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민규(b. 1986)는 애니메이션적 편집 기법과 형식을 통해 사회의 불완전성과 인간의 나약함을 드러낸다. 기존 이미지를 차용하고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동시대의 사건을 비추는 한편,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모큐멘터리(mockumentary) 형식을 통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구축한다.


황민규, 〈Time to Live〉, 2018, 디지털 프린트, 61.5x61.5cm © 황민규

황민규는 가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현상에 주목한다. 특히 1980~90년대 서브컬처를 바탕으로 세기말적 세계관을 구축하고, 이를 통해 동시대 사회의 불안정한 단면을 포착하는 작업을 이어왔다.
 
작가는 작업의 소재를 수집하기 위해 가까운 가족과 지인의 브이로그부터 뉴스와 시사 프로그램, 서브컬처를 배경으로 한 영화와 애니메이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상과 이미지를 직접 촬영하거나 수집한다. 이렇게 모은 자료는 모큐멘터리 형식으로 재구성되어 새로운 서사와 세계관을 형성한다.
 
SF적 요소를 담은 파운드 푸티지와 허구적 설정은 작품을 비현실적으로 보이게 하지만, 이내 현실과 맞닿은 지점을 드러내며 관객으로 하여금 지금 이 순간의 현실과 마주하게 한다.


황민규, 〈2015:virtual odyssey〉, 2015, HD 영상, 3분. © 황민규

황민규의 작업은 어린 시절 즐겨 보던 애니메이션 속 영웅에 품었던 환상을 되돌아보는 데서 출발한다. 어린 시절 그는 어떤 위기에 처하더라도 결국 이를 극복하는 영웅들, 특히 로봇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2011년 일본 대지진과 같은 거대한 재난을 목격하면서 이러한 환상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작가는 당시 집에 있던 프라모델이 그저 플라스틱 덩어리처럼 느껴졌고, 그동안 부여해 온 의미가 모두 사라지는 듯했다고 회상한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은 그로 하여금 환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인식하게 하였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황민규는 프라 모델을 본래 존재하던 가상 세계로 되돌려 보내는 작업 〈2015:virtual odyssey〉(2015)를 제작했다. 작품에서 작가는 플라스틱 프라 모델을 녹인 뒤, 영상 속에서 이를 다시 부활시킨다.


황민규, 〈나를 지켜줘〉, 2017, HD 영상, 25분. © 황민규

이후 황민규는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서 인간이 어떠한 처지에 놓여 있는지에 대한 사유를 이어갔다. 2017년 영상 작업 〈나를 지켜줘〉는 작업의 개념을 확장하기 위한 리서치 트립이자 신혼여행으로 떠난 일본에서 마주한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사건들의 기록물을 바탕으로 한다.  
 
당시 일본에서 작가는 정신병원 살인 사건, 일왕 퇴위, 지진 등 사회적으로 중대한 사건들이 잇따랐음에도 많은 사람이 현실을 망각한 듯 행동하는 모습에 낯선 느낌을 받았다고 말한다. 이에 여행 기간에 벌어진 일들을 영상으로 기록하고, 이를 가상의 시나리오와 결합해 하나의 작업으로 완성하게 되었다.


황민규, 〈나를 지켜줘〉, 2017, HD 영상, 25분. © 황민규

작품 속에 담긴 이미지와 이야기들은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서 부유하며, 애니메이션적 편집 기법과 형식을 통해 사회의 불안정성과 인간의 나약함을 드러낸다. 오타쿠적이고 엉뚱한 분위기 속에서도 진지하게 전개되는 그의 영상은 기존 이미지를 차용하고 재구성해 동시대의 사건을 다루며, 가상과 현실이 충돌하는 미묘한 지점을 건드린다.


《これは愛ですか。 이것은 사랑인가요?》 전시 전경(out_sight, 2018) © out_sight

〈나를 지켜줘〉는 2018년 개인전 《これは愛ですか。 이것은 사랑인가요?》에서 멸망을 앞둔 세계의 중심으로 들어선다. 전시는 멸망을 앞둔 세계와 이를 지키려는 인물을 중심으로,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서 형성되는 불안과 환상을 다룬다.
 
전시장에 들어선 관객은 별이 가득한 밤하늘 아래 등을 맞댄 두 사람과 전시 제목이기도 한 질문을 마주한다. 그러나 전시를 채우는 것은 애틋한 감정보다 세계의 종말을 예고하는 장면들이다.
 
영상 작업 〈나를 지켜줘〉에서 히로인은 인류 최후의 도시에서 세계를 지킬 영웅을 찾아 나선다. 한편 〈나는 너를 지킨다〉(2015)에서는 재앙의 이미지들 사이로 영웅의 다짐이 흐른다. 두 작품은 서로 호응하는 듯하지만, 재앙은 멈추지 않고 히로인의 여정은 실패로 끝난다.


황민규, 〈나는 너를 지킨다〉, 2015, HD 영상, 4분 42초. © 황민규

애니메이션에서 가져온 이미지와 실제 사진이 중첩된 장면들은 인과관계가 불분명한 채 이어지며, 위기의 긴장감보다는 정돈된 이미지의 표면을 드러낸다.
 
황민규는 영웅 서사의 형식을 빌리면서도 세계를 구원할 존재에 대한 기대를 무너뜨린다. 영상 속 영웅의 다짐이 흩어진 자리에 남는 것은 작가가 녹여낸 작고 가벼운 플라스틱 덩어리다. 이는 환상에 부여된 의미와 그 허약한 실체를 드러내며, 불안한 현실을 외면한 채 실재하지 않는 세계의 미래를 소비하는 우리의 태도를 되묻는다.


황민규, 〈야생 속으로〉, 2020, HD 영상, 12분. © 황민규

결국 〈나를 지켜줘〉 속 사건의 얽힘과 흐름에 따라 영웅은 부재한다는 허무주의적인 결론으로 치닫는다. 그리고 황민규는 이후 발표한 〈야생 속으로〉(2020)에서 영웅의 부재를 선언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삶을 개척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내보인다. 하지만 코로나19가 야기한 격리된 환경과 고독으로 인해 그 다짐이 무너지고 만다.
 
현실과 가상이 교차하는 이미지로 구성된 영상과 내레이션은 불안한 동시대 현실과 맞물린 세기말적 세계를 살아가는 개인의 시점을 포착한다. 영상에 삽입된 내레이션은 구체적 현실이나 사건을 지시하는 듯하지만 결국 외부적 현실과는 다르게 작동하는 개인의 내면적 현실을 사유하고 있다.


황민규, 〈터전의 끝〉, 2020, HD 영상, 35분. © 황민규

한편, 같은 해 발표한 영상 〈터전의 끝〉(2020)은 함께 작업실을 썼던 작가의 친구를 주인공으로 삼는다. 이제 막 작업을 시작한 예비 작가인 주인공은 정부에서 지원하는 전세자금으로 보금자리를 마련하였지만, 서류상의 문제로 집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한다. 친구는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큰돈이 필요하였고 여러 가지 방법을 찾던 중 힙합 오디션에 도전하게 된다.
 
이 작업은 주인공에게 일어난 실제 사건으로 진행되지만, 90년대 일본 애니메이션의 형식과 정서를 레퍼런스한 모큐멘터리 영상이다. 그리고 가상과 실제가 혼재되어 펼쳐지는 도시 환경의 빈부 격차와 극단적 상황을 통해 주인공을 점점 위기로 빠뜨린다.


황민규, 〈터전의 끝〉, 2020, HD 영상, 35분. © 황민규

주인공의 음성을 제외하면 이미 존재하는 대사들로 채워져 있는 작업은 90년대 아날로그적 감성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작가는 이러한 재조합 과정으로 과거의 대사를 현재에 소환하여 미래를 바라보며, 이를 통해 개인에게 주어진 삶의 고충과 세기말의 우울한 정서가 시대를 관통하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주인공이 오디션 프로그램에 도전한다는 설정은 국내에서 소비하는 대중문화 콘텐츠가 주는 영향력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작가는 이를 통해 동시대 사회가 요구하는 극적인 서사를 재현하는 한편, 이상과 현실 사이의 대립을 그려내고자 했다.


《Out of the Blue》 전시 전경(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2023) ©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그리고 2023년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에서 열린 개인전 《Out of the Blue》에서 황민규는 기존 작업에서 부각되던 90년대 서브컬처의 색을 덜어내고 SF 문학과 인문학 등으로 레퍼런스의 영역을 확장한다. 차용하는 장르는 전환하는 듯 보이지만, 삶 속에 드리우는 재난을 통해 사회와 인간의 한계를 들여다보는 방식은 유지된다.
 
전시에서 선보인 영상 〈정월〉(2023)은 불확실한 미래를 두려워하는 아내와 안도감을 주는 어머니의 서사를 교차시키며, 자립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회의와 함께 의지의 대상을 찾는 여정을 보여준다.


황민규, 〈정월〉, 2023, 단채널 영상, 42분. © 황민규

영상은 황민규의 고향인 부산을 배경으로, 불확실한 미래를 담담히 받아들이는 가족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의도치 않게 그곳에 고립된 작가는 당시 해운대 일대의 팬데믹 풍경을 틈틈이 촬영한 푸티지와 해안선 상승, 후쿠시마 오염수 등의 환경적 재난 상황을 교차시켰다.
 
이처럼 작가는 안락과 위기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예측할 수 없는 미래와 불안, 그 안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인간의 불완전함을 포착하는 동시에, 그럼에도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것들은 무엇이며 우리는 어떤 신세계를 그리는지에 대해 질문한다.


황민규, 〈PULSE〉, 2025, 단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15분 51초. © 황민규

황민규의 2025년도 영상 작업 〈PULSE〉는 그의 어머니를 기록하고 있다. 영상은 어머니의 병환에 따른 개인적인 이야기로부터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에 대해 다룬다. 어머니의 시선을 따라가면서 〈PULSE〉는 슬픔을 단순한 감정으로 남겨두지 않고, 그 너머를 가리킬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황민규, 〈PULSE〉, 2025, 단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15분 51초. © 황민규

이렇듯 현실과 가상의 모호한 경계, 미시적인 생활사와 허황될 정도로 거대한 극적 세계관의 교집합에 자리한 황민규의 모큐멘터리는 현실의 불안정한 이면을 드러내고 다른 출구를 모색한다.
 
그의 작업에서 허구적 설정은 현실의 단면을 드러내는 장치로 작동하며, 거듭되는 위기 앞에서 나약해지는 인간의 모습을 포착한다. 이를 통해 지금의 현실을 다시금 마주하고, 개인으로서의 ‘나’이자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나’는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질문하게 한다.

"계속 어떤 가상적 설정들이 들어가지만 결국 메시지의 핵심을 지을 때는 현실로 돌아가 버리거든요. 현실을 바라보는 게 제일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게 제 작업의 메시지인 것 같아요." (황민규, 리윗-리윗 인터뷰 중)


황민규 작가 © 퍼블릭아트

황민규는 중앙대학교에서 조소학으로 학사 및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최근 개인전으로는 《Out of the Blue》(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서울, 2023), 《After Blue》(고양예술창작센터 해움, 일산, 2023), 《기적을 노래하다》(더레퍼런스, 서울, 2020)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SAD BOOK》(아르코 예술가의 집, 서울, 2026), 《분해되지 않는 밤》(챔버, 서울, 2026), 《Poetic Forensic》(상업화랑, 서울, 2025), 《포에버리즘: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일민미술관, 서울, 2024), 《이주》(예술공간 의식주, 서울, 2023), 《개인사회》(우민아트센터, 청주, 2020), 《코끼리 그림자 바람》(경기도미술관, 안산, 2019)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황민규는 서울시립미술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2025-2026), 고양시 예술창작공간 해움(2022-2023),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2017) 등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했으며, 2017년 ‘퍼블릭아트 뉴히어로’에 선정된 바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