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배의 작업은 시각적으로 형상이 분명한 편이다. 인체에서 기하학적 도형, 선과 면에 이르기까지 일견 그가 만들어온 대상들은 조각이란 장르의 궤적에서 익숙하게 다루어져 온 조형적 어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재료를 다루는 기술적 측면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무게를 감내하며 부피를 획득한 구조와 단단하게 마감된 표면은 그것을 구성하는 재료의 물성과 중력의 조건을 자연스레 상기시킨다.
그래서 때로 그의 조각은 지나치게 완결되어 보이기까지 한다. 견고한 외피와 능숙한 기술적 조형성 앞에서 감히 재현된 형상 너머를 그려보는 일은 요원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시공간적 구성을 꿰어 그의 작업을 연결하다 보면 정작 그가 지속적으로 질문해 온 것은 완성된 형상 자체라기보다 그 형상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무엇을 형상화하는가보다, 어떻게 그 이미지를 둘러싼 조건 - 이미지의 운동성, 시각성 너머 여타의 감각 등 - 을 활성화할 것인가.
다시 말해 결과에 앞서 특정한 전제를 설정하고, 주어진 환경과 조건 아래 조각의 이미지를 동원하여 경험적 감각과 사유를 어떻게 촉진할 것인지, 이에 따라 형상에 대한 이해는 어떻게 분해, 연장, 확장하는지를 실험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본 전시 《잠자는 남자》(2026,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그는 보지 않고 만듦을 상상하고, 같은 행동을 동시에 수행하는 두 명의 존재를 상정하며, 시각의 원리를 신체가 마주하는 물질의 언어로 번안한다.
그러므로 김인배에게 ‘어떻게’는 무엇을 제작하기 위한 물리적 방법론 차원에서 소진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에게 ‘어떻게’는 작업의 형식과 내용에 긴밀히 연동하는 사유의 과정이며, 표피적 이미지의 시각성 바깥으로 시선을 연장하기 위한 상황을 조각의 언어로 설계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태도는 김인배가 오래도록 다루어온 ‘차원’의 문제와도 연결된다. 초창기부터 그는 평면과 입체, 앞과 뒤, 내부와 외부처럼 사물을 인식할 때 사용하는 익숙한 구분을 교란하고, 관찰자의 위치에 따라 대상이 다른 상태로 발견되는 상황을 조직해 왔다. 작가의 작업에서 평면과 입체는 각기 독립된 매체가 아닌, 그것을 바라보는 이의 위치와 움직임이 개입할 때 비로소 성립하는 하나의 시공간적 관계에 가깝다.
그러므로 그의 조각은 이미 무엇으로 규정될 수 있는 고정된 형태라기보다 관찰의 위치와 움직임에 따라 계속해서 다른 가능성을 획득하는 과정의 존재로 이해할 수 있다. 이미 확정된 존재(being)를 다시 생성(becoming)의 상태로 되돌리는 일, 형상으로부터 관행적으로 해석되어온 고정된 의미를 흔들고, 그로부터 아직 남아 있는 잠재성을 살피는 일은 오랫동안 작가의 작업을 관통해 온 태도이다.
지난 개인전 《없는 것을 보고》 (2024, 프라이머리 프랙티스, 서울)에서 이 문제는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조각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구체화되었다. 작가는 존재하지만, 시각적으로 포착되지 않는 공간을 모사하고, 장대 끝에 연필을 달아 자신의 시야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드로잉을 하거나, 내부의 원형이 부재한 몰드를 제작했다. 이때 ‘없음’은 단순한 결여나 부재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기존의 시각적 체계로는 붙잡히지 않는 상태를 상상하고, 시각의 권한이 미처 통제하지 못하는 영역을 감각하기 위한 하나의 조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도 그는 시각성이 담보하는 표피의 명징함을 의심하며, 재현된 대상의 외피 너머에 가닿길 시도한다. 그러나 질문은 이전과 조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서 더 나아가, 이제는 보지 않고 만든다고 가정했을 때 무엇이 가능해지는가, 그리고 서로가 하는 일을 볼 수 없는 두 사람이 같은 행동을 수행한다고 상정할 때 ‘동일함’은 어떻게 성립할 수 있는가와 같은 식이다.
즉, 시각의 바깥을 더듬던 관심은 그것을 수행한다고 가정된 몸과 움직임의 문제로 되돌아오는 식이다. 그리고 그 순간 문제는 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구분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보는 몸과 보이는 대상, 만지는 손과 만져지는 사물이 애초에 그렇게 명확히 구분될 수 있느냐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뒤따르게 된다.
1층 전시장에 놓인 검은 조각들은 이러한 문제를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첫 번째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김인배는 내부를 볼 수 없는 어두운 상자에 손을 넣고 형상을 제작한다는 상황을 가정한다. 중요한 것은 실제 행위의 재현이나 기록보다, ‘보지 않고 만든다’라는 조건을 제작에 앞서 먼저 설정하는 일이다. 그 상상을 따른다면 눈으로 형태를 확인하고 수정하는 과정은 처음부터 차단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손끝에 닿는 재료의 촉각성과 강도, 그것을 누르고 덧붙이는 몸의 움직임과 감각이 조형의 중요한 조건으로 설정되고, 형태는 불완전하지만 그렇기에 몸의 궤적이 기입된 재료의 물질적 성질은 보다 분명해진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시각을 배제한 결과가 완전히 낯선 형상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앞과 뒤가 불분명하고 형태가 만들어지는 동시에 무너지는 듯 보이는 검은 덩어리에서는 흉상이나 두상, 와상과 같은 조각사의 익숙한 원형이 어렴풋하게 감지된다. 시각을 배제했다는 조건을 상정했음에도, 관객은 다시 습관처럼 그것을 시각적으로 바라보고 이미 알고 있는 형상의 계보 안에서 읽어낼 것이다.
여기서 ‘보지 않고 만든다’라는 전제는 시선을 차단함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우리가 얼마나 시각의 기억과 관습에 의존해 형상을 인식하는지를 되묻게 한다. 따라서 보지 않고 만든다는 것은 단순히 눈을 손으로 대체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작업은 위와 같은 조건을 가설함으로써, 손과 재료가 관계 맺는 상황 자체를 사고하게 한다. 만약 손이 조각의 재료를 누르고 움켜쥔다면, 손은 형상을 변화시키는 동시에 재료의 단단함과 점성, 저항에 의해 자신의 움직임을 조정받을 것이다.
만드는 몸은 대상에게 일방적으로 형태를 부여하는 주체이면서 동시에 자신이 마주한 물질의 조건에 의해 수정되는 몸이 된다. 이는 메를로퐁티가 ‘살(la chair)’이라는 개념을 통해 짚었던 몸과 세계의 상호 얽힘을 환기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감각이 몸의 내부에서 독립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그것이 마주한 세계 사이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이다. 그 전제 안에서 손은 눈의 대리자가 아니다. 만지는 손은 재료의 질료적 감각을 통해 동시에 자신의 움직임을 자각할 것이다.
형태를 만드는 과정은 곧 작가가 자신의 신체를 다시 감각하게 되는 과정으로 전도된다. 그러므로 어쩌면 시각과 촉각을 둘로 나누는 것은 그리 유효하지 않아 보인다. 눈으로 익힌 형상과 비례의 감각은 이미 몸과 손의 움직임에 침전되어 있으며, 만지는 행위는 다시 앞으로 보게 될 형상을 예비한다. 그런 면에서 김인배가 질문 시 하는 것은 시각 자체라기보다 감각을 구분, 규범화는 방식, 그러니까 눈과 손, 시각과 촉각을 독립된 영역으로 분류하고 작동시켜 온 학습된 인식 체계인지 모른다. 그렇게 시각적으로 부재하는 대상을 조각하는 일은 오히려 몸속에 깊이 자리한 ‘보는 방식’을 더 극적으로 가시화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다른 층에서도 변주하며 이어진다. 4층에서 작가는 또 다른 상황을 설정한다. 헤드셋을 통해 듣게 되는 사운드는 두 남성이 서로 마주한 채 ‘같은 그림’을 그린다는 가상의 수행을 대화의 형식으로 전개한다. 하지만 이들이 생각하는 ‘같음’은 시작부터 일치하지 않는다. 한 사람은 먼저 누군가가 그린 뒤 그것을 따라 그리는 방식을 제안하지만, 다른 사람은 동시에 “같이 그려야 같은 그림”이라고 답한다. 이 짧은 대화에서 동일성의 기준은 결과물의 유사성에서 행위의 동시성으로 이동한다.
이후 사운드는 하나의 판 앞뒤에 선 두 사람이 서로의 선을 직접 확인할 수 없는 조건을 가정한 채, 이들이 어떻게 동일한 움직임에 가까워질 수 있는지를 음성 언어로 추적한다. “5센티미터 정도 갔어요”, “조금 천천히요”, “저도 비슷한 속도로 가고 있어요”, “제가 좀 느려요. 빨리 갈게요.” 이들의 언어는 그려진 이미지를 해설하지 않는다. 상대의 위치는 보이지 않지만, 대화 속에서 서로의 몸은 계속해서 추정되고 측정된다.
말은 아직 가시화되지 않은 상대의 위치를 가정하고, 그 움직임을 상상하며, 두 신체의 속도와 방향을 가능한 한 가까이 맞추기 위해 가상의 좌표계를 형성한다. 사운드는 보이지 않는 두 인물이 동일한 행동을 수행한다고 가정했을 때 필요한 조정과 기다림, 오차의 과정을 시간 속에서 구체화한다. 발화된 음성은 하나의 상황을 서술하는 데 그치지 않고, 두 신체 사이에 존재한다고 가정된 거리와 움직임을 청각적으로 구축한다.
여기에서 한 개인의 몸과 재료 사이에서 발생하던 움직임의 감각은, 서로 다른 두 몸이 어떻게 하나의 시간 속에서 행위를 공유하며 차이를 발생시키는가의 문제로 확장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작가의 작업은 차이를 해소하기 위한 수행의 결과가 아니라, 그 차이를 지속적으로 감지하고 조정해온 시간이 하나의 형식으로 번안된 것에 가깝다.
한편, 한 층을 내려가 3층에 들어서면, 벽을 사이에 두고 공간을 관통하듯 이어지는 노란 선의 단위화된 형상들을 마주하게 된다. 본 작업 〈노란 점선〉(2026)은 도로 위 중앙선의 노란 점선에서 출발한다. 중앙선은 서로 다른 이동의 영역을 구분하고 방향을 정하며, 점선은 그 경계를 일정한 조건 아래 넘어설 수 있음을 암시하는 시각적 기호이다. 다시 말해 하나의 선은 주어진 조건 아래 두 가지 상반된 기능을 동시에 수행한다.
이동을 규율하고 경계를 설정하는 한편, 바로 그 경계 안에 선회와 이탈의 가능성까지 함께 내재하는 것이다. 김인배는 이 평면적인 선을 약 2미터 크기의 입체로 캐스팅해 공간 안에 놓는다. 수월한 교통의 체계를 위해 고안된 기호는 이제 관객의 몸과 같은 차원에 놓인 물리적 대상으로 변한다. 부피와 높이를 획득한 선은 공간 안에서 관객의 신체가 실제로 맞닥뜨리는 장애물이 된다. 이 과정에서 선은 더 이상 공간을 구획하는 추상적인 이미지에 머물지 않는다.
공간을 관통하는 선은 점선의 형식 속에서 공간을 구조화하는 물리적 경계를 해제하고 그 너머를 상상케 하며, 관객의 움직임과 속도, 방향을 다시 결정하게 만드는 조건으로 작동한다. 그러므로 선은 공간을 나누는 형식인 동시에 그 분할의 규칙이 얼마나 조건적이고 가변적인지를 드러내는 장치라 할 수 있으며, 경계는 단단하게 고정된 면이 아니라, 몸의 위치와 움직임에 따라 통과와 우회, 선회의 가능성이 끊임없이 새롭게 결정되는 잠정적인 상태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지하 1층에서 이어지는 사다리와 원근법의 문제 역시 앞선 작업과 맞닿아 있다. 위로 갈수록 폭이 좁아지는 A자형 사다리는 가까운 것은 크게, 먼 것은 작게 인지되는 투시의 원리를 자연스럽게 환기한다. 김인배는 이러한 형태적 유사성을 출발점 삼아 사다리를 조각하고, 그 비례를 조정해 원근의 효과를 한층 강조한 구조를 프로타주로 떠낸다. 이러한 변환은 사다리와 비슷한 윤곽으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빛의 형상에서도 이어진다.
본래 손에 잡히지 않는 빛은 부피를 가진 조각으로 몸체를 얻고, 그렇게 만들어진 입체는 다시 드로잉으로 옮겨진다. 빛에서 물질로, 입체에서 평면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하나의 대상은 동일한 모습으로 복제되기보다 매번 다른 조건을 통과하며 새롭게 번역된다. 여기에서 김인배가 반복하는 것은 특정 형상의 재현이라기보다, 어떤 것을 인지하기 위해 동원되는 거리와 접촉, 부피와 표면의 조건을 서로 다른 차원으로 이행시키는 일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원근법은 이 작업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원근법은 특정한 시점을 기준으로 대상과의 거리를 배열하고 삼차원의 세계를 하나의 평면 위에 질서화하는 체계이다. 그 안에서 보는 이는 일정한 위치를 부여받고, 세계는 그 위치로부터 측정 가능한 깊이와 크기의 관계로 펼쳐진다. 그러나 작가가 관심을 두는 것은 이러한 원근의 체계를 그대로 공간 안에 재현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그는 하나의 차원에서 성립한 거리의 규칙이 다른 형식으로 옮겨졌을 때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반복해서 실험한다.
실제 깊이는 평면 위에서 크기의 차이로 변환되고, 다시 그 차이는 조각의 부피와 길이로 환원되는 식으로 말이다. 따라서 이곳에서 평면과 입체는 원본과 번역, 실재와 이미지의 위계로 나뉘지 않는다. 사다리의 조각이 드로잉보다 더 실제적인 것도 아니며, 드로잉이 조각을 단순히 재현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형상은 서로 다른 매체를 통과할 때마다 다른 방식으로 거리와 깊이를 조직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원근법은 무결한 재현의 원리라기보다 차원 사이를 이동하며 형상을 변환하는 문법에 가깝다.
삼차원의 깊이를 이차원의 관계로 바꾸고, 다시 그 평면의 질서를 부피와 간격으로 확장하면서 작가는 하나의 시점이 어떻게 서로 다른 감각적 조건 속에서 반복, 변형되는지를 살핀다. 원근법은 하나의 위치로부터 세계를 안정적으로 통제, 조직하려 하지만, 김인배의 작업에서 그 위치는 조건을 달리하며 재설정을 거듭하는 식이다. 이제 하나의 시점이 세계를 고정하는 것이 아니라, 시점 자체가 번역의 과정에서 계속 전환하기 시작한다.
김인배의 작업에서 대상을 인식하는 조건은 어느 한쪽의 주체가 일방적으로 행사하는 능력이 아니라, 이처럼 서로 다른 조건들이 상호작용을 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발생하는 것이다. 그가 이번 전시에서 설정한 작업의 조건들을 다시 살펴보면, 대부분이 모종의 규칙과 전제를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보지 않고 만들기, 서로의 그림을 확인할 수 없는 상태에서 같은 행동을 수행하기, 도로의 경계를 입체로 전환하기, 매체를 넘나들며 원근의 구조를 탐색하기.
이들은 얼핏 정밀하게 설계된 실험처럼 보인다. 그러나 더 흥미로운 것은 이 규칙이 분명할수록 그 안에서 발생하는 차이와 오차 역시 더욱 선명해진다는 사실이다. 보지 않고 만든 형상에서는 오히려 조각가가 이미 몸 안에 내면화한 이미지가 시각화되고, 똑같이 움직이려는 두 몸은 결국 서로 다른 두 개의 이미지를 남긴다. 경계를 규정하는 선은 동시에 그 경계를 넘어설 가능성을 포함하고, 세계를 바라보게 하는 원근의 체계는 그 준거점을 잃은 채 새롭게 재조정된다.
김인배의 작업은 시감각의 체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외부를 제안하지 않는다. 아무리 시각을 차단하더라도 이미 보아온 것의 기억은 몸 안에 각인된 채 다른 감각을 통해 다시 발현되고, 기존의 규칙을 벗어난다 한들 그곳에서 또 다른 규칙은 발생한다. 오히려 그의 작업은 주어진 물리적 환경 안에서 어떤 감각적 조건을 동원해 대상을 인지할 수 있는지 묻고, 서로 분절되어 있다고 여겨온 감각의 단위들을 서로 연쇄함으로 표면의 형상 너머에 닿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의 실천과도 같다.
그런 점에서 그가 시도하는 것은 시각이 독점해 온 인식의 권한을 잠시 유예하는 일에 더 가깝다. 오늘날 시각은 세계를 분류하고, 판독하며, 사실로 승인하는 주요한 인식 체계로 기능해왔다. 가시성은 종종 존재를 확인하는 조건이 되고, 명료하게 보인다는 사실은 곧 그것을 충분히 안다는 확신으로 쉽게 전환된다. 그러므로 시야에 포착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형상이 불분명한 것은 아직 의미를 획득하지 못한 것으로 다루어지기 쉽다.
그러나 김인배에게 부재는 존재의 반대항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의 대상이 특정한 감각과 인식의 체계 안에서 아직 포착되지 않은 상태, 혹은 이미 알고 있는 형상으로 환원되기를 유보하는 상태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없음’은 결핍보다 잠재성의 문제이며, 보고, 또 보이는 방식의 한계를 드러내는 계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