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 두 개의 거짓말과 하나의 손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쪽 벽 전체가 검은 선으로 들끓고 있다. 왼쪽 끝 불꽃에서 시작된 형상들은 머리카락 더미가 되었다가, 가위를 든 인물이 되었다가, 펼쳐진 책에서 잡동사니를 토해내는 풍경과 똬리 튼 나선들을 지나, 오른쪽 끝의 거대한 얼굴에서 멈춘다. 그 맞은편 벽에 작가가 적어둔 문장이 있다. "눈을 깜박일 때마다 다른 세계에 도달한다 (…) 깜박임 사이의 시간들은 꿈처럼 펼쳐지네 / 눈이 닳아 완전히 사라지면 나는 깨어난다."

이 전시는 두 개의 거짓말 위에 서 있다. 첫 번째는 제목이다. 《解輪의 꿈》을 소리 내면 '해윤'이라는 사람 이름이 되고, 영문 부제 'Haeyoon's Alibi'에서 그 이름은 '알리바이', 현장부재증명이 된다. 두 번째는 형식이다. 동양화 두루마리의 가장 점잖은 시간 구조를 빌려, 작가는 자기 얼굴을 가위로 째는 가장 불온한 환영을 운반한다. 제목은 꿈을 핑계 삼아 책임을 면하겠다 선언하고, 형식은 전통을 빌려오는 척하며 전통을 배반한다.

그러나 이 글이 끝내 도달하려는 곳은 거짓말이 아니라 하나의 손이다. 전시 직전까지 작가는 무릎을 꿇고 벽 아래쪽에 몸을 구부려 선을 긋고 있었을 것이다. 바닥엔 양생 비닐이 깔리고 사다리 위엔 붓이 놓여 있었을 것이다. 이 벽화는 먹으로 종이에 그린 것이 아니다. 벽면에 직접 칠한 페인트이며, 전시가 끝나면 흰 페인트에 덮여 영영 사라질 한시적 그림이다. 김은형은 자신의 작업을 "자동기술이자 AI의 빅데이터"라 말한다. 나는 그 등식이 틀렸다고 본다. 그리고 그 틀림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그 무릎 꿇은 손이다.


《해윤(解輪)의 꿈》 전시전경 © 에이치플럭스 갤러리

1. 떨지 않는 선 — 손이 기계를 흉내 내는 자리

가장 먼저 눈이 머무는 곳은 도상이 아니라 선 그 자체다. 김은형의 선은 굵기가 거의 일정하다. 붓으로 그렸음에도 필압의 강약이 죽어 있다. 동양 서화에서 선의 생명은 떨림에 있다. 붓이 눌리고 들리며 만드는 비수肥瘦의 리듬, 그 안에 그은 자의 호흡과 망설임이 기록된다. 그런데 김은형은 그 떨림을 의도적으로 지운다. 매끈하고 균질한, 마치 펜 툴로 뽑아낸 벡터처럼 보이는 검은 윤곽선.

이것이 첫 번째 결정적 감각이다. 그의 선은 손으로 그렸으나 손의 우연을 삭제한 선이다. 기계를 흉내 내는 손. 디지털 드로잉의 균질함을 육체의 노동으로 위조한 선. 우리는 여기서 이미 이 작가의 핵심 전략을 본다. 그는 손과 기계의 경계에서 일부러 줄타기를 한다. 자동기술을 표방하면서, 그 자동성을 손으로 연기한다.

그런데 위조에는 반드시 잔여가 남는다. 벽화 오른쪽 끝, 거대한 얼굴 하나만은 유독 다르다. 다른 형상들이 매끄럽게 흐르는 곡선의 윤곽인 데 반해, 이 얼굴은 큐비즘처럼 면으로 깨져 있다. 부서진 다면체의 뺨, 어긋난 눈, 각진 입. 한 화면 안에서 '흐르는 선'과 '깨진 면'이 충돌한다.

매끈하게 흘러가던 꿈이 이 얼굴에 이르러 갑자기 분절되고 균열한다. 마치 꿈의 끝에서 형상이 더 이상 매끄럽게 미끄러지지 못하고 각지게 부서지는 순간 같다. 깨어남의 직전, 이미지가 해상도를 잃고 깨지는 자리. 떨지 않으려던 선이 끝내 떨림 대신 균열을 택한 곳이다.


2. 비움을 살해하는 그림 — 형식이 먼저 말한다

선이 모여 만드는 전체 인상은 밀도다. 빈 곳이 없다. 형상이 형상의 틈을 메우고, 나선이 나선을 감으며, 작은 웃는 얼굴들이 큰 형상의 주름 사이마다 기생하듯 끼어든다. 여백이 허락되지 않는다. 미술사는 이 충동에 호로르 바쿠이(horror vacui), 비어 있음에 대한 공포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진단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김은형을 동양 회화 전통의 정확한 안티테제로 세우기 때문이다.

동양화에서 여백은 빈 공간이 아니라 기운이 흐르는 통로이며, 그리지 않음으로써 그리는 적극적 사유의 자리다. 그 미학의 본질은 비움이다. 그런데 김은형은 동양화의 시간 형식(두루마리)과 선묘 전통을 가져온 바로 그 자리에서 여백을 학살한다. 호흡할 빈틈 대신 강박적 충만으로 화면을 채운다. 그의 그림에는 산수도 기운생동도 없다. 대신 만화의 문법, 벽화의 밀도, 낙서의 강박이 있다.

따라서 그를 "전통의 현대적 계승자"로 읽는 것은 첫 단추를 잘못 끼우는 일이다. 그는 계승하지 않는다. 전통의 도구를 손에 쥔 채 그 도구가 금기시한 모든 것을 행한다. 비움의 어휘로 채움을 강박하는 것 — 이 형식적 모순이 그의 작업을 떠받치는 첫 긴장이다.


《해윤(解輪)의 꿈》 전시전경 © 에이치플럭스 갤러리

3. 두루마리와 깜박임 — 시간을 위조하다

밀도가 공간의 문제라면, 그다음은 시간이다. 벽화는 정지된 한 장면이 아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르는 횡적 전개, 동양화 두루마리의 시간 구조를 빌렸다. 두루마리는 단일 소실점의 서구 회화와 달리, 보는 이가 화면을 따라 이동하며 시간을 겪게 하는 형식이다. 한 폭 안에 출발과 도착이 공존한다.

김은형은 이 고전적 시간 형식으로 전혀 다른 것을 운반한다. 그의 두루마리가 펼치는 것은 산천의 사계가 아니라 한 번의 깜박임이다. 작가의 텍스트가 이를 명시한다. 눈을 깜박이는 찰나, 의식과 의식 사이의 미세한 틈에서 한 세계가 통째로 펼쳐졌다 사라진다. 왼쪽 끝의 불꽃은 그 세계의 점화이고, 오른쪽 끝의 깨진 얼굴은 "눈이 닳아 완전히 사라지면" 도래하는 깨어남이다. 두루마리 전체가 단 한 번의 눈 깜박임 동안 일어난 일이다.

여기서 알리바이가 형식 차원에서 완성된다. 고전 두루마리는 관객에게 시간을 천천히 음미하라 요구하지만, 김은형의 두루마리는 그 모든 사건이 찰나에 일어났으며 그러므로 실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깜박임 사이의 시간"이라는 알리바이. 그곳의 사건은 깨어 있는 세계의 책임 바깥에 있다.

가장 느린 시간 형식(두루마리)을 빌려 가장 빠른 시간(깜박임)을 그림으로써, 그는 자신이 그린 모든 폭력에 면죄부를 발급한다. 그리고 이 벽화 자체가 전시 후 덮여 사라질 운명이라는 사실이 알리바이를 완성한다 — 증거가 영구히 남는 회화와 달리, 이 그림은 현장에서 지워짐으로써 끝내 '그곳에 없었던 것'이 된다.


4. 이발사의 가위 — 자해가 아니라 편집이다

이제 핵심 도상으로 들어간다. 화면 곳곳에 가위가 있다. 머리카락 더미 속 인물이 제 얼굴을, 제 목을 가위로 자른다. 빗과 잘린 살점이 흩어진다. 이 장면을 자해의 공포로 읽으면 표면에 머무는 것이다.

김은형은 2023년 OCI미술관 개인전에서 이미 '이발사 큐레이터(Tales of the Barber-Curator)'라는 페르소나를 세웠다. 이발사는 자르는 자다. 큐레이터 또한 자르는 자다. 무수한 것 중 일부를 골라내고 나머지를 배제함으로써 의미를 만든다. 이발과 큐레이팅은 같은 동작이다. 둘 다 잉여를 제거하여 형태를 빚는다. 따라서 자기 얼굴을 가위질하는 인물은 희생자가 아니라 자기를 편집하는 작가의 자화상이다. 폭력의 외양을 한 창조 행위, 신체를 매체 삼은 자기 큐레이팅이다.

여기서 손의 운동이 의미를 만든다. 가위가 자르는 궤적과 붓이 선을 긋는 궤적은 같은 손의 동작이다. 자르는 손과 그리는 손이 포개진다. 그런데 펼쳐진 책에서 온갖 도구와 잡동사니가 쏟아지는 또 다른 도상을 보라. 책은 정돈된 지식의 표상이지만, 김은형의 책은 내장을 쏟듯 사물을 게워낸다. 자르고(가위) 쏟아내는(책) 두 동작이 화면을 지배한다. 편집과 분출. 덜어냄과 넘쳐남. 이 모순된 두 손짓의 공존이 그의 화면을 단순한 증식이 아니라 '통제와 폭주가 동시에 일어나는 전장'으로 만든다.


《해윤(解輪)의 꿈》 전시전경 © 에이치플럭스 갤러리

5. 자동기술이라는 주장, 그리고 그 주장의 배반

이제 작가가 내세운 가장 큰 명제와 정면으로 마주한다. 김은형은 ‘뇌행성(Designing Egos)’ 연작 — '생각하는 모든 것을 그려내겠다'며 뇌 주름 사이를 빼곡한 이미지로 채운 작업을 두고 작가노트에 적었다. "자동기술법을 활용한 이러한 작업방식은 AI의 빅데이터, 알고리즘, 딥러닝과 닮은 부분을 가지고 있다. (…) 한 개인의 상상력을 여과 없이 무제한으로 쏟아낸다는 점에서 빅데이터의 성질이 나타난다." 실제로 그는 2023년 이후 ChatGPT와 이미지 생성 AI를 작업에 끌어들였다.

이 등식  '초현실주의 자동기술 = AI 생성'은 매혹적이고, 지금 국제 미술담론에서도 유행하는 비유다. 둘은 분명 닮았다. 브르통이 "이성의 통제가 부재하고 미학적·도덕적 관심에서 면제된" 창작을 자동기술로 정의했을 때, 그것은 놀랍도록 오늘날의 생성 모델을 예언한 듯 들린다. 초현실주의자들이 '무의식'이라 부른 것은 오늘날 AI의 '잠재공간'과 구조적으로 포개진다. 둘 다 통제되지 않은 곳에서 이미지를 길어 올린다.

그런데 미술이론이 거듭 지적해온 핵심은, 초현실주의 자동기술의 본질이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에 있다는 것이다. 자동기술이 의미를 갖는 이유는 한 인간의 손이, 그 사람의 억압과 기억과 떨림을 통과시키며 종이 위를 미끄러졌기 때문이다. 자동기술의 '자동'은 기계의 자동이 아니라 신체의 자동이다. 반면 AI의 생성은 신체가 없다. 수십억 장을 통계적으로 보간할 뿐, 떨지 않고 억압하지 않으며 무엇도 잃은 적이 없다.

김은형의 진정한 가치는 이 둘을 동일시하는 데 있지 않다. 정반대다. 그는 AI가 뱉어낸 환영을 다시 손으로 옮겨 그림으로써, 자신이 선언한 동일시를 스스로 배반한다. 그 증거가 1장에서 본 선이다. 그는 선의 떨림을 지워 기계를 흉내 내지만, 그 흉내를 위해 무릎을 꿇고 사다리에 올라 팔이 닿는 만큼씩 몸으로 벽을 긋는다.

기계의 균질함을 얻기 위해 그는 기계가 결코 치르지 않는 육체의 시간과 피로를 치른다. 결과물은 기계를 닮았으나, 그 결과에 이르는 과정은 철저히 신체적이다. 그리고 오른쪽 끝 얼굴의 큐비즘적 균열이 그 신체의 흔적을 끝내 누설한다 — 아무리 매끄럽게 위조해도 손은 어느 지점에서 반드시 깨진다. 작가는 자동기술을 표방하지만, 그의 손은 자동이기를 거부한다. 이 표방과 실천의 어긋남이야말로 그를 동시대 AI 미술의 흔한 자동성 예찬과 결정적으로 가르는 지점이다.


《해윤(解輪)의 꿈》 전시전경 © 에이치플럭스 갤러리

6. 구겨진 화면 — 알리바이의 물질

이 손의 잔여를 가장 영리하게 사물화한 것이 액자 속에 구겨 넣은 종이 드로잉이다. 빼곡한 도상으로 채운 한 장의 종이를 펼쳐 보여주지 않고 구겨서 봉인했다. 주름의 골과 마루를 따라 이미지는 드러났다 그늘로 사라진다. 관객은 전체를 결코 한눈에 읽을 수 없다.

이것은 ‘뇌행성’의 평면적 야심 -머릿속을 남김없이 그리겠다는- 이 부딪힌 한계의 해법이다. 머릿속은 2차원에 다 담기지 않는다. 그래서 종이를 구긴다. 평면이 감당 못 하는 과잉의 밀도를 3차원 주름이라는 부피로 번역한다. 구김은 좌절이 아니라 차원을 한 단계 올리는 전략이다.

동시에 구김은 알리바이의 물질적 구현이다. 펼치면 다 읽힐 그림을 일부러 못 읽게 만든 행위. 보여주면서 감추고, 그리면서 봉한다. 관객이 무엇을 보든 그것은 주름이 만든 우연이지 작가가 확정한 의미가 아니라는 변명. 그리고 이 봉인은 디지털의 무한 복제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대 명제다. AI 이미지는 무한히 펼쳐지고 복제되지만, 이 구겨진 종이는 단 한 번 구겨진 그 형태로 유일하며, 다시 펼치면 영영 같은 주름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손의 잔여가 회복 불가능한 물질로 굳은 것이다.


《해윤(解輪)의 꿈》 전시전경 © 에이치플럭스 갤러리

결론 — 미끄러짐을 설계하는 자

김은형의 작업이 낯선 이유는 난해해서가 아니다. 정반대다. 도상은 만화처럼 즉각적이고, 선은 누구나 알아보며, 형식은 익숙한 두루마리다. 모든 재료가 점잖고 친숙하다. 그 점잖은 재료로 그가 하는 일이 자기 얼굴을 자르고, 책을 게워내게 하고, 머릿속을 구겨 봉인하고, 기계의 무한을 손의 유한으로 끌어내리는 것일 뿐이다.

이 작업이 위험한 이유는 의미를 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주는 척하며 매번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가위는 자해인가 창조인가. 선은 기계인가 손인가. 자동기술은 무의식의 분출인가 정교한 위조인가. 그는 어느 쪽도 확정해 주지 않는다. 모든 해석의 현장에서 알리바이를 댄다 — 그곳에 없었다고, 그것은 깜박임 사이의 꿈이었다고. 전시가 끝나면 벽화는 흰 페인트에 덮여 사라지고, 정말로 아무 증거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해윤 解輪, 윤회를 푼다는 제목은 정확하다. 윤회의 바퀴는 의미가 한 방향으로 굴러가 정착하고 다시 태어나는 운동이다. 김은형은 그 바퀴를 푼다. 의미가 굴러가 자리 잡지 못하게 풀어 헤친다. 관객은 그의 화면 앞에서 의미를 손에 쥐었다 믿는 순간 그것이 빠져나가는 경험을 반복한다.

그러나 이 미끄러짐은 우연이 아니다. 정교하게 설계된 것이다. 자동기술을 표방하면서 손으로 통제하고, 떨림을 지워 기계를 흉내 내면서 균열로 그 흉내를 누설하고, 비움의 어휘로 채움을 강박하는 이 모든 모순은 작가가 의식적으로 배치한 덫이다. 가장 점잖은 재료로 가장 빠져나가기 어려운 덫을 놓는 것. 의미가 끝없이 미끄러지도록 설계하는 것. 그것이 이 전시가 우리를 가두는 방식이며, AI가 모든 것을 무한히 생성하는 시대에 무릎 꿇은 한 인간의 손이 여전히 할 수 있는 가장 단단한 저항의 형식이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