분석하기 위함인데, 핑크와 레드로 포르노의 여성을 구해내려는 화가 장파의 관심이 경험으로서의 포르노가 아니라 구조로서의 포르노에 있기 때문이다. 포르노를 장르가 아니라 텍스트로 간주하는 여성주의자들에게, 무엇보다 장파에게 포르노는 남성문화가 여성에게 각인시키는 수치심, 결여와 부재로서의 여성의 무가치를 확증, 보증하는 이데올로기적 장치이다. 포르노는 여성에게 자신의 타자성, 자신의 재현불가능한 비체성을 혐오하게 만든다.

물론 포르노적 시선은 타자의 차이를 길들이려는 일시적 진정제이다. 타자는 언제든 동화불가능한, 재현불가능한 잔여를 갖고 돌아와 그 시선을 전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포르노의 환상은 여성의 구멍들, 보지들이 텅 비어있음을 전제로 작동한다. 그러나 그 구멍에 자지를 씹어 삼킬 수 있는 이빨, 여성적/실재적 죽음을 현시하는 피가 ‘현존’한다는 것을 여성들은 ‘안다’/느낀다. 포르노적 시선은 타자를 즐길만한, 안전한, 무해한 대상으로 이해하려고 할 것이지만, 이미 항상 자기­충족성(카오스로서의?)에 도달한 타자의 신체의 물질성(corporeality)이 그 시선을 위협하면서, 거리를 붕괴시키면서, 상징적 좌표의 가시성을 교란하면서 도래하고 있고 도래할 것이다.

장파는 캔버스에 문지른 레드와 핑크로 발랄하고 불길하고 강렬한 느낌을 조성하면서 포르노에 갇힌 자신의 소녀­여성들에게 위반적 욕망과 일탈의 자유를 선물한다. 그녀들은 포르노적인 포즈를 취하지만, 대신에 포르노의 비가시적 전제를 ‘입음’으로써 단일한 시선의 통제로부터 벗어난다. 포르노를 전복하려면 우선 포르노 안으로 들어가 있어야 한다. 포르노에 나오는 여성들에게는 인격이나 주체성이 없다는 것이 문제인 게 아니며, 포르노 구조에서는 비가시적이었어야 할, 혹은 사라졌어야 할 여성적인 것, “여성적 숭고”, “그로테스크 타자”를 부정적으로 제시하는 게 핵심이다.

내부에서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 이미 항상 내부를 교란시키고 있는 응시를 남기는 것이 관건이다. 포르노에서는 단지 보는 남성만이 아닌 보이는 여성에게도 죄가 물어진다. 대상화된 여성의 수치심은 그녀에게 인격이나 주체성을 수여하려는 반작용을 일으킬 것이지만, 그것은 포르노의 바깥이 없다는 인식에 부딪히게 된다. 따라서 비단 물화된 대상만이 아니라 여성 주체화, 인격화에의 호소도 의심해야 한다. 그 둘은 분리불가능하게 얽혀 있는 상징계적 관계인 것이다.

장파의 말대로 이곳은 “불행한 세계”, “누구나 죄를 지을 수밖에 세계, 즉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만 누군가를 불행하게 만들었을 ‘나’의 죄에 대해 끊임없이 되새기는 자기변명의 웅얼거림으로 가득한 세계”이다. 따라서 단지 자리를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장파의 말을 따르면 “이 세계의 축을 이동시키는” 것이 관건이다. 보이면서 보이지 않는, 이해되면서 이해되지 않는, 재현되면서 재현에서 사라지는 이런 중첩된, 혼재된, 동시적인 상황을 연출하는 것, 그래서 축의 이동과 더불어 나타나는 다른 세계이다. 자신의 소녀­여성들을 구하려는 장파의 임무는 그래서 그녀들의 빈 구멍을 위협적이고 폭력적이고 희극적으로 채우고, 그럼으로써 그녀들의 재현­이미지를 뭉개지고 흐릿한 색채­감각으로 되돌려놓는 것이기도 하다.

장파는 핑크 소녀를 버리지 않는다. 핑크 소녀는 무책임할 정도로 명랑하고 따라서 어떤 상황에서도 진지하지 않은 채 웃는다. 1인칭의 존재론적 주체에 도착하거나 그 주체의 불가능성을 담지한 우울증적 주체가 아닌 채로, 남들이 준 자리에 자기 자신이 아닌 채로 앉아서, 따라서 비극의 우울이나 도덕적 연민 없이 포르노를 ‘본다’. 소녀 핑크를 포르노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장파는 포르노를 과잉으로 만든다. 포르노를 제대로 볼 수 없는, 수치심을 모르는, 상징계적 여성의 잔여가 침입함으로써 포르노는 벌써 해체되고 있다.

동시에 여성의 체액인바 생리혈로서의 레드가 폭력과 죽음을 담지한 채로 남성적 시선에 도전한다. 주기적으로 죽음을 낳는 여자들, 자신 안에 무덤을 갖고 있는 여자들이 물화된 여성들, 가짜 여성들, 이미지 여성들과 겹쳐지거나 대신한다. 그리고 이빨달린 보지들(vagina dentata), 눈알이 박혔거나 노래하고 말하는 입술인 보지들, 자지를 뜯거나 씹어버릴 아귀 이빨을 가진 입들이 출현한다. 대신에 포르노적 쾌락에 필수적인 구멍, 소실점은 가끔 귀퉁이 어딘가에 비치된 해골이 전담하면서 ‘이것은 포르노이면서 포르노가 아니다’라는 주장(농담?)을 고지한다.

장파가 작품에 붙인 제목들, 가령 “얼굴 없는 눈알들”, “체셔의 고양이처럼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 여성들, 또 〈Lady-X No.1〉 의 젖꼭지가 보는 눈이고 보지가 노래하는 입인 여성들, 그리고 (비)재현적 육체의 표면이나 곁에 쌓인 눈알인지 쏟아진 내장인지 터진 알집인지[1] 알 수 없는 더미는 형태학적 인체의 바깥을 실연(enact)한다. 장파의 작업은 일견 그로테스크하지만 허물어지고 뭉개지고 부식되고 있는 신체 앞에서 두려워할 사람도 있을 것이지만 어쨌거나 장파의 여성들, 소녀들은 맑고 명랑하고 단단하고 대담하다.

자기연민이나 우울, 슬픔, 패배의 느낌이나 정서는 들어설 여지가 없다. 자신의 가족 안에서 근대적 사실인바 폭력의 악순환을 목격했음을 고백한 첫 번째 전시에서 출발한 장파는 이제 “자신에 대한 관심을 타자와 공동체로 돌리는 것, 나와 다른 타자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는 것, 그리고 그 불가능한 판타지에 최선을 다하는 것, 타인을 견디고 불안을 참고 실패를 감수하는 것이 현대인의 윤리”라는 문장에서 볼 수 있듯이 1인칭 단수로서의 경험과 고백이 1인칭 복수의 경험으로 확장되는 동시대 윤리의 ‘소박함’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번 두산 갤러리 전시 〈Brutal Skins〉에서 특히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기념비적 크기로 그려진 〈My Little Riot Girl Series〉일 듯하다. 여기서 장파가 구하려는 여성­타자는 세잔의 〈대수욕도〉의 형식주의적 구조에 갇힌 이미지로서의 여성들이다. 말년의 세잔이 죽기 직전까지 매달렸다고 하는 소재이자 주제인 ‘목욕하는 여자들’은 이후 형식주의 모더니즘을 거치면서 순수형식, 색채와 형태의 배열, 회화의 표면의 물질성과 평면성과 같은 개념으로 환원된다.

남성 화가가 그린 목욕하는 여자들, 훔쳐보는 시선을 전제한 에로틱하고 관능적인 여자들임에도 이 여자들은 읽히지 않았다. 보이지만 감춰진, 드러났지만 외면당하는, 그렸지만 제어된, 욕망하지만 검열되고 있는 세잔의 여성들은 삼각형으로 배치된 나무의 구조에 갇힌다. 장파의 윤리적 관심은 갇히고 삭제된 이 여자들이 살만한 시각장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세잔의 구조가 가렸던 엄청나게 많은 여자들이 우글우글 모여있고, 세잔의 거세공포를 상징화한 것으로 알려진 화면 오른편의 보지를 감추면서 드러내고 있는 한쪽 다리를 구부린 여성은 장파의 화면 오른편에서는 버젓이 보지가 보이도록 다리를 벌리고 있다.

그리고 화면의 한 중앙은 체셔의 고양이가 사라지면서 남긴 웃음이 차지하고 있다. 세잔의 진지한 실험이나 은폐된 음란함은 장파의 적나라한 노출과 장난스런 포즈에 의해 희화화된다. 2015년 역시 세잔을 교정한 동일한 제목의 그림에서 장파의 소녀들은 나무 뒤에서 이쪽을 훔쳐보거나 숨어있었지만, 2018년 작품에서 소녀들은 모두 이쪽으로 넘어와 있다. 장파는 자신의 소녀 폭도들을 ‘나의 작고 어린’으로 에워쌈으로써 그녀들을 보호하고 책임져야할 자신의 윤리 역시도 표시한다.

구멍뿐인 자신에 대한 혐오 대신에 폭력으로서의 구조에 폭력을 저지르고 있는 소녀들의 싸움은, 오직 포르노 안에서만, 남성 질서 안에서만 의미화 될 수 있고 정당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미 구조에 포섭된 것일 수도 있다. 지금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미투에 이르기까지의 지난 몇 년 간의 소녀들의 폭동을 지지하는 장파의 방식은, 그런데 ‘대가’의 회화 속에 자신의 소녀들을 불러 앉히는 전략으로 구현되었다. 일어나고 있는 사건에 대한 재현도 그 사건에 대한 해석도 아닌, 남성 미술사에 대한 여성주의적 수정으로 표명된 것이다.

장파가 여성주의 실천에서 차지한 위치가 특이한 것은 그녀가 계속 회화에 남는다는 것과 연관되는 데, 급진적인 여성작가들은 회화의 남성적 헤게모니를 거부하면서 좀 더 민주적인 매체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여성주의 화가로서 미술사에 등재된 걸작을 차용하거나 포르노적 구조를 가시화하는 장파는 자신의 물감을 그들의 정액이 아닌 우리의 생리혈처럼 다루거나, 그의 드리핑이 아닌 우리의 흘리기를 이용해서 캔버스에 붉은 색 계열의 물감을 흐르게 하거나, 시각이 아닌 촉각으로서의 회화를 만들기 위해 〈Fluid Neon〉시리즈에서 전면에 나타난 것처럼 “가시성이 높고 빛이 새어나오는 효과”를 주는 형광색을 생리혈과 같은 체액을 표현하는 데 사용함으로써 여성의 신체에 대한 공포를 우회한다는지 하는 식으로, 회화의 “축”을 흔들고 있는 중이다.

회화가 이미 항상 남성적이거나 남성적 매체라는 비관에도 불구하고 장파는 굳이 그 안에서 여성의 신체, 욕망, 응시를 시각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수행’하려고 하고 있다. 여성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재현하는 대신에 가부장제 내 여성들의 오염된 장소를 뒤져 거기에서 아르 브뤼나 광인과 어린아이의 그림에서 이미 보았던 천진난만한 잔인함이나 무구한 폭력성을 육화한 핑크 소녀를 발견한다든지, 실재적 여성의 유쾌한 희롱이나 무해한 웃음을 붉게 구현하는 것은 어떤 폭력적 구조도 그 안에서 살아가는 타자들의 자리에서 재고되어야 한다는 장파의 지적이고 성찰적인 깨달음, 그리고 타자를 책임지겠다는 윤리적 결단을 회화로써, 회화를 통해 구체화하는 장파의 성취임은 분명해 보인다.

 
[1] “참다못한 내가 그녀의 알주머니를 싹둑싹둑 가위질하자 김말이 속 당면처럼 빼곡히 들어찬 그녀들이 잘린 입 밖으로 일제히 폭소를 터뜨렸다”, 김민정의 시, 〈고등어부인의 윙크〉 중에서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