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발견한 포털이 지시하는 것


《포털》 전시전경 © 아마도예술공간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포털’은 주로 가상 공간의 용어로 기능한다. 하지만 권용주 작가(b.1977)에게 포털은 현실, 일상에서 비롯되는 용어이며 ‘예술을 통해 다른 현실의 문을 열 수 있는 가능성’으로 기능한다.

“저는 게임 산업을 좋아하고, 다른 차원으로 전송되는 게임의 순간도 즐기는 편이에요. 하지만 전시 주제 ‘포털’은 현실에 기반을 두고 있어요. 가상현실과 현실을 오가는 미술의 형태들이 굉장히 많잖아요. 제 작품들은 가상현실이 아닌 현실의 일상 속 장면을 다뤄요. 일상의 장면이지만 한동안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상 안에서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는 순간이 있어요. 그게 포털이에요.”


권용주, 〈포털〉, 2022, 시멘트, 24 x 24 x 43 cm © 권용주

작가에게 포털로 기능하는 장면들은 무엇일까? “명확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연상되는 장면이 있을 때예요. 그리고 반복해서 제 눈에 띄는 경우도요. 시멘트 덩어리지만 그것이 마치 산처럼 보인다거나 풍경처럼 보일 때가 있거든요. 순간에 형태들이 작용해요. 또한 대상에 이야기가 녹아 있을 것 같거나, 대상에 삶이 있을 것처럼 짐작되는 상황에 캐치하는 것 같아요.”


권용주, 〈포털〉, 2022, 환봉, 석고, 안료, 98 x 4 x 98 cm © 권용주 

포털의 경험을 담고 있는 작업 중 하나는 훌라후프다. “저희 집 인근 공원 나무에는 훌라후프가 늘 걸려있어요.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훌라후프를 한 사람만 쓰는 게 아니라 동네 사람들이 공유하더라고요. 존재로 봤을 때 누군가의 허리가 공유되는 거잖아요. 사람들의 허리가 마치 포털 같다고 생각했어요. 형태적으로 다른 차원으로 가는 문 같아 보이기도 해요.”

이외에도 텃밭에 식물을 고정하기 위해 세워놓은 낚싯대와 깡통 위에 자연스럽게 굳은 시멘트, 대충 감아 놓은 파라솔, 청소 도구함 옷걸이에 걸려 있는 고무장갑 등은 작가가 경험한 포털에서 비롯된 작업이다. 


권용주, 〈시무외 여원인〉, 2022, 옷걸이, 고무장갑, 철사, 40 x 10 x 57 cm © 권용주 

그는 왜 많은 사람들이 활발히 탐구하고 있는 가상 현실이 아닌, 실제 현실을 강조할까? 그 이유는 작가의 행보에 다가갔을 때 비로소 흐릿하게나마 보인다. 권용주 작가는 현실 속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가상들을 매개해왔고, 그 가상은 노동 현상에서 발견되는 산업 물과 거기에 연루돼 있는 사회적 메시지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됐다.


권용주, 〈슬링벨트 1-3, 2-4〉, 2022, H빔, 제스모나이트, 35 x 35 x 145 cm © 권용주 

가능성을 여는 포털

그는 생업을 지속하기 위해 부업을 해왔다. 전시 공간 디자인 및 제작에 관한 일이다. 전시장 연출 공사를 할 때 그는 보조자다. 그러나 보조 활동은 작가에게 작업을 위한 통찰력을 제공했다. 자주 마주한 산업 현장 안에서도 특히 작가의 눈에 띄는 것들이 있었다.

“사람들이 버려 놓은 물건들이나 공장, 세트장 등에서 발견되는 일하고 남은 자재들을 규칙 없이 마구 쌓아 올린 형상들이요. 그 형태는 일종의 확장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어요. 대상이 규칙도 없고 무작위 하게 보였을 때,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모습을 찾기가 쉬워요. 의도가 없어도 관람자가 원하는 대로, 보고 싶은 대로 해석할 수 있는 확장성이 좋았어요.” 

​이러한 확장성은 관람자에게 해석의 영역을 전적으로 맡기는 것이다. 작가라는 직업은 자신의 의도와 서사성을 가지고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 아닌가? 관람자들은 작가의 의도와 서사성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나? 권용주 작가는 작품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고 했지만, 관람자들이 자신의 의도와 이야기에서 살짝 빗나가도 된다고 말한다.

“현시대는 이미지가 쏟아져 나오는 시대예요. 사람들은 이미지를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경향이 있죠. 굳이 제가 어떤 의도를 강하게 줘서 그 확장성의 현상을 해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포털》 전시전경 © 아마도예술공간

포털 사이로 매개하기

작가는 작품의 확장성에 관대하지만, 그의 손가락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 또 다른 현실을 지시한다. 특히 그가 흥미롭게 연구하고 있는 주제가 있다. 안료 산업이다.

“오래된 안료상에 갔는데 거기 사장님 이야기가 너무 재밌었어요. 어떤 작가가 루비색 스펙트럼 중에 ‘루빈’이라는 제품을 원했고 여러 업체에 계속 수배를 했다고 해요. 미술을 하는 입장에서 루빈이라고 하면 울트라 마린처럼 정해진 색을 지칭하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그냥 제품명일 뿐이더라고요. 어떤 화학식에 의해서 개발된 특정한 색인 거예요. 루빈 색이 있다는 안료상이 샘플을 보내줬는데, 완전히 다른 색인 거예요. 화학 산업 하에 안료 개발이 되는 산업군 자체가 재미있었고 안료 리서치를 하게 되었어요.”


권용주, 〈핑크〉, 2022, 스틸파이프, 석고, 안료, 82 x 82 x 160 cm © 권용주

그는 안료 리서치를 하면서 안료 산업과 제국주의와의 연관성을 발견했다.

“100년에서 200년 전, 화학의 시대에는 화학식을 개발해서 안료 하나를 고안하면 돈방석에 올라갔어요. 안료의 역사는 낭만적인 이야기는 아니에요. 안료 산업은 중국이랑 인도 위주로 재편돼 있더라고요. 화학의 시대에는 라이선스 화학식이 훨씬 중요했기 때문에 대부분 제국을 운영하거나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었던 독일, 영국, 일본 등만이 산업 체계를 갖고 있었어요. 지금은 대부분의 라이선스가 중국과 인도로 넘어갔어요. 이제는 중국과 인도가 안료 산업의 레드 오션이 되었고, 유럽이 다시 그 라이선스를 가져오고 있더라고요.” 

작가에게는 안료는 매우 일상적인 소재다. 안료가 지니고 있는 방대한 역사와 제국주의라는 그림자를 마주한 그는 안료 산업이라는 소재를 자신의 작품에서 풀어내고자 했다. “중국에 가서 안료 산업 노동자들을 취재하고,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색에 대한 개념과 생각들을 조사해서 조각의 형태로 뽑아내려는 작업을 했었습니다.”

그는 2020년 산업의 재료이자 플라스틱 제작, 예술 재료로 사용되는 안료 산업을 조사하고자 중국 항주, 저장성의 공장 방문을 계획했다. 코로나19로 인해 국외 조사가 무산되면서 그는 국내 재료상을 찾아 인터뷰를 진행하고, 안료 자체를 조각의 재료로 흡수했다.


권용주, 〈검은 막〉, 2022, 스틸파이프, 석고, 안료, 85 x 98 x 175 cm © 권용주 

안료 산업에서도 다양한 주제에 주목할 수 있을 텐데 왜 노동자에 집중했는지 물었다.

“빨간색을 생산하는 곳이었던 것 같아요. 광물 안료를 체크하는 광산 노동자의 눈만 하얗고 온몸이 새빨간 거예요. 광물 안료도 결국은 그냥 돌을 캐내는 거잖아요. 그 돌은 어느 정도의 색깔을 지니기는 하지만 어두운 갱도에서 파낼 때는 특정한 색이 없어요. 그것을 꺼내 분쇄, 정제하는 과정에서 색이 만들어지는 거거든요. 저는 노동자들이 돌을 캐낼 때 어떤 느낌인지 궁금했어요. 그들이 바라보는 색의 스펙트럼은 어떻게 다른지도 궁금했고요.”


권용주, 〈노끈〉, 2022, 환봉, 석고, 안료, 30 x 33 x 125 cm © 권용주

현재 아마도 예술공간에서는 권용주 작가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작가는 전시를 통해 포털을 가시화하고 안료 실험의 성과를 조각으로 구현하고자 했다. 자신의 이전 작업에 대한 재검토와 더불어 포털의 순간에 느꼈던 장면을 재현하고자 하는 의지 그리고 화학 안료 실험을 거듭해온 흔적이 깃든 ‘과정 중의 작업’들을 선보이고 있다.

사회, 경제, 정치 등 현실에서 비롯된 그의 생각은 설치 작품과 영상 등에서 분명하게 드러나지만, 조각의 과정에서 다른 태도와 방법을 모색하게 했다. 그 과정이 켜켜이 쌓여 작품에 응축돼 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물었다. “추슬러지지 않은 잔여물까지도 끌어서 이어 붙이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추상 조각의 완성도 있는 작업이요. 여기서 완성도는 매끈하다는 뜻이 아니라 맥락 안에서 보다 완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는 조각이 회화와 달리 하나의 작업에만 몰두하기 어려운 매체라고 말한다. 재료가 마르는 시간도 필요하고 장기적으로 지켜도 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작업 방식은 현실 속에서 지속적으로 포털을 발견하고 그것을 매개하는 시각 단련 방식과도 맞닿아 있다. “하나의 작업만 붙잡고 있으면 눈이 너무 익숙해져서 판단이 안 되거든요.” 작품에 깃든 무수한 풍경과 장면, 현상 그리고 그가 포착한 포털. 앞으로의 집요한 연구는 어떻게 시각화될까? 작가의 전시는 오는 25일까지.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