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lance ball》 전시전경 © 갤러리까비넷

Ⅰ. 얼굴

이 얼굴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열댓 개 도형으로 이루어진, 어떻게 보면 큐비즘의 영향으로 그려진 초상 같은데 그렇게 단정하기에는 부족한 묘연함이 그림 속 화풍에 깃들어 있다. 화면 안에 대충 몇 개라 가늠했던 도형 수치의 정확성도 서로 겹치고 꼬아진 부분 때문에 그렇게 또렷하지는 않다. 그러므로 나는 그 얼굴을 이루는 분할된 면과 그것이 피부로 차올라 마치 얄궂은 혹처럼 얼기설기 붙어 완성된 형체에 반쯤 불안한 인격적 특성을 부여하게 된다.

그것은 이쪽과 저쪽 같은 시선의 몇 방향에 따라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근육을 일그러뜨리고 부위를 나누고 뼈를 짜 맞춰 가면서 안면의 인상과 표정을 실제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비정상적으로 솟구치는 두상, 겉으로 튀어나오거나 안으로 움푹 함몰된 안구, 괴물처럼 구부러진 코와 빼죽하게 피어오른 입술, 돌출된 광대와 겹겹의 턱...... 그 모든 게 소용돌이치듯 현란한 율동을 이루며 저 자체의 윤곽을 잡고 있다. 동시에, 그들은 평면 종이나 캔버스 위에서, 지극히 단순한 조형 원리에 입각한 수학적 조각 모음이기도 하다. 어지럽고 광란한 미적 상황에 자기를 몰아넣고, 복잡다기한 선의 형상과 공간의 변동을 해실하게 정리해 가는 얼굴. 

얼굴. 작가는 그런 얼굴을 그린다. 거기에는 까만 동공이 칼로 자른 듯 분할되어 있는가 하면, 깊은 암굴에서 움을 트기 시작한 회오리처럼 연신 나선을 그리는 지점도 있다. 그 밖으로 하나의 파고를 이루는 선과 예각이 그어져 별도의 기둥을 세우고 반호를 그렸다가 직선으로 치켜 오르는가 싶더니 별안간 꺾여 뒤집어졌다가 하는 식으로 변성적인 건축 지형의 얼굴이 생성된다.

부분적으로 옵아트의 착시가 지나가지만 규칙성을 허문 패턴의 출현으로 그 추정 역시 곧 부정당하고 만다. 그것은 반듯하되 둔탁한 콘크리트와 같이 색조와 질감이 극히 제한된 낯빛으로 존재한다. 페르낭 레제(Fernand Lèger)가 튜비즘(tubism)의 양식화로 구현한 회색조 인물을 연상시키면서도, 연필 데생의 명암 느낌에 충실할 뿐 구체적인 인체 부위 재현이 되기는 거부한 도형 덩어리 합에 가깝다.

안면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번졌다가 사멸했다가 하는 조형의 언어는 가히 변죽이 심하고 충동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전체적으로는 얼굴로 보이고, 표정이 유추되고, 균형감을 이뤄 시각적 안정감을 주는 것이 흥미롭다. 상하좌우의 각지로 혹의 부피, 무게감을 나눠 모종의 질서를 지탱하고 있는 듯한 얼굴. 그런데 그 괴이한 이목구비의 빛깔이 검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작가가 연작으로 그리고 있는 그 얼굴에 간혹 색채가 출연하지만, 그조차 피부의 색감은 아니다.

그 색은 작가가 지정한 소량의 면적에만 아크릴 물감으로 일부 펴 발라져 예의 살아있는 살 거죽의 묘사가 되기를 거부한다. 그 게 아니면, 그 제한된 색채는 보통, 그림의 배경으로 평평하게 위치해 버린다. 그러니까, 이 형체의 얼굴은 대개 검다. 색을 거부하고, 음영의 변화만으로, 저 안의 조각난 부분 부분을 명암차로 대조시켜 버린다. 검은 석상의 형상이 제 그림자를 배출하듯 또 다른 검은 형상을 복사해 만들어 나가고, 어느 때에는 흡수시킨다.

관람자는 그렇게 디자인된 얼굴 안에서 끝나지 않는 검은 앙상블을 본다. 숱한 단계를 부드럽게 오고 가는 그라데이션. 그에 반해 면적 간 윤곽선 경계를 침범하지는 않는 치밀함. 이들이 얼굴 위에서 생명을 확장해 살아가는 것인지, 축소돼 죽어가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계속 돌출되고 축소되는 변주가 있을 뿐이다.

매너리즘 시대의 작가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의 얼굴, 다색 과일과 정물로 완성된 그것과 비교하면 여기 있는 얼굴은 유사 환상을 공유하되 차갑고 처연한 편이다. 이 검은 얼굴은 생물의 얽히고설킨 형태를 형용해낸 시각적 연상이 아닌, 본디 추상으로 태동해 그 관념적 이미지 자체의 엮임으로만 괴기하게 완성된 것이니까. 작가는 그 엮임을 연필과 세필로 명료하게 직조해왔다.

그것은 평면이거나 입체 다면체인 도형의 혼합, 회색조 단계적 명암 처리,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콜라주로 환상적인 공간감과 동세를 얼굴 내부에 부여한다. 얼굴은, 오묘하고도 사뭇 옹골찬 인상으로 매번 다른 포즈를 취하고 있다. 피카소(Pablo Picasso)의 성취를 포함해, 미술사에 각인된 기억을 몇 차례 전유(appropriate)해 동시대 지금에 안착한 것처럼도 보인다. 매번 유사한 얼굴을 다르게 그려오고 있다는 데서, 창작자의 전(全)생애에 걸쳐 탐구되는 자아상의 끈질긴 모색일 거라는 가능성도 간과할 수는 없다.  


Ⅱ. 대면

어느 날, 그 얼굴은 태어났을 것이다. 작가 윤미선(Yoon Miseon, b.1979)은 그 게 2017년경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때는 작가가 2009년 지인의 추천으로 2인전 《Stories that deliver clothes that deliver stories》(워크룸 윈도우 갤러리)에 참여하여 미술계에 데뷔한 뒤, 직물 작업을 계속하며 이름을 알리고 있을 때다. 이어, 그녀에게는 정신적·신체적 번아웃이 물밀 듯 찾아온 해에 해당한다. 

작가는 대학에서 도예와 섬유미술을 전공한 뒤 서울에서 디자이너로 개인 사업을 하다, 첫 전시 후 전업 작가로 전향해 패브릭 아트를 해왔었다. 천을 모자이크 하듯, 오리고 붙여 특정 인물을 묘사하는 작업이었다. 패턴 없이 입체 재단으로만 드레이퍼리한 옷의 실루엣을 만들고, 상당량의 노동 시간이 소요되는 패치워크로 옷에 유니크한 아이덴티티를 냈던 디자이너 시절의 영향이 있었다. 

앙드레 마송(André Masson),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c)와 같이, 그녀가 존경하는 대가들의 초상을 대상으로 하기도 했고, 대부분은 『World Press Photo』에 등장한 인물을 천에 담았다. 이 다큐멘터리 저널리즘이 포착한 전쟁, 질병, 기근의 상황과 그로 인한 고통에 그저 삶을 무력하게 내맡길 수밖에 없는 이들의 얼굴이 당시 작가의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이어, 물감물을 들인 헝겊 조각조각으로 그들 이미지가 박음질됐다. 구체적인 서사와 배경은 생략되고, 오로지 얼굴과 일부 신체만이, 규격 없이 잘린 천의 모음으로 재현된 것이었지만 거기에는 원본에 있던 참혹한 폐허와 처연한 기운이 전염돼 있었다. 작가는 그에 자신을 동일시하고, 투사하고, 대화하고, 위로하면서 천을 비정형으로 오리고, 잇고, 평평하게 다리고, 당기면서, 유사한 자기 상처를 끄집어내고, 직면하고, 체벌하고, 토해내는 작업을 계속했다.

당시의 그것은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나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를 떠올리게 하는, 어두운 감각이 드리운 표현주의의 배양이었다. 재봉된 바느질은 판형을 정교하게 이었으나 꾸불꾸불한 외곽선에 왜곡된 색채의 사용이 인물의 처절한 실존 상태를 심리적으로 따라가고 있었다. 불행으로 뒤틀리고 쇠약한 절망적 상태가 바늘땀에 새겨진 듯, 조각을 붙들어 매는 실의 연결선은 위태롭고 음습하다. 누런 광목천 앞에서, 자의의 창조주가 된 작가가 그토록 마주하고 부딪히고 싶었던 모습이 그랬다.  

2017년 개인전 《Face to Face》(Noblesse Collection)를 끝으로, 작가는 5년간의 긴 동면에 들어간다. 모든 면역기능이 무너진 것 같은 쇠잔한 시간이었다. 첫 몇 개월 간 작가의 얼굴은 삭발을 하고 피부에는 거친 염증이 올라온 상태였다. 그를 전후로, 지금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어깨 관절의 통증으로 더 이상 잡을 수 없게 된 공업용 미싱과 아이롱이 아니라, 그보다 가벼운 연필이 손에 잡혔다.

원단에 촘촘하고 깊은 구멍을 내던 바늘이 아니라, 흑연의 회색 필선이 가리키는 유려한 방향대로 종이에다 그저 그렸다. 가학적인 고통을 체화하고 순환하는 것 같았던 전작의 무게가 기초적이고 자유로운 선 드로잉 속에서 가볍게 몸을 움직이고 뻗어 나갔다. 작가가 존경하고 흠모하며 오마주했을 화가의 얼굴도, 불가항력의 고통을 직면해서라도 극복하고 싶었던 상황의 얼굴도 아닌 제3의 얼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여러 개의 불분명한 선이었다가 그보다 적지만 짙은 선으로 정리되고, 삼각형이니 원뿔이니 하는 도형의 형태로 제 면적을 차지하면서, 두상과 표정을 특정할 부분도 자리 잡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다색화로 그려졌다가 점차 색을 쓸 면의 역할과 범위도 정해져갔다. 그렇게 지금의 ‘얼굴’이 등장했다. 천과 실로부터 종이와 연필로 옮겨온, 그러면서 여럿 조각이 전체를 이뤄 형태를 갖추는 방법론은 일관되게 유지되는 작풍이었다.


Ⅲ. 페르소나

윤미선은 그림 속에서 어느 날 단발머리 여성을 보았고, 이를 ‘단발이(bob)’라는 애칭으로 부르고자 했다. 충돌과 안정, 양자 간 씨름으로 어느새 완연해진 그것이 무엇일지, 작가의 시간을 투영해 보면 어느 정도 해석이 가능하다. 고단했던 작업세계에서 균형을 꾀한 과정의 결과물이자, 유년기부터 겪은 피해로 농축된 내면세계의 가시적 잔영이자, 극복하고 성장하려는 욕구의 관철과 다듬어진 의지이며, 작가가 만들어낸 페르소나라고. 

작가는 ‘단발이’에 이어 ‘악마’라 호칭되는 것의 얼굴도 만들어냈다. 만들어냈다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악마의 얼굴이 작품 연작 중에 등장하게 된 것은 맞다. ‘악마’는 머리 위에 도깨비 같은 뿔이 나있고, 어느 때에는 꼬리까지 달려있다. 긴 꽃봉오리처럼 솟아나온 것을 혀 속에 품고 있거나, 손에 들고 있을 때도 있다. 가해자 역할의 ‘악마’와 대비되는 ‘피해자’ 약자와 함께 등장하기도 한다.

그들 몸을 이루는 근육과 손가락, 발가락의 마디 표현은 생동하여 움트면서도 검은 얼굴의 그것처럼 평면 혹은 입체 도형으로 단순화되고, 유기적으로 접합되고, 기하학적으로 극화되어 있다. 윤미선이 실존 인물을 재현하는 도구로 천을 다뤘을 때와는 달리, 추상화된 캐릭터를 다루면서는 신화적 상상력이 가미된 허구의 내러티브나 나름의 해학적 코드를 넣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직물 작업과 비교하면 화면 내부에 색이나 면, 공간감을 보다 다층적이고 광범위하게 쓴다. 어지럽히고 분해했다가 자기 규칙을 만들어 정돈해가면서 작가로서 자의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창작 영역에 조정을 기하고 있다는 사실도 물론 보인다. 작가는 어린 시절, 엄격한 가풍과 입시 교육의 압박 속에서 자라, 위축되고 수동적인 상태로 한참을 부친 삶을 살아야 했다고 회상한다.

억눌려온 내면의 자아를 ‘단발이’로 풀어낸 이후 도달·성취한 것이자, 자유의지가 허락한 창작의 지대이며, 스스로 원리 구축해가는 규칙성이 작가에게는 오래간 갈망한 마침내의 해방구인 것 같다. 선악의 대조와 대립, 때로는 그들 간 장난 섞인 움직임으로 자기 철학을 투영시킨 ‘악마’ 연작에서도 작가는 해방감을 느꼈다. 그것은 어떤 형태의 카타르시스(catharsis)일까.


Ⅳ. 꽃 봉오리

윤미선은 얼굴을 반복적으로 그려왔지만, 정형화된 틀을 만들고 싶지는 않다고 말한다. 일률화된 도식이 아닌 심오한 감정과 심리, 그것에 따르기를 바란다고. 숱한 선과 도형이 그려졌다 삭제되고 끝내 확정되어 도달하는 지금의 그림. 치열하게 씨름하고 노력해 닿으려고 하는 의식이 작업 전반의 주제이자, 작가 삶의 기반이 되고 있다. 작가의 시그니처가 된 조형 어법, 자기 삶의 원칙을 찾은 작가의 작풍은 여전히 불안하지만, 이전보다는 훨씬 안정되어 보인다. 침울하고 나약했던 배경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으면서, 저항과 교감 끝에 한계를 받아들이고 포용하면서 위치를 잡아가는 중이다.

그런 현재적 형태를 ‘구(ball)’에 비유해도 될까. ‘단발이’, ‘악마’, 그리고 이들과 함께 혹은 별도 정물로 그려지는 꽃을 포함한 ‘식물’ 연작까지, 작업 일련 간 공통으로 관찰되는 것이 바로 ‘구’다. 대칭성과 완결성을 띤 그것은 비정형의 검고 어지러운 화면 전반 속에서 명시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음침하고 불안한 화면에 온화함과 안정감을 주는 요소로, 평평하고 딱딱한 화면에는 강조와 긴장감을 주는 요인으로 제 역할을 했다. 평형의 세계를 위한 균형점으로, 납작하거나 입체적으로 등장한다.  

5년 만의 전시 재개였던 2022년, 윤미선은 개인전 제목을 《Balance Ball》(갤러리까비넷)로 지었다. 거기서 다수의 ‘단발이’와 ‘악마’의 얼굴, 그리고 ‘식물’로 이어진 대상을 선보이며 뾰족하기도, 둥글기도 한 존재에 중심을 잡고자 했다. 2023년 봄, 작가는 일산의 작업실에서 매일처럼 그 믿음을 수행 중이다. 응어리진 한처럼 꼬이고 뒤틀린 상흔이 역방향으로 풀려 꽃봉오리처럼 차츰 피어오르는 환영, 나는 지금 윤미선의 작업에서 그를 본다. 수많은 나날, 겹겹의 얼굴이 에워싸 멍울의 부피감으로 축적돼 섞이고, 뱉어내려는 듯 응집돼 돌출되고 정제되는 화면 속에서 말이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