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의 지금》 전시 전경 © 갤러리SP

크리스 로가 구축한 공간에는 간직하려는 몸짓과 상실이 서려 있다. 그는 자신의 바깥에 놓인 ‘그곳’을 거닐고 머물며 기류, 온도, 촉감에서 감지한 진동을 음성처럼 해석해 왔다. 미세한 울림은 작가에게 그곳에 자리한 익명의 시간을 상기시켜 주었고, 몸의 내밀한 곳까지 퍼져 의식의 한 켠에 있던 심상을 불러오곤 했다.

공간의 정취와 몸에 각인된 감흥은 그가 그곳에 긴밀히 접촉하도록 이끌었는데, 데이터에 입각해 규명하려 할수록 작가가 체감한 다층적인 시간성과 공간성은 되려 밀려날 뿐이었다. 때문에 작가는 진위를 증명하는 대신, 보이지 않던 그곳의 흐름을 자신의 시간과 공간으로 연결시킨다. 그의 몸이 통과했던, 그리고 그의 몸을 경유했던 그곳은 의뭉스러운 인상과 감촉으로 남아 그가 거쳐 가는 곳곳에서 형체를 빌려 서서히 부풀어 오른다.

효율이 요구된 도시의 시간 속에서 작가는 모든 분야를 익힐 수 없었다. 한정된 시간 가운데 그는 건축학을 택하여 건축과 도시 환경을 연구하였고, 그래픽 디자인을 작업해 오며 디자인 툴과 인쇄술을 익혀 나갔다. 비록 방대한 지식과 다방면의 기술을 습득할 순 없었지만, 크리스 로는 디자인과 건축 협업을 통해 이웃들의 일상에 다가가고 이들을 둘러싼 터전 속의 공란을 대면할 수 있었다.

그곳은 역사가 담지 못한 서사, 정치의 변두리로 밀려난 몸짓들, 현실에선 가득했던 곳이나 없던 곳으로 소외된 너와 나의 장소들이다. 작가는 공란으로 남겨진 그곳의 정황들을 현재의 움직임으로 다시 펼쳐 보이고자 한다. 그는 자신의 세월 속에 연마해 온 기술로 그곳을 산문과 그래픽으로 번역하고, 디자인적 쓸모에서 그래픽을 분리시켜 공간에 반응하고 접속하는 리듬으로 구성해 나간다.


《한때의 지금》 전시 전경 © 갤러리SP

애니메이션, 포스터, 책 디자인 등의 그래픽 작업을 진행하면서 크리스 로는 디지털 드로잉과 인쇄술이 야기하는 부득이한 낙차를 마주해 왔다. 존재의 덩어리를 납작하게 만들고, 프레임과 레이아웃에 따라 공간을 구획하는 등, 그래픽의 작업은 매체와 실재 사이의 간극을 불가피하게 예고한다. 생략되기에 가벼워지는 존재, 순간 속으로 단절된 세월, 본래 그 유래는 얇지 않았으나 많은 것을 비워낸 표면은 공란으로 남겨진 그곳과 닮았다.

이와 같은 그래픽의 평면성을 작가는 그곳을 투영하는 시각 언어로 응용한다. 아날로그적 그리기와 실크스크린을 통해 레이어링(layering)한 그곳은 정보보다는 미세한 진동과 운동감이 서려 있는 잔상으로 표현되는데, 작가는 이미지의 불완전함을 보완하기 위해 반복적인 인쇄와 그리기를 통해 그곳을 호출하는 형식을 구사한다. 실크망에 공간을 연속적으로 투과하는 과정에서 그래픽은 동일한 것이 아닌, 자율적으로 엇갈리고 변주하는 잔상들로 양산된다.

면으로 치환된 그곳들은 서로 지탱하고 반영하나, 또한 에디션을 부여할 수 없는 고유한 시공들로 분열한 것이다. 그로 인하여 크리스 로의 그래픽은 구체적인 데이터보다 회화적 표면으로 드러나 그곳을 유동적으로 매개한다. 그곳은 네트워크망처럼 뒤얽힌 이미지들을 통해 암시되더라도 뒤틀리고 증식하여 또 다른 곳들로 펼쳐진다.


《한때의 지금》 전시 전경 © 갤러리SP

기록만으로 그곳을 현현하기에는 불충분하므로 크리스 로는 화면 너머 이곳을 빌리기로 한다. 1997년에 준공된 이곳은 한때 누군가의 가정집, 누군가의 사무공간으로 활용되었으나 현재는 전시장으로 둔갑되어 그곳을 임시로 드러내는 매체로 작동 중이다. 기존에 이곳은 조명을 받는 공간과 조명을 받지 못하는 공간, 기능이 활발한 공간과 기능이 움츠러든 공간, 시간이 가속하는 공간과 시간이 더딘 공간으로 나뉘어 있었다.

설계대로라면 이곳은 중심과 주변이 뚜렷했던 장소였으나, 그곳의 침투로 간섭받고 재편성되어 기존의 위계적 구조로부터 어긋날 수 있었다. 발길이 적었던 지점에 동선이 형성되고, 고립되었던 곳이 개방되었다. 이곳이 그곳에 의해 운율이 생기고, 공간과 공간, 공간과 사람 사이의 접촉면이 불어난 것이다. 반대로 2차원의 매체와 기억에 머무르던 그곳은 이곳의 일부가 되며 실체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곳은 이곳을 통해 자신의 형태를 닮은 조각들을 세우고, 자신의 얇은 몸체에 견고한 구조들을 장착하여 걸리고, 세워지고, 매달리게 되었다. 이처럼 그곳과 이곳은 다르지만, 이곳과 그곳이 상응함으로써 서로를 보증하고 있다. 하지만 그곳은 여기에 있다고 확언할 수 있을까? 이곳에 도출된 그곳은 여전히 잔해로 흩어져 온전히 복원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한때의 지금》 전시 전경 © 갤러리SP

이곳 또한 공란이 잔존하고 있다. 크리스 로는 이곳이었으나 그곳으로 밀려난 장소들을 불러오기 위해, 그리고 그곳을 이곳으로 접하기 위해 해당 공간과 관련된 구술사와 1990년대의 도시개발 문서 및 주거 공간의 기록들을 조사해 나갔다. 하지만 온전한 아카이브가 남아 있지 않아 그는 분절된 자료들을 참조로 메꿀 수 없는 시간의 공란들을 연결하기로 한다. 그렇게 집필된 『207-2 』는 작가가 이곳-그곳이 되어, 누군가를 포용하고, 돌보고, 돌봄을 받다가 떠나보낸 이야기를 고백한다. 207-2를 존재하게 만든 순간들, 그러나 그를 있게 한 이곳의 이름들은 사라지고 없다.

이름이 없는 그곳은 특정한 시점과 좌표에 종속되어 있지 않다. 작가는 장소와 장소를 이동하며 각각의 그곳에서 교감하며 수집한 소리, 이야기, 미동, 곧 공기를 상기하고 그려왔다. 누군가에겐 놓칠 수 없던 사건임에도 형태가 없던 정황이기에 망각과 누락이 담보된 기록들, 그러나 부재하진 않았던 그곳을 크리스 로는 자기 앞에 분포된 여러 이곳들에서 그곳과 흡사한 낌새를 목격하고 환기한다.

이는 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이전에도 그는 다른 곳, 다른 시간에서 한때의 그곳들을 짐작하며 여기저기의 이곳과 그곳을 접속시켰다. 따라서 그곳은 하나의 기원에 뿌리를 두지 않는다. 그곳은 복수의 장소이자 하나의 장소이다. 이곳으로 밀려온 그곳, 그곳으로 소명된 이곳, 시간과 장소가 순환하고 교차하는 한때의 지금이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