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 인터뷰를 시작할 때 하는 공통 질문이다. 미술에 관한 첫 기억은 무엇인가? 반드시 그림을 그리거나 배운 것이 아니어도 괜찮다.

Beom : 지금 기억나는 장면은 초등학교 2학년인가, 3학년 때 학교에서 야외 사생을 나간 것이다. 나는 풍경 대신 스타워즈를 그렸다. 선생님께서 사생이 아니라 상상화 아니냐며 왜 그런 걸 그렸냐고 물으셨는데 특별한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냥 그리고 싶었던 것 같다. 대학에서는 미술교육을 전공했다 하지만 졸업 후 미술 교사가 되거나 곧바로 작업을 시작하지는 않았고, 아는 분의 소개로 갤러리 카페에서 매니저 일을 했다.

손님 대부분이 작가들이어서 곁에서 보고 듣은 미술에 관한 것들이 자연스럽게 쌓였던 것 같다. 그렇게 약 3년 정도 지나 카페가 문을 닫게 될 무렵 나도 작업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하면서 모아둔 돈으로 작업실을 얻어 그림을 시작하게 되었다. 졸업 직후 바로 활동을 시작한 것은 아니어서 데뷔는 비교적 늦은 편이다.

LEE : 미술로 대학을 가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몇 살 때인가?

Beom :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미술을 시작했다. 원래는 연극반에 들어가고 싶었는데 학교에 연극반이 없어서 비슷한 것을 찾다가 미술반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게 결국 대학까지 이어졌다. 대학에서는 미술교육을 전공했기 때문에 2학년 때까지 동양화, 서양화, 조소 등 여러 장르를 배웠다. 이후 3학년 때 전공을 정했고 4학년 때는 교생 실습도 다녀왔다. 그런데 실습을 하면서 교육과 관련된 직업이 나와는 잘 맞지 않다고 느끼게 되었다. 결국 미술교육에서 교육을 빼고 나니 내게 남는 것은 미술 자체였다.

LEE : 미술을 선택한 뒤 처음 하게 된 작업은 무엇이고, 처음으로 보였던 행보는 무엇이었는가? 설렜을 것 같지만, 한편으로 막막했을 것도 같다.

Beom : 그림을 중단하기 전부터 그러니까 카페 매니저로 일했던 시기 이전부터 아침마다 꿈 일기를 쓰는 습관이 있었다. 꿈은 금방 잊히는 편이라 처음에는 단어 몇 개만 겨우 적을 수 있었지만, 계속 기록하다 보니 점점 이야기처럼 길게 적게 되었다. 누구를 만났고, 무엇을 했고, 어떻게 끝났는지까지 이어서 적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작업을 하지 않던 시기에도 그 습관은 계속 이어졌다.

이후 다시 작업을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꿈 일기를 출발점으로 삼게 되었다. 꿈 기록은 내가 가진 가장 풍부한 자료였고, 이전 작업과도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림을 망쳤다고 느껴지면 쉽게 찢어버렸다. 그래서 찢을 수 없게 9미터짜리 긴 종이에 일기를 쓰듯 매일 이어서 그리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이런 일기 드로잉에 본격적으로 집중하게 되었다.


범진용, 〈거짓 예언자〉, 2014, 캔버스에 목탄, 140 x 830 cm / 〈풍경〉, 2015, 캔버스에 유채, 117 x 91 cm © 범진용

LEE : 꿈 일기를 적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는가?

Beom : 입대하기 약 3개월 전에 인상적인 꿈을 꾼 적이 있다. 원래 꿈은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인데, 그 꿈은 이상할 정도로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이탈리아의 곤돌라 같은 배를 타고 성당의 문 가운데를 지나가는 장면이었는데, 성당 안에는 어울리지 않게 이교도 석상들이 양쪽 벽에 놓여 있었다. 그 장면이 오래 기억에 남아서 이후부터 가끔씩 떠오르는 꿈이나 이미지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제대 후 복학하고 나서 그런 기록들이 작업이나 졸업 전시에 활용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적기 시작했다.

LEE : 작업 초기에도 지금처럼 유화를 사용했는가?

Beom : 처음에는 성격이 급한 편이라 건조가 빠른 아크릴 물감을 주로 사용했다. 그런데 유화를 사용해보니 표현 방식이 훨씬 다양하고 재료 자체의 매력이 컸다. 2013년을 기점으로 그 이후부터 유화를 중심으로 작업해왔는데 펜 드로잉이나 목탄 작업을 병행하기도 했다.

LEE : 초기 작업은 특히 어두운 분위기가 강한데 무서운 꿈을 그리기도 했나? 꿈은 당시의 심리 상태를 반영한다고도 한다.

Beom : 무서운 꿈을 꾸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공포나 어둠이라기보다, 전체적으로는 우울한 정서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처음 그림을 시작하던 시기의 불안한 감정들도 자연스럽게 반영된 것 같다.

LEE : 시작하기 전에 체계적으로 계획을 해서 작업을 진행하는 타입은 아닌 것 같다.

Beom : 모든 것을 체계적으로 계획해두는 편은 아닌 것 같다. 물론 큰 흐름이나 방향 정도는 있지만, 실제 작업은 그리면서 계속 바뀌는 경우가 많다.
처음 생각했던 이미지가 작업 도중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기도 하고,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에서 화면이 살아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미리 완성된 결과를 정해놓기보다, 그리는 과정 안에서 계속 판단하고 반응하면서 작업하는 편에 가깝다.

LEE : 큰 작품도 그런 식으로 진행하는가? 그러면 망칠 위험이 커지는 건 아닌지 궁금하다. 화면 구성도 즉흥적인가? 작가가 그냥 그린다, 비계획적으로 그린다고 해서 생각이나 판단을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정말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작가는 늘 오만가지를 생각하며 그리고 만든다. 상대적인 우연성과 즉흥성을 말하는 거다.

Beom : 작업을 하다 보면 우연히 나온 형태나 잘못된 구성처럼 보이는 부분들도 있다. 그런데 그런 요소들이 화면 안에서 어울린다고 느껴지면 그대로 살려 이어가는 편이다. 그런 우연과 판단들이 계속 쌓이면서 그림이 점점 완성에 가까워지는 것 같다. 그래서 즉흥적인 구성 역시 내 작업에서는 중요한 과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최근 작업 과정을 기준으로 설명하면, 사진을 참고해 대략적인 형상을 그리며 그리기 시작한다.

사진과 비슷하게 출발하지만 그대로 재현하는 것은 아니다. 작업 중에 선이나 형태 등 순간적으로 끌리는 것들을 계속 추가한다. 그 선들과 화면의 흐름에 맞춰 색과 형태가 점점 채워진다. 그리고 이 과정이 반복되다 보면 어느 순간 그림이 완성되어 있다. 물론 모든 선택이 완전히 우연적인 것은 아니다. 어떤 선을 남길지, 어떤 색과 형태를 사용할지는 결국 내 취향과 화면에 대한 판단들이 함께 작용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범진용, 〈까마귀 꽃밭〉, 2020, 캔버스에 유채, 130 x 163 cm © 범진용 

Beom : 한 화면에 풍경과 인물이 공존하는 시기는 두 번 있었다. 첫 번째는 꿈속의 인물이나 사건들이 현실의 풍경과 섞여 나타나던 때였다. 그러다가 2015년 말 경부터는 관심이 점점 현실의 버려진 장소와 그 안에서 자라는 풀 풍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두 번째는 2019년 이후 풍경 작업에서 인물 작업으로 넘어가던 시기다. 이때는 풍경 속 인물, 풍경만 있는 작업, 인물 중심의 작업을 동시에 진행해 세 가지 흐름이 함께 존재한다. 현재는 보다 추상화된 인물 작업과, 비교적 재현에 가까운 인물 작업을 같이 이어가고 있다.

LEE : 꿈에 기반해 그리면 그 내용을 어느 정도 공개하는지 궁금하다. 분절적이라 해도 꿈에 스토리가 있을 수 있다.

Beom : 작품마다 다르다. 공개하는 것이 화면에 더 도움이 된다고 느낄 때도 있고, 숨겨두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할 때도 있다. 질문대로 꿈이 긴 이야기처럼 이어질 때도 있고 아주 짧은 장면만 남을 때도 있다. 때로는 구체적인 내용 없이 분위기나 감각만 기억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요소들이 서로 섞여 작업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또 하나의 그림에 하나의 꿈만 담는 경우, 비슷한 방향의 여러 꿈들을 겹쳐 하나의 화면으로 만들 경우 모두 가능하다. 어떤 인물이나 물건은 원래의 이야기와 분리되어 하나의 독립적인 이미지처럼 사용되기도 한다.

LEE : 꿈이니까 오히려 한 장에 다 담을 수도 있지 않을까? 어차피 꿈의 내용을 그대로, 완결된 이야기로 그려주는 그림은 아니니 한 폭의 회화로 그려내면 상상력을 더 발휘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지금 계속 보여주는 작품 중에 종교화의 분위기를 풍기는 것도 있다. 그리고 대부분 그림의 크기가 꽤 크다. 작업 초기부터 큰 작품을 선호했는가?

Beom : 처음부터 큰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의식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작업을 계속하다 보니 화면이 점점 커졌다. 오히려 작은 그림이 더 어렵게 느껴졌고, 마음에 드는 작업도 잘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큰 화면에 그린 뒤, 그중 마음에 드는 부분만 잘라 다시 캔버스를 짠 적도 있다.

초기 작업들은 종교화 같다는 이야기는 자주 들었다. 아마 주변 환경의 영향이 있었을 거다. 집 근처에 수도원, 교회, 절이 모두 있었는데 어릴 때부터 새벽 절의 종소리, 늦은 오후 교회의 차임벨, 저녁이면 수도원에서 들려오는 미사 소리와 성가를 자연스럽게 들으며 자랐다. 특별히 의식한 적은 없지만 그런 분위기들이 작업 안에 알게 모르게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참고로 나는 무교다.

LEE : 풍경이든 인물이든 사진을 바탕으로 그린 경우가 많은데 사진은 본인이 직접 찍은 사진만 선택하는가? 그리고 온라인에서 수집한 이미지가 아니라 작가 혹은 주변의 누군가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이 주변 사람일 경우가 대부분일 것 같다. 작업 설명을 할 때 그림 속 상황에 작가도 함께했던 경우도 많다. 그러다 보니 그때, 그곳의 현장성이 강하게 전달되는 것 같다. 여기서 궁금해지는 것이 있다. 작가의 감정이나 생각이 어느 정도 담긴다고 생각하는가?

Beom : 내가 직접 찍은 사진도 있고 인물사진 같은 경우 주변인들이 찍어서 보내준 것도 있다. 온라인에서 수집한 이미지의 경우 참고할 수는 있어도, 작업의 출발점이 되기는 어렵다. 내가 실제로 지나갔던 장소, 함께 있었던 사람들, 혹은 아주 가까운 거리 안에 있는 장면들이어야 화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 그래서 등장인물들도 대부분 주변 사람들이다.

특별한 사건이라기보다 평범한 일상의 순간들인데, 오히려 그런 장면들이 더 오래 남는다. 그렇다고 그 순간을 그대로 기록하는 것은 아니다. 작업을 진행할수록 기억이나 감정이 개입되어 일부는 흐려지고. 일부는 강해진다. 그래서 작업에는 실제와 기억, 관찰과 상상이 섞여있다.

LEE : 회화나 조각 작업을 하는 작가 중에 자신의 작엄이 추상을 향한다고 말하는 분이 적지 않았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범진용 작가는 일정 부분에서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을 넘어가는 중에 활동한 화가들이 소재-대상을 대하는 태도와 닮은 것 같다.

Beom : 그 시기의 화가들도 단순히 눈앞의 대상을 정확하게 묘사하기보다 순간의 공기나 빛, 기억, 감각 같은 것을 화면 안에 담으려 했다고 생각한다. 나 또한 인물이나 풍경 자체보다 내게 남아있는 그 장면을 바라볼 때의 분위기, 살아 있었다는 감각에 더 관심이 많다. 그래서 때로는 화면이 흐려지고, 어떤 부분은 남고, 어떤 부분은 사라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완전히 추상을 향한다기보다 현실의 장면과 흐릿한 기억 사이를 계속 오가는 느낌에 더 가깝다. 앞으로 더 추상으로 갈지 아니면 구상성이 강조되는 방향으로 갈지 모르지만 지금 나의 그림은 내 안에서 더 바람직하다고 느끼고, 좋다고 생각하는 질서나 구조를 찾아가는 과정 중에 있다.


범진용, 〈완벽한 이웃〉, 2025, 캔버스에 유채, 240 x 330 cm / 〈인물〉, 2026, 캔버스에 유채, 27.3 x 34.8 cm © 범진용

LEE : 사진을 바탕으로 하지만 사진 속 상황, 그 인물들의 형상과 배치, 색채를 그대로 그리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어떤 사진을 가져다 그려도 상관없는 것 아닌가? 그런데도 작가가 직접 경험한 순간을 선택해 그린다. 오히려 사진의 범위를 확장하면 더 시각적 구조나 상황이 흥미로운 이미지를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Beom : 물론 시각적으로 더 재밌거나 강한 이미지는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 작업에서 사진은 단순히 화면 구성을 위한 자료만은 아니다. 내가 실제로 있었던 장소, 같이 시간을 보냈던 사람들, 그날의 공기나 분위기 같은 것들이 작업할 때 계속 같이 따라온다. 전혀 관계없는 이미지를 사용하면 극적이거나 세련된 화면은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특별한 장면을 만들기보다 지나고 나서 희미하게 남아 있는 순간의 감각 같은 것에 더 관심이 있다. 그래서 내가 경험했던 장면들을 계속 가져오게 된다.

LEE : 인터뷰를 하거나 글을 쓸 때 특정한 미술사조나 작가를 언급하는 것을 조심하는 편인데, 일부 작품에서 독일 표현주의가 떠오른다. 붓질이나 선 등에서 표현성이 강하게 전달된다. 색에서 빛이나 에너지가 느껴지는데도 어둡다. 북적거리고 신나는 분위기가 있지만 인물들의 표정이나 분위기가 어둡고 으스스하기도 하다.

Beom : 아마도 그리는 내용이 표현하고 싶은 방식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인 것 같다. 사람들이 모여 있고 밝은 색이나 강한 붓질이 있어도 그 안에 즐겁거나 명확한 감정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 기억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분명 웃고 떠들던 순간인데도 지나고 나면 이상하게 낯설거나 쓸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그런 애매한 감각에 관심이 있다.

LEE : 캔버스 옆면은 얼마나 신경 쓰는가?

Beom : 작업하다 보면 물감이 흐르거나 번지는 흔적들이 자연스럽게 생기는데 그런 부분들도 작업 과정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일부러 연출한다기보다 작업하면서 남게 되는 흔적에 더 가깝다. 정리된 상태보다, 그리는 과정에서 생긴 흔적이나 흐트러짐이 같이 존재하는 화면에 더 끌리는 것 같다.

LEE : 혹시 캔버스를 벗어나거나 공간으로 확장된 회화를 시도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 있는가?

Beom : 작업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화면 밖으로 번져 나가는 감각들이 있긴 하지만, 지금은 다른 형식으로 확장하기보다 그림 자체를 더 그리고 싶다는 마음이 큰 것 같다. 아직 그리고 싶은 장면들이 많고, 당분간은 회화라는 방식 안에서 밀고 나가고 싶다. 물론 앞으로 다른 시도를 하게 될 가능성은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