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 초기 정희민은 인터넷의 오픈소스에서 소재를 확보하고, 이것을 주로 3D 모델링 프로그램을 통해 재배치한 후 이를 다시 고전적 정물로 간주하며 회화적으로 재현하는 작업으로 익히 알려졌었다. 동시대의 젊은 작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시작했으나 사실 정희민의 관심사는 디지털적 상상력보다 이러한 정물적 감각의 비물질성, 혹은 허구성에 있었다. 픽셀로 구축된 디지털 정물을 일종의 허상으로 간주하는 정희민은 이를 다시 반투명한 미디움이 개입하는 캔버스에 옮기는 과정을 통해 이중 허상의 레이어를 구축하기도 했다. 사실 허상은 다분히 납작한 이미지에 가깝기에, 허상을 재현하는 과정은 본질적으로 공감각적으로 작동하는 신체와의 불화를 의미한다. ‘대상을 이미지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회의적으로 느껴졌다’는 정희민의 언급은 그러한 신체 협응에 대한 부적응을 드러내는 말로 읽힌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정희민은 스스로의 작업에 두께를 부여하기 시작한다.

그의 회화는 2020년을 전후해서 두께와 물성을 가진 부조적 형식으로 변모했다. 전 지구를 덮친 팬데믹의 시대, 대부분 사람들이 각자의 실내 공간에서 매개된 이미지로만 소통해야 했던 때다. 작가의 자연스러운 고민과 사유는 당연히 이러한 시대환경의 막대한 영향력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작가 스스로 사용했던 ‘감각적 불일치와 그로 인한 우울감’은 그의 캔버스를 평면에서 물질과 행위로 변화시키는 계기로 작동했다. 이미지를 넘어 사물이 되는 상태, 매개된 평면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행위이자 세계가 되는 두께를 스스로 추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작가는 캔버스의 틀 뿐만 아니라 여러 재료를 활용한 설치나 영상, 심지어 VR 작업까지 다양한 재료와 기법을 실험했다.

그의 작업은 주로 꽃을 소재로 대상의 일부분만을 확대해서 캔버스에 두툼하게 재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캔버스 위로 두툼하게 올라온 여러 물질은 대상의 입체성에 대한 착시를 야기하는데, 그러한 효과를 위해 작가는 생각보다 까다로운 과정을 거친다. 그 제작에는 이미지의 구성과 전사 출력, 아크릴 물감에 혼합하는 안료의 선택, 젤 미디움의 부착과 탈착, 구현된 이미지의 리터치 등 복잡한 과정이 수반된다. 최종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이미지를 처음부터 정확하게 결정하지 않은 채 작업을 시작하기에 정희민은 이미지의 구현보다 그것에 나아가는 행위에 스스로 집중한다. 배경은 가장 느슨한 상황에서 일종의 분위기만으로 존재하고, 세부적인 요소들은 생략되며 본질적인 부분이 더 집중적으로 강조된다. 결국 그의 회화는 의미는 넓어지고 감각은 더 두툼하게 구축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회화에 가해진 물리적인 두께는 곧 그의 그림을 해석하는 층위의 두께와 연동된다. 캔버스 위에 물질이 복잡하게 더해지고 형태의 익숙함에 파괴될 때, 그의 회화는 다양한 감각과 해석의 개입을 허락한다.

이번 전시에 출품되는 정희민의 신작은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에코에 관한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말한다. 소년과 성인 남성의 사이에서 이상적인 매력을 갖추고 있었던 나르키소스를 보고 사랑에 빠진 에코는 상대의 말만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던 형벌로 인해 나르키소스와 정상적인 대화를 할 수 없게 되고, 자신의 사랑을 거부한 채 스스로의 모습과 사랑에 빠진 채 죽어가는 나르키소스의 모습을 지켜만 보며 목소리와 뼈로만 남았다가 결국 돌로 변해 버린다. 언어를 제거당하고 소통을 차단당한 에코와 스스로 외부와의 감정교류를 차단한 채 자신의 매력에만 빠져있는 나르키소스는 모두 죽음에 직면하게 되는데, 특히 에코는 나르키소스와는 달리 뼈에서 돌로 변하는 과정을 통해 신체의 탈각과 굳어진 잔여물의 흔적을 남긴다. 정희민이 꽃을 그리며 의도했던 행위의 흔적은 이 신작의 영감을 부여한 스토리에서도 존재한다.

그의 신작은 신체를 탈각하고 석화의 과정을 거쳐 굳어버린 존재인 에코를 통해 소통의 근본적이고 존재론적인 한계성을 보여준다. 캔버스 위에 올라온 재료들은 정희민이 디지털 세계에서 발굴한 자연물의 이미지를 3D 출력한 후, 그 단면을 평면적으로 중첩하는 것으로, 내면이 빠져나간 껍질처럼 영혼의 소멸 이후 뼈와 돌로만 남은 형상을 연상시킨다. 정희민은 평면에 전사 출력을 하고 미디움을 중첩하는 과정을 ‘에코잉’(echoing)으로 언급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정희민이 그의 신작에 에코의 스토리를 적용하는 것이 주제적 요소의 적용이라기보다는 자신의 회화가 발산하는 일종의 속성을 표현하기 위한 우화적 방법론에 가깝다는 점이다. 어떤 구체적인 주제를 표현하기 보다는 지속적으로 변하는 대상의 본질적 속성을 표현하기 위해 동원된 우회전략인 것이다. 이 에코잉은 그의 캔버스에 부여된 두께의 틈 안에서 공명하며 새로운 상상력의 차원으로 보는 이의 시선을 이동시킨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