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훈의 작업은 인간이
만든 사물을 통해 인간 사회의 구조와 욕망을 읽어내는 데서 출발한다. 그에게 사물은 단순히 기능을 수행하는
도구가 아니라 시대와 문명, 인간의 욕망이 압축된 기호이자 언어다. 이러한
관점은 〈회전문〉(2019)과 〈대제단〉(2020)에서 일찍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백화점의 회전문과 화장품 진열대처럼 일상적으로 소비와 연결된 장치를 정밀하게 3D 모델링한 뒤, 마네킹과 종교적 제단, 죽음을 상징하는 도상과 결합하면서 소비 행위를 하나의 의식처럼 바라본다.
같은
시기 〈과열된 풍차〉(2020)는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풍차에 식민주의와 자본주의의 역사를 겹쳐 놓고, 끊임없이 불타며 회전하는 풍차를 과열된 현대 문명의 상징으로 제시한다. 박재훈에게
사물의 역사를 추적하는 일은 결국 그것을 만든 인간의 욕망과 제도를 되짚는 방법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실시간
연옥》(대안공간 루프, 서울, 2021)에서 보다 큰 세계관으로 확장되었다. 그는 전쟁과 감염병, 빈곤과 재난이 발생하는 동시에 소비와 자본의 축적 역시 멈추지 않는 현실을
‘실시간 연옥’이라 명명하고, 자본주의가 종교에
가까운 믿음과 욕망의 체계로 작동하는 방식을 살폈다. 〈사건의 지평〉(2021)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의 전쟁 폐허, 후쿠시마 원전, CERN의
거대강입자가속기, 자연 상태의 돌과 축하용 콘페티를 한 화면 안에 병치한다.
〈밤을 위한 제의〉(2021)에서는 종교적 향로와 중동의 카펫, 의료용 호스, 방송 케이블과 전쟁 뉴스가 한데 얽힌다. 현실에서 서로 다른 장소와 시간에 놓여 있던 사건과 사물이 가상공간 안에서 동시적으로 출현하면서, 자본과 기술, 전쟁과 소비가 분리된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문명적
구조 안에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후 관심은 자본주의의
구조를 넘어 인간이 자연과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 소유하고 변형해왔는지로 넓어진다. 〈빙하를 위한 제의〉(2022)는 실제로 녹아 사라지는 빙하를 3D 스캔해 디지털 공간
안에 영구적으로 보존하면서, 자연을 파괴한 인간이 다시 기술을 통해 그것을 보존하려는 역설을 다룬다. 〈거룩한 묘시〉(2022)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폐허와 노드스트림
가스 파이프라인, 석유 관련 장치, 경찰 장비 등을 고속도로의
이미지와 결합하며 성장과 속도를 향한 욕망이 파국의 방향으로 이어지는 모습을 그린다.
〈나뭇가지의 방〉(2023)에서는 회색 콘크리트 공간 안에서 한 나뭇가지가 비현실적인 폭포수를 만들어내며, 산업 문명과 자연의 공존 가능성을 보다 압축적인 장면으로 제시한다. 이
시기부터 박재훈의 작업은 자본주의 비판을 직접적인 결론으로 제시하기보다, 사물과 자연, 기술이 뒤엉킨 장면을 통해 인간 문명이 만들어낸 모순을 관찰하는 쪽으로 조금씩 넓어진다.
최근의 《폴리곤의 순례자들》(WWNN, 서울, 2026)은 이러한 질문을 가상공간 자체의 존재
조건으로 옮겨간다. 점군, 폴리곤, 픽셀과 복셀, 벡터와 좌표로 구성된 세계에서 인간은 더 이상 중심에
서 있지 않고, 도달할 수 없는 절대좌표계의 원점을 향해 계속 이동하는 ‘순례자’로 나타난다. 과거의
작업에서 사물이 인간의 욕망을 대신했다면, 이제는 좌표와 인터페이스,
이동과 지연이라는 가상세계의 구조가 인간의 삶을 설명하는 은유가 된다.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지만
끝내 도달하지 못하는 움직임은 성장과 진보를 믿어온 근대적 시간관을 흔들고, 인간을 세계의 주체가 아니라
수많은 좌표 가운데 하나의 점으로 다시 위치시킨다. 초기의 자본과 소비에 대한 관심은 이처럼 인간이
만든 체계 속에서 인간 자신이 어떻게 방향과 중심을 잃어가는가에 대한 보다 넓은 질문으로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