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남짓의 시간 동안 작가로서 안유리가 고민하고 작품을 통해 주목한 것은 자리와 흔적이다. 이는 존재하다가 사라진 것의 자리와 흔적, 이를 남긴 이들을 향한 연민과 애도, 또는 이에 자신을 투사하는 동질감에서 오는 관심이다. 이는 작가의 작위적인 노력이라기보다는 자신에게 깊이 내재된 일종의 지향과도 같은데, 중심에 있지 않고 주변부로 한걸음 물러나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사라져 간 것들의 자리와 흔적을 관망하는 태도이다.
주로 망명자들에게 나타나는 외재성의 그것과 닮았다. 안유리는 사라져간 것/이들의 자리와 흔적에서 ‘시’가 태어나고, 이를 더듬고 보듬어 ‘지금’으로 불러내는 것이 예술가의 역할이라 믿는다. 그렇기에 안유리는 흔적들을 ‘시’의 자리로 불러들이고자 행위 그 자체, ‘예술하기’에 주목하면서 작가로서 자신의 자리를 찾고자 여전히 항해 중에 있다.
2015년 한해 안유리는 두 번의 첫 개인전을 열었고,[1] 두 전시에서 작가에게 ‘예술하기’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말과 이미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글은 그에게 말과 이미지가 무엇인지 질문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지난 일 년간 나눈 수많은 대화와 두 번의 전시를 통해 감지한 안유리의 이동을 살펴보는 변화의 기록이다.
첫 번째 개인전 《추수할 수 없는 바다》에서 나는 그가 언어를,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분절된 말과 은유로 가득한 독백과 대화로 이뤄진 시어를 생산하는 것에 더 집중하고 있다고 느꼈다. 예를 들어, 평행하는 영상 속 이미지와 목소리, 그리고 시인과 나눈 대화를 재구성한 설치작 속 말은 의미를 분절하고 파편화하면서 이미지를 보충하고 이어주기보다는 오히려 미끄러지고 어긋나며 길항했다. 이처럼 전시에 등장한 작품들은 ‘시’의 언어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이를 다시 시각화하려는 시도의 결과로 보였다.
그렇기에 말은 이미지를 보조하는 역할이라기보다 적어도 이미지와 동등한 위계, 어쩌면 그보다 우위에 존재하는 듯했다. 하지만 안유리의 의도는 문학의 한 형식으로서의 시가 아닌, ‘예술하기’의 형식으로 시를 구사하는 것이었으며, 이는 다시 ‘시의 자리’로 나아가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봤을 때, 첫 번째 개인전에서 보인 그의 작품과 전시의 전체적인 구성은 작가의 의도와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어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자아냈다. 과연 ‘예술하기’에서 시의 형식을 취하는 것이 말 그대로 은유로 가득 찬 시어를 생산하는 것과 같은 것인가? 그리고 안유리가 생산하고 취한 언어로서의 말은 이미지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길항하지는 않는가? 이 둘은 서로를 밀어내고 추동하며 그가 믿는 예술의 자리로 나아갈 힘을 지녔는가?
조심스러운 질문을 품은 채, 얼마 지나지 않아 안유리의 두 번째 개인전 《항해하는 말들》을 마주했다. 나는 이 전시에서, 특히 두 전시에 다른 형식으로 등장한 작품 〈항해하는 말들〉(2015)에서 작가의 언어를 대하는 태도와 구사하는 방식의 변화를 감지했다. 이 작업은 작가가 2011년부터 허수경 시인과 나눈 대화와 서신에서 발췌한 내용을 재구성한 것이다. 앞선 전시에서는 이 작업을 종이에 인쇄하여 숲처럼 설치했고, 후자는 같은 텍스트를 조용히 일렁이는 검은 바다 영상 위에 일종의 빛처럼 등장했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방식으로 투사했다.
내가 〈항해하는 말들〉에서 주목하는 것은 표현된 형식의 차이 그 자체가 아니다. 그보다는 안유리가 다른 표현 방식을 끌어내면서 언어를 대하는 태도의 변화이다. 굉장히 손쉬운 대응과 단순한 비유일 수 있으나, 나는 첫 번째 형식의 〈항해하는 말들〉이 조금 더 시의 언어에 가깝다면, 후자의 경우는 번역의 언어에 가깝다고 읽었다. 이러한 구분은 발터 벤야민이 「번역가의 과제」에서 언급한 시와 번역의 상이한 특징에서 빌렸다.
그에 따르면, 번역은 기본적으로 원전을 메아리치게 하는 배후의 내포된 의미와 여기서 파생되는 영향을 살피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인의 언어는 근본적이며 자발적인데 반해, 번역은 중심이 아닌 가장자리에 서서 어떤 한 지점, 메아리가 울릴 수 있는 한 점을 겨누어 번역어로 외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원저는 끊임없이 새롭고 풍부해지며 성숙해 가는 과정을 겪을 수 있다. 그리하여 번역은 두 개의 언어 사이에 평행선을 긋는 것이 아닌 “원천 언어의 성숙과정과 그 자신의 탄생의 아픔을 지켜보는” 것이다. [2]
숲을 이룬 〈항해하는 말들〉에서 작가는 자신의 언어로서 시어를 생산하고 구사하는 것 자체에 초점을 더 맞췄다. 도달하고자 하는 시의 자리와 이를 위한 예술하기의 맥락에서 설치된 언어의 숲은 사유의 시각화라기보다는 그저 원저자, 즉 화자로서 안유리가 발설하고 싶은, 오랜 시간 담아 두었던 자신의 심상을 표현하고 싶은 근본적이고 자발적인 동기가 크게 작동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작가가 시의 형식을 빌려 시의 자리를 그리거나 보듬기보다는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모순적인 욕구로 드러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반면, 후자의 〈항해하는 말들〉은 시인의 위치에서 물러나 작가가 삶의 자리에서 반복적으로 마주하고 고민했던 일시적이고 사라지는 존재를 불러내고자 하는 행위를, 영상 매체의 속성인 빛을 통해 소멸한 것을 소생시키는 파생의 언어로 번역했다. 이 과정에서 안유리는 자신이 주체적으로 언어를 생성하고 표현하겠다는 태도보다는 가장자리에 서서 시어를 이미지와 빛이라는 다른 차원의 언어로 성숙해 가는 과정으로 파생시켜서 의미를 확장하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이는 자신이 다루는 원저를 충분히 이해하고 이를 시각언어화하는 과정에서 시의 언어에서 번역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나아갔음을 볼 수 있다. 이 두 축의 움직임을 단순히 매체에서 매체로의 이동이나 대체로 보기보다는 말의 흔적이 이미지가 되고, 이미지의 흔적이 다시 말로 소생되는 순환 구조로 끊임없는 번역을 통해 성숙해가는 과정을 겪었다고 읽었다.
두 번째 첫 개인전을 마무리하며 나눈 대화 속에서 작가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이올리언의 하프를 언급했었다. 이 하프는 연주자와 악보가 아닌 불어오는 바람의 움직임에 따라 선율을 만들어 낸다. 이는 작가가 시의 자리를 찾아 예술하기를 끊임없이 시도하는 태도와 닮았다.
바람이 부는 대로 만들어지는 선율, 원저자가 사라진 자리를 잇는 번역가의 언어, 사라진 이들을 대신하여 내는 목소리, 그것들이 안유리가 구사하고자 하는 시의 언어이고 도달하고자 하는 예술의 자리일 것이다. 나는 안유리가 이 자리에서 서서 닻을 내리고 불어오는 어떤 바람에도 자유자재로 몸을 맡겨 그만이 만들 수 있는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 낼 수 있기를 응원한다.
[1] 두 번의 전시를 모두 첫 개인전이라 부르는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단순히 두 개인전의 출품작이 같았던 것이 가장 큰 이유이고, 두 번의 전시가 나는 개인적으로 다른 전시였다기 보다는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 위한 하나의 챕터로 보였기 때문이다.
[2] 발터 벤야민,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1983, 반성완 옮김, 민음사, p.352-353
2016년 1월 15일, 작가 워크숍,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