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s
《Sprue》, 2026.04.18 - 2026.05.17, IAH
2026.04.16
IAH

Installation view of 《Sprue》 © IAH
《Sprue》는 한 작가의 조각적 공상에서 시작되었다. 조각이라는 창작물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져 가는 것이라면. 창작 과정에서 발생하는 질료의 팽창과 마모가 조절의 대상이 아니라 받아들여야 할 조건이라면. 그렇다면, 조각이란 시간을 견디는 인내와 노동의 축적 끝에 마주하게 되는 잔여물이 아니던가. 끊임없는 실패의 연속 속에서 비워지는 애씀의 시간은 결국 작가의 신체적 경험으로 남는다.
1. 권용주는 수집과 축적, 그리고 봉합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정서의 형태를 조각으로 가시화해왔다. 이번 전시는 최근 그가 브론즈 조각 과정에서 맞닥뜨린 몰드의 불가피한 마모와 형태의 변형을 단순한 기술적 난제가 아닌 조각적 사유로 작동하는 계기가 된다.
2. 주조 공정에서 ‘스프루(주입구)’는 뜨거운 쇳물이 차가운 거푸집 내부로 흘러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이다. 그러나 형상이 단단하게 굳고 나면, ‘스프루’는 불필요한 잉여물로 간주되어 잘려 나간다. 우리가 흔히 미술관에서 마주하는 브론즈 조각의 매끈한 표면은 사실 이 투박한 통로를 제거함으로써 얻어진 시각적 전유물이다.
3. 권용주에게 ‘스프루’는 현대 노동 환경이 은폐한 ‘유령 노동’의 메타포가 된다. 플랫폼 경제와 알고리즘의 배후에서 묵묵하게 움직이는 육체적 노동이 결과물을 위해 존재하되 결국 시야에서 사라져야 하듯, ‘스프루’ 역시 형상을 위해 자신을 내어준 뒤 사라진다. 작가는 이번 전시를 통해 이 잘려 나간 잉여의 자리를 드러낸다. 매끈한 조각상(결과물)이 아닌, 그것을 가능하게 한 성실한 신체의 자국과 물리적 공정(과정)을 예술의 주인공으로 복원함으로써 말이다.
4. 우리가 마주하는 동시대의 풍경은 세련되게 다듬어져 있다. 손가락 끝의 가벼운 터치로 모든 욕망이 해결되는 디지털 인터페이스, 그리고 그 과정을 생략한 채 배달되는 완결된 상품들 속에서 ‘과정’은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소거된다. 이렇게 현대 노동은 점차 육체성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여기에 권용주가 제안하는 조각적 실천은 몸의 근육과 열기를 동반하는 살아있는 노동의 현장이다. 끊임없는 실패와 구현 불가능성 곁을 지키며 쌓아 올린 ‘애씀의 시간’은 효율성의 논리로는 결코 환산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

Installation view of 《Sprue》 © IAH
5. 작가가 전시를 준비하며 선택한 질료는 완전한 공산품이 아니다. 골동품 상점에서 헐값에 넘겨지는 구리 조각들을 녹이고, 작업실에서 쓰고 남은 먼지 털이나 에어 캡 혹은 공터에 버려진 나뭇가지, 누군가에 의해 발견된 것 혹은 사회적 유효기간이 지나버린 사물들이다. 이들 각자는 저마다의 삶을 살아온 우리의 이야기를 품는다.
6. 《Sprue》는 이러한 소외된 서사들이 예술의 영역으로 진입하기 위한 통로가 된다. 사회에서 ‘잉여’로 취급받아 잘려 나가던 존재들을 수용하는 권용주의 기술을 통해, 그리고 브론즈라는 영속적인 물질의 몸을 입고 다시금 현실 세계에 착륙한다.
7. 조각은 인간의 의지가 물질을 완전히 굴복시킨 결과물이 아님을 생각해 본다. 그것은 자연이 내려준 천연 자원(Natural resources)이 인간이 발명한 물리적 도구(Physical tool)에 의해, 그리고 인간의 반복적인 제작 행위(Crafting)를 통해 서로의 영역을 협상하며 만들어낸 ‘공존의 기록’이 된다.
8. 조각의 현장은 인간의 의지(Human behavior)로 자연적 자원을 일방적으로 제압하는 공간이 아니다. 쇳물은 제멋대로 팽창하며 몰드를 마모시키며 자신의 야생적 습성(Natural behavior)을 드러낸다. 작가는 이를 억누르는 대신, 그 변수가 형상으로 안착할 수 있도록 반응한다. 여기서 조각은 정제된 미학적 오브제가 아니라, 두 에너지가 격렬하게 충돌하다가 잠시 멈춰 선 ‘임시적(Makeshift) 정지 상태’로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