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2025년 시점에 재구성한 이정우의 포트폴리오에서 가장 눈에 띄게 반복되는 것은 ‘~하지 않는다’라는 표현이다. 그는 “보정하거나 최적화하지 않는다”고,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온전하게 복원되었는가”가 아니라고 일관되게 강조한다. 그 대신 보존되는 것은 오류와 오작동들이다. 이정우가 활용해 온 다종 다기한 매체는 이 지점에서 곱씹을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드론(〈레지스탄츠〉)과 모션캡처(〈덤 더미 덤덤〉), 포토그래메트리(photogrammetry) (〈To Be Determined〉)와 AR(〈Plant Apples and Get Avocados〉, 2024), 게임엔진(〈Because:Surrounded by Three Dimensions〉, 2024)과 생성형 AI(〈씌여진 영화, 씌여질 역사〉)에 이르는 일련의 기술들을 떠올려 보자. 우리가 살펴본 논의의 연장선에서, 이 다양한 장치들은 하나같이 ‘오작동’한다.
하지만 이러한 오류와 실패, 오작동은 처음부터 그와 함께 해왔던 것이기도 하다. 물론 〈레지스탄츠〉 라는 제목이 시사하듯, 한때 이정우는 드론을 비롯한 장치들의 오작동을 자신의 의도에 반하는 기계의 ‘저항’으로 간주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이러한 자신의 독해가 ‘오독’이라는 생각에 기운다. 문제의 ‘고장’은 기계의 ‘저항’이라기보다 드론에 내장된 프로토콜이 인간의 명령과 경합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재규정된다.
이정우에게 이는 AI가 만들어내는 ‘환각’에도 적용되는 논리로서, 이들은 더 이상 ‘오작동’이 아니라 자체에 내장된 알고리즘을 준수한 ‘작동’의 산물로 간주된다. 2019년 전시의 제목이었던 《올욲억-거꾸로거꾸로 》 가 시사했던 것처럼 거꾸로 쓴 글자나 백워드 매스킹으로 변조된 음성들은 ‘작동’과 ‘오작동’의 구분을 자명한 것으로 가시화하기도 한다. 하지만 〈무제-완벽한 순간들〉이 웅변하듯, 가속되거나 감속된 시간의 효과를 사람들이 분별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되돌릴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정상적인 작동과 오작동 사이의 구분이 의외로 자명하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이미 배태한다.
그의 최근 작업들은 이렇게 새로운 독해를 명시적으로 전경화한다. 《Loops of Algorithmic Karma》(2024)는 〈To Be Determined〉, 〈Because: Surrounded by Three Dimensions〉, 〈Plant Apples and Get Avocados〉 의 세 작업으로 구성된다. 〈To Be Determined〉는 철거 압박에 놓인 베를린 평화의 소녀상을 매일 직접 방문해 기록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위안부 피해자들의 죽음과 고통을 기억하고 애도하려는 실천을 구성한다.
하지만 포토그래메트리가 만들어낸 파편화된 3D 메시는 결코 완벽히 복원되지 않는다. 또 〈Plant Apples and Get Avocados〉 는 말 그대로 ‘사과를 심었는데 아보카도를 얻는다’고 말한다. AR 기술의 공간 좌표 추적 알고리즘을 통해 가상의 기념비를 호출하도록 설계됐지만, 동일한 위치와 동작을 반복해도 출력은 매번 달라진다. 특정 요소가 나타나지 않거나 무관한 오브젝트로 대체되는 것이다. ‘콩 심은데 콩 난다’라는 속담을 떠올릴 때 이들은 명백한 ‘오작동’의 사례일 뿐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들을 보정하지 않음으로써, AR 추적 알고리즘의 한계를 내재적인 것으로 가시화한다.
‘사과를 심었는데 아보카도를 얻는’ 가장 최근의 사례는 〈씌여진 영화, 씌여질 역사〉다. AI에게 1940년대 중후반 한국 남성의 얼굴을 요청해도 그것은 서양인의 형상을 출력하고, 발포 유예를 명령하는 자신의 프롬프트를 지속적으로 거부한다. 악당은 일본인이 아니라 독일군이 기본값이다. 이정우는 이렇게 ‘편향’을 보이는 인공지능이나 엔진의 한계에 대한 명시적 비판을 제기하지 않는다. 가령 케이트 크로포드가 『AI 지도책』에서 수행한 것처럼 AI 기술의 배후나 소유 관계를 폭로하지도, 열악한 노동 조건과 환경 파괴 행위의 개선을 촉구하지도 않는다.9
대신 이정우는 “조건이 주어지면, 시스템은 그 조건 안에서 가장 ‘적합한’ 결과를 도출할 뿐”이라고 강조하고, “다시 말하자면 지금의 작업에는 더 이상 정상과 비정상, 또는 오작동과 정상 작동의 구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을 긋는다. 그에 따르면 “이것이 지시하는 것은 시스템 자체가 아니라, 그 시스템을 작동시키는 지금의 중력이다.” 이러한 결론은 그의 작업이 갖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간주될 수도 있지 않을까? “정상과 비정상” “오작동과 정상 작동” 사이에 아무런 구분이 없다는 말은 주어진 현실을 그저 받아들이라는 일종의 투항 권유가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흥미로운 건 〈Because: Surrounded by Three Dimensions〉 이다. 임진왜란 시기의 해전을 다룬 한국 상업영화의 에셋을 게임엔진 시뮬레이션에 중첩시킴으로써, 그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조선, 혹은 한국의 조건이 “피할 수 없는 지정학적 운명”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인위적으로 파라미터를 초과하는 값을 입력해 파도가 비틀리고 중력이 역전되지만, 이러한 오작동은 통계와 시뮬레이션이라는 기술 언어의 구성물로 드러난다.
이는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일까? 극복하지 못할 알고리즘이란 없는 것일까? 비가역성의 한계 사례인 죽음조차 가역적인 현상이 된 세상이라는 의미에서? 그렇다면 작가는 왜 ‘케첩’을 먹지 못했던 것일까? 국가의 지정학적 위치와 오이나 복숭아를 못 먹는 과민반응 중 ‘운명’에 가까운, 보다 강력한 알고리즘은 어떤 것일까?
이에 못지 않게 흥미로운 또 다른 작품은 생성형 AI를 활용한 최신작 〈씌여진 영화, 씌여질 역사〉다. 해방 직후에 만들어진 「자유만세」는 ‘친일’경력을 가진 감독과 주연을 맡았던 배우의 월북 등을 이유로 일련의 검열과 재편집을 받았고, 결국 누더기가 된 채 50분 분량만 살아 남았다. 여기에 AI라는 산소 호흡기를 대면서, 작가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고 말하는 생성 모델의 자유와, 해방 직후 이 영화가 호출 했던 자유가 서로 어떤 방식으로 어긋나고 겹치는지, 그리고 배우의 월북으로 비워진 자리가 오늘날에는 자동 검열과 데이터 편향에 의해 또 다른 방식으로 지워지는 과정을 따라간다. 〈씌여진 영화, 씌여질 역사〉는 이렇게 두 시기의 ‘자유’를 생성과 재구성의 과정 위에 겹쳐 놓으며, 과거의 검열과 오늘의 편향이 현재의 기술과 매체 조건 속에서 어떻게 반복되고 변형되는지를 드러낸다.
그리고 한 장면에서 관객은 “그 어떤 이미지도 잠재 공간의 중력을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라는 문장을 한국어와 영어로 듣게 된다. 반으로 나뉜 스크린 각각에는 세 명의 등장인물이 보이는데, 이들은 분명한 공통점과 미세한 차이점을 나눠 갖는다. 먼저 위의 문장을 말하는 남성은 양자 모두 상처를 입은 듯 왼팔을 감싸 쥔 채 등 뒤의 간호사에게 안겨 위태롭게 서 있다. 이들 뒤로 독일군의 것으로 보이는 군복을 입은 장교가 서 있고, 이들 셋은 모두 숲속에 있다. 이러한 기본 구도를 짚고 나면 차이점이 선명해진다.
먼저 왼쪽 화면에서 다친 남성과 간호사는 백인인데, 우측 화면의 둘은 동양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좌측 화면의 간호사는 여성이지만 우측 화면의 간호사는 여성 간호사 복장을 착용한 남성의 얼굴을 하고 있다. 1940년대 중반 한국에서 만들어진 영화에 ‘트랜스젠더’ 캐릭터가 어울린다고 보기는 일반적으로 어려울 것이다. 이런 점에서 흥미로운 건 양자가 공유하는 독일군 장교다.
그는 양쪽 화면 모두에서 백인으로 등장하며, 세 명의 등장인물 가운데 시각적으로 유일하게 일관성을 유지한다. 이정우가 환기했듯, 이는 2025년 중반과 하반기 시점 그가 활용할 수 있었던 생성 인공지능의 데이터셋이 갖는 우스꽝스런 결과물이자 내재적인 한계의 산물이다. 2차 세계대전이 결국 독일군에 대한 미군의 승리로 기억되는 이유가, 그만큼 많은 영화들이 전자의 선악구도를 확장 세공해 온 역사의 산물이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6. 이 모든 건 ‘중력’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을까? 시스템의 중력을 가시화한다는 것은 그 중력 자체의 변화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일까? 아니면 ‘중력’이라는 개념 자체가 지구와 인류에게 갖는 무게처럼, 그것은 일종의 ‘운명’처럼 주어지는 것일까? 앞에서 환기한 이전 글에서, 나는 이정우의 작업에서 역사란 “비극과 희극 사이에 어정쩡하게 끼어 있다”고 썼다. 이 ‘어정쩡함’은 작업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정직함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헤겔을 비틀어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른 한 번은 희극으로”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역사적 반복에서 행위의 가능성을 묻는 질문이기도 했다. 이정우의 “중력”은 이 질문을 닫을까,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열까? 중력의 알고리즘도 가역적일까?
『철학적 탐구』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오직 한 사람이 하나의 규칙을 따른 경우가 오직 한 번만 있었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10고 쓰고, “보고가 이루어진 경우, 명령이 부여되거나 이해된 경우 등이 오직 한 번만 있었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11고 덧붙인다. 그에 따르면 “규칙을 따른다, 보고를 한다, 명령을 내린다, 체스 게임을 한다는 것은 관습들(용법들, 제도들)이다.”12
그에게 알고리즘이란 변화의 가능성에 노출된 ‘관습’인 것이다. 관련된 논의의 연장선에서 그는 “기계는…그 작동 방식을 이미 그 안에 담고 있는 듯이 보인다”고, “우리가 기계를 안다면 나머지 모든 것-즉 기계가 하게 될 움직임-은 이미 완전하게 결정되어 보인다는 것처럼 보인다”고도 쓴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마치 기계의 이 부분들은 이런 식으로만 움직일 수 있다는 듯이, 그 외의 다른 일은 할 수 없다는 듯이 이야기한다. 어떻게 그런가? – 우리는 그것들이 구부러지고, 망가지고, 녹을 수 있다는 등의 가능성을 잊고 있는가? 그렇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그런 가능성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13
이정우에게 알고리즘이란 과연 어느 정도까지 “구부러지고, 망가지고, 녹을 수 있”는 것일까? 단단히 언 알고리즘도 증발하거나, 아이스크림처럼 녹을 수 있을까? 이 기이한 질문에 답해야 하는 건 그만이 아닐 것이라는 의미에서, 그가 세공해 온 작업의 과거와 현재, 미래는 섬세한 눈과 귀를 가진 많은 이들의 주목을 요한다. 클레의 말대로 진정 예술이 “보이게 만드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보이지 않던 알고리즘을 보이게 만든다는 건, 가령 AI가 다양한 영역에서 ‘환각’으로 환원될 수 없는 방식으로 꾸준히 웅변하듯 “기계가 아주 다르게도 움직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는 근원적인 의미에서 말이다.
1. 개별적 의도와는 무관하게, 적대적 관계를 매개로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고 보존한다는 이 역설은 여러 학문적 지평과 역사 속에서 발견된다. 이러한 현상의 환기는 종종 모든 비판과 저항을 향한 냉소주의를 강화하기도 하지만, 적대적 운동마저 포섭하는 예속의 권력을 직시하는 일이야말로 근본적 사유와 비판의 토대일 것이다. Lim Jie-Hyun, “The Antagonistic Complicity of Nationalisms: On Nationalist Phenomenology in East Asian History Textbooks,” in Contested Views of a Common Past: Revisions of History in Contemporary East Asia, ed. Steffi Richter (Frankfurt: Campus Verlag, 2008), 205–222; Michael Burawoy, “For Public Sociology,” American Sociological Review, Vol.70 (Feb. 2005), 4–28; Peter F. Drucker, “Science and Industry, Challenges of Antagonistic Interdependence,” ScienceNew Series, Vol.204, No.4395 (May 25, 1979), 806-810.
2. Paul Virilio, Polar Inertia (London: SAGE, 1999) 참고.
3. 하르트무트 로자,『소외와 가속: 후기 근대 시간성 비판』, 김태희 옮김(서울: 앨피, 2020), 56.
4. 김애란, 「김애란 작가에게 묻다: 문학은 왜 존재해야 하는가?」, 손석희와의 인터뷰, MBC 〈손석희의 질문들〉, 2026년 4월 15일, https://www.youtube.com/watch?v=GVyMqldFQU4. 김지환,「AI에게는 없는 ‘망설임’」, 『경향신문』, 2026년 4월 20일 자 참고.
5. Lorraine Daston, Rules: A Short History of What We Live By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22), 85.
6. Gregory J. Chaitin, Conversations with a Mathematician: Math, Art, Science, and the Limits of Reason(London: Springer-Verlag, 2002), 44.
7. Rules, 8.
8. 같은 책, 271.
9. Kate Crawford, Atlas of AI: Power, Politics, and the Planetary Costs of Artificial Intelligence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21). 국역: 케이트 크로퍼드,『AI 지도책: 세계의 부와 권력을 재편하는 인공지능의 실체』, 노승영 옮김(서울: 소소의책, 2022).
10. Ludwig Wittgenstei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rev. 4th ed., trans. G.E.M. Anscombe, P. M. S. Hacker, and Joachim Schulte (Malden, MA: Wiley-Blackwell, 2009), 87(§199). Emphasis original. 국역: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이승종 옮김 (아카넷:파주 2016), 242.
11. 같은 책, 84(§193). Emphasis original. 국역: 같은 책, 233.
12. 위와 같음. 국역: 같은 책, 234.
13. 위와 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