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꿈을 꿈 일기로 재현하고 그림으로 각색하는 작가의 작업은 의미가 있다. 최초의 꿈 자체가 현실과는 다른 아님 미처 현실화되지 못한 서사를 열어놓고, 꿈의 재현이며 각색이 이와는 또 다른 서사 내지 차이나는 서사를 열어놓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꿈을 재현하고 각색한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서사의 보고를 여는 일일지도 모르고, 억압된 서사며 잠재적인 서사의 봇물을 터주는 일일지도 모르고, 자유자재로 하이퍼링크 되면서 다른 서사며 차이나는 서사를 불러들여 기왕의 서사를 부풀리는 일일지도 모르고, 그리고 그렇게 사통팔방으로 열리고 닫히는 하이퍼텍스트를 여는 일일지도 모른다.
억압된 서사며 잠재적인 서사? 꿈은 억압된 욕망의 우회적인 실현이라고 했다. 그리고 욕망의 처벌이라고도 했다. 욕망(아님 유혹)과 처벌이, 자아와 초자아가, 얼터에고와 아버지(내가 죽여야 할 자)가 날실과 씨실이 돼 하나의 서사를 직조하는, 서사의 직물이 꿈이다.
하이퍼링크? 하이퍼텍스트? 하이퍼리얼? 꿈은 하이퍼리얼한 세계를 여는 행위이다. 나는 욕망을 지향하고 현실(아님 제도. 그 자체 아버지의 다른 이름이기도 한)은 욕망을 억압한다. 그렇게 욕망은 현실에 연동된 것이며 현실에서 건너온 것이며 현실에서 파생된 것이다. 그 욕망이 억압되고 잠수를 타면서 현실이 왜곡된다. 그렇다면 현실은 왜 욕망을 억압하는가. 말하자면 현실은 왜 욕망을 파생하는가. 현실은 꼭 필요한 분량의 욕망을, 불안을, 억압을 자기 변방에 거느리고 있어야 한다.
현실에 문제가 생길 때 언제든 소환할 수 있는 희생양을 예상되는 폭력에 내어주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렇게 체제의 안정을 위해서다. 그렇게 욕망은 존재론과 사회학의 경계를 넘나들고, 체제의 안정과 체제의 불안을 싸안는다. 말하자면 제도는 체제의 안정을 위해 욕망을 억압하고, 그렇게 억압된 욕망은 혁명의 불씨가 된다.
그러므로 어쩌면 꿈은 그 자체 진정한 현실일 수 있는 욕망의 파노라마일지도 모르고, 리얼한 세계보다 더 리얼한 세계일지도 모르고, 따라서 하이퍼리얼한 세계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꿈이 재현해 보이는 서사는 친근하면서 낯선데, 꿈이 현실을 모방 내지 반영한 것이기에 친근하고, 꿈속에서 현실이 재편되고 재구성되기에 낯설다. 그렇게 꿈은 리얼한 세계를 넘어 하이퍼리얼한 세계를 열어놓는다.
다시, 처음의 꿈 이야기로 되돌아가보자. 작가도 밝히고 있듯, 꿈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사실은 작가의 무의식이 육화되고 체화된 것이다. 말하자면 철탑을 오르는 사람들은 어두운, 두려운, 어려운, 껄끄러운 순간들이 실체로 화한 것이다. 이 서사의 주연이랄 수 있는 종이처럼 얇은 몸을 가진 다크서클이 인상적인 여자는 공포가 그리고 유혹이 외화된 것이다.
공포와 유혹? 욕망과 처벌? 그 여자(어머니)는 원래 나의 애인이었다(상상계). 그리고 아버지가 개입되면서 나는 애인을 아버지에게 내어주었다(상징계). 그럼에도 여전히 그 여자는 내 마음속에 애인으로 남아있다(실재계). 여자가 동시에 공포와 유혹을, 욕망과 처벌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