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llation view of 《Korea Artist Prize 2026》 (MMCA, 2026). Photo: Hong Cheol-ki. © MMCA

오직 한 사람이 하나의 규칙을 따른 경우가
오직 한 번만 있었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예술은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게 만든다.
- 파울 클레

역사와 기술, 예술과 매체는 서로 다른 속도로 조우하고 엇갈린다. 인간은 대개 ‘도구’와 ‘연습’의 이름으로 이들 사이의 간극을 좁히려 애쓰며, 종종 평행과 조화를 이루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가 언제나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어느 하나가 너무 빠르거나 뒤처지기도 하고, 충돌과 고장, 또는 노화를 통해 따로 또 같이 오작동하기 때문이다. 대개 고장과 오류는 ‘업데이트’와 ‘가속’, 혹은 ‘위기’의 이름 아래 신속한 복원과 제거의 대상으로 축소되고, ‘성숙’과 ‘진보’의 역사는 이러한 과거의 오작동과 잔해의 흔적을 근원적으로 성찰할 시간과 노력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든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느림’과 ‘감속’을 외치며 세태를 비판하고 거스르려는 이들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반대급부의 운동은 좀처럼 ‘적대적 의존’의 (이해)관계를 벗어나기 어렵다.1 ‘극단적 가속은 감속과 정지의 경향을 강화한다’는 점에서 비릴리오가 “대극적 관성(l’inertie polaire)”2이라 명명한 것은, 로자가 적절히 덧붙였듯 궁극적으로 “가속에 맞서는 경향이 아니라 가속의 내재적 특질”이기 때문이다.3

이와는 다른 얘기처럼 보이지만, 생성형 AI의 환각이나 부정확성에 대한 비판들 역시 ‘그러므로 당신의 데이터를 더 많이 (공짜로) 내놓으라’는 요구의 폐쇄회로를 탈출하지 못한다. 이런 차원에서 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교차와 갱신의 궤적 속에서 (비)가시화되는 기술과 매체, 역사의 내재적 한계와 패턴, 즉 서로 다른 작동 방식(modus operandi)과 조건들에 주목하고 그 한계의 함의와 가능성을 곱씹는 일일 것이다. 이정우가 독일과 한국, 동시대 미술과 영화의 영역을 오가며 지난 10여 년 넘게 묵묵히 세공해 온 작업은 바로 이 독특한 기술미학적 시도의 영토를 구성한다.

1. 이번 전시를 앞두고 나눈 몇 번의 대화에서 작가는, 2025년 중반까지만 해도 생성 AI를 활용해 한 인물을 방에 넣는데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 사이 문제가 해결됐다고 말했다. 인물을 방에 넣는 건 식은 죽 먹기가 됐고 속도도 비교할 수 없이 빨라졌다. 그가 새로 마주한 문제는 이러한 이전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됐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프롬프트를 구부려 엉뚱한 결과물을 내놓던 AI는 이제 그 자리에 없다.

최신작인 〈씌여진 영화, 씌여질 역사〉(2025)를 위해 작가는 반복된 재편집과 검열을 통해 50분 분량만 남은 영화 「자유만세」(1946)의 나머지 장면을 재구성하라는 명령을 생성 AI에게 내렸는데,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동양 남자가 아닌 서양 남성을 출력하고, 피 묻은 한복을 입은 여성의 프롬프트를 케첩으로 대체하던 ‘답답한’ AI는 사라졌다.

최근의 한 방송에서 소설가인 김애란 작가가 인간에게(만) 고유한 특성일지 모른다고 시사하기도 했던 ‘망설임’이 필요하다는 명령을 무시하고, 등장 인물들로 하여금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기게만 했던 ‘고집 센’ AI도 마찬가지다.4 사실 이는 기술적 ‘발전’의 이름으로 충분히 기술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성숙’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 이정우의 작업들은 그러한 ‘완성’과 ‘성숙’의 단계 이전, 혹은 그 경계를 부유하는 사례들을 거의 강박적으로 탐색한다.

이러한 테크놀로지의 이전 버전, 혹은 과거는 ‘극복’된 것일까? 이 단계와 사례들로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돌아갈 필요 자체가 없어졌다는 뜻일까? 혹시 그러한 과거의 ‘오류’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현재와 미래로 ‘봉합’될 수 없는 이질적 가능성들이 아니었을까? 이를 통해 현재와 미래의 폐색 상태는 다시금 개방될 수도 있지 않을까? ‘노스탤지어’의 양식을 통하지 않고서는 다시 되돌아가기 어렵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이 ‘오류’들이 제기하는 것을 ‘(비)가역성 ((ir)reversibility)’의 문제라 규정해 보자.

사실 2019년에 열린 그의 개인전을 위해 쓴 글에서 나는 이미 그의 작업이 “정치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비가역적인 것이 가역적인 것이 되었을 때 벌어지는 문제를 가시화하려는 시도”라고 쓴 바 있다. 이러한 (비)가역성은 이정우의 초중기 작업을 특징짓는 핵심적인 문제들 중 하나다. 가령 〈무제-완벽한 순간들〉(2018)과 〈레지스탄츠(Die Resistenz)〉(2019)는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는 시도’의 두 가지 방식을 보여준다.

전자는 네 개의 아날로그 시계를 디지털 이미지로 변환한 후 12시간마다 100%씩 가속, 또는 감속시킨 작업으로, 대부분의 관객들은 시각적으로 시간이 전진하는 것인지 후진하는 것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흥미롭게도 이 단순한 감속과 가속의 과정에서 약 40여 개의 비대칭 이미지들이 발견됐는데, 당시 작가는 이 ‘버그’를 전시에 포함시킬 것인지 말지를 두고 마지막까지 고심했다.

〈레지스탄츠〉는 ‘정치적 시계’를 되돌리려는 운동의 핵심 인물(박정희)에 대한 미완성 기념비를 드론으로 담은 작업으로, 이정우는 영상을 통해 그를 다시 장사 지내려 했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자체에 내장된 센서 때문에 드론이 추락하고 만다. 철재 구조물로 둘러싸인 실내 환경 속에서 GPS 신호가 오류를 일으키고 충돌 방지 센서가 교란되었던 것이다.

시계라는 비교적 단순한 장치의 메커니즘을 직간접적으로 다룬 이 두 작업은, 이정우의 이후 작업에서 꾸준히 회귀하며 변주될 세 가지 특징을 맹아적으로 담고 있다. 그것은 ‘(비)가역성’, ‘오작동’(혹은 버그), 그리고 ‘알고리즘’이다. ‘시계 방향으로(clockwise)’라는 표현이 환기하듯, 시계 장치의 알고리즘이 일방향성(one-directionality)을 전제한다는 사실은 지극히 자명하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는 시도’가 기계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비정상’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건 이 때문이다. 하지만 엄격히 말해 이는 시계의 메커니즘이라기보다는 시간의 특성에 가깝다. 영화 「백 투 더 퓨처」 시리즈에 나왔던 것처럼 우리를 어린 시절로 되돌아갈 수 있게 해줄 ‘타임머신’은 여전히 없지만, 시계는 거꾸로 돌릴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를 웅변한다.

2. 이러한 맹아적 특성들 자체는 대체 어디에서 발원한 것일까? 이 지점에서 알고리즘에 대한 간략한 규정이 필요해 보인다. 사실 ‘알고리즘(algorithm)’이라는 단어는 페르시아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였던 무함마드 이븐-무사알-콰리즈미(약 780년경-약 850년경)의 이름을 라틴어로 표기한 것이다. 인도 숫자를 활용한 계산에 대한 그의 저술은 12세기에 라틴어로 번역됐는데, 이 판본은 “알고리즈미(알-콰리즈미가 훗날 이렇게 불렸다)가 말했다 (Dixit Algorizmi)”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5

“알고리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알고리즘을 프로그래밍해야 합니다. 제 생각에 다른 방법은 없어요”라는 수학자 체이틴의 말이 환기하듯6, 알고리즘은 이런 점에서 여전히 ‘컴퓨터’나 ‘인공지능’같은 것과 배타적으로 연동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과학사가인 대스턴은 이를 “기계도 실행할 수 있을 정도로 작고 명료한 단계들로 세분화된 지침”으로 간명하면서도 폭넓게 재규정한다.7

이때 알고리즘은 수학 공식과 음식 조리법을 포함하는 일련의 절차와 기법, 관습을 가리키는 용어로 재정위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알고리즘은 맥락을 무시함으로써 맥락으로부터 탈출한다”는 점이다.8 이러한 맥락의 무시는 알고리즘의 한계이지만, 적절히 추출되면 특정 맥락을 넘어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될 수 있다는 강점이 되기도 한다. 우리의 논의에 중요한 것은, 이렇게 특정한 작동 방식이 알고리즘으로 가시화될 때 종종 그 순서를 거꾸로 되돌리거나 재배치할 수 있게 된다는 가능성이다.

이러한 감각적 사유의 기점에 있는 것은 그의 실질적인 첫 번째 작업인 〈My First Hamburger〉 (2014)이다. 이 작업은 카메라 앞에 앉아 햄버거를 먹는 작가의 모습을 담담히 담고 끝나는데, 이는 요르겐 레스의 영화 「미국의 66가지 풍경」(66 Scenes From America, 1982) 속에 등장해 약 4분간 케첩을 뿌린 햄버거를 먹는 앤디 워홀의 평범한 행위를 반복하려는 시도다.

기계 장치나 정치적 역사로서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는 이후의 시도에 비하면 소박하지만, ‘햄버거를 먹는다’는 단순한 선행 ‘알고리즘’을 ‘반복’할 수 있다는 인식은 중요하다. 이 반복은 이 첫 작업에서부터 실패하는데, 이는 작가 자신의 케첩 공포증 때문이었다. 이를 우회하기 위해 고추장으로 교체한 케첩을 포함해 영상의 모든 요소를 대체물로 치환했음에도 실패한 것인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요소들의 ‘치환’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알고리즘’의 현존과 이에 대한 인식을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맥락’으로부터 알고리즘이 유지하는 상대적 독립성이야말로 요소들의 대체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한때 이 작업은 ‘허구’와 ‘시뮬레이션’이라는 시각에서 해석되기도 했고, 동시대 미술 역사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뒤늦은 ‘전유(appropriation)’의 사례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워홀이라는 죽은 예술가의 비교적 단순한 행위를 신체로 반복하려는 시도가 어이없게 실패로 끝남으로써, 이 작업은 위에서 환기한 ‘(비)가역성’과 ‘오작동,’ ‘알고리즘’을 원형적으로 구현하고 있었다.

3. 이러한 이해는 이정우의 작업 전체를 다종다기한 알고리즘들과의 지난한 놀이 혹은 변주, 씨름과 투쟁으로 규정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레지스탄츠〉 는 ‘정치적 역사의 시계’에 내장된 특정 알고리즘을 복원하려는 시도에 맞선 작가의 의도가, 드론에 내장된 안전 알고리즘에 의해 좌절되는 것으로 끝난다. 작가의 의도를 중심에 놓는다는 의미에서 후자가 일종의 ‘버그’로 규정되었다면, 《프로젝트 해시태그 2020》(2020) 전시는 이를 현실 속에서 (오)작동하는 시스템의 차원으로 확장한다.

여기서 강남은 토지 수용이나 용적률 규제, 개발 이익 배분의 특정 논리와 같은 도시 개발 알고리즘의 산물로 파악되는데, 전작에서처럼 드론을 활용한 〈오르고 또 오르면〉(2020) 역시 일종의 실패로 끝난다. 당시 제대로 착공조차 되지 않았던 한 대기업의 신사옥이 완공될 것을 가정해 그가 띄운 드론은, 제도적인 항공 촬영 고도 제한과 근처의 발전 시설에서 나오는 전자파의 방해로 기대했던 고도에 오르지 못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작업이 제기한 질문(“105층, 569미터의 시점에서 무엇이 확보되는가”)이 신사옥의 완공을 ‘알고리즘적으로 선취한다’는 점이다.

관건은 해당 기업의 종류나 건물의 건축적 특성과 같은 ‘맥락’이라기보다, ‘569미터’ 높이의 ‘105층’이라는 추상적 특성인 것이다. 물론 여기서도 ‘실패’의 반복이나 ‘강남’이 체현하는 자본주의의 일그러진 풍경에 주목할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인상적인 것은 이러한 특성이 관습적인 방식의 ‘비판’이 아닌, 서로 다른 알고리즘의 예기치 않은 충돌을 통해 포착된다는 점이다. 강남을 가로지르는 시내버스에 퍼포머들을 가이드처럼 태워 함께 탄 관람객들에게 설명을 제공했던 〈강남버스〉(2020) 역시, 부촌과 재개발 구역은 물론 철거를 앞둔 판자촌의 굴곡진 대비를 환기한다.

하지만 이 참여형 투어 작품을 그 중심에서 규정하는 것 은 ‘버스 노선’과 ‘관광 버스 투어’라는 서로 다른 알고리즘의 교차라는 점을 놓쳐선 안된다. 〈Win, Lose or Draw: The Drawing Competition〉(2020) 또한 미대 입시의 석고 소묘 시험이라는 평가 알고리즘을 미술관이라는 제도 공간으로 이식함으로써, 두 제도의 알고리즘 충돌을 가시화하는 작업이다. 물론 이러한 독해는 작업의 ‘방법론적’인 차원에만 주목한다는 의구심을 동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의심은 ‘강남’이라는 대상에 대한 이 작업들의 비판적 환기 자체가 근원적으로 관습적인, 익숙한 것이라는 맹점에서 배태된 것일지도 모른다.

4. 이는 이정우가 죽음과 애도, 기억과 정치의 문제를 꾸준히 세공해 왔다는 사실을 새로운 시각에서 읽을 수 있게 해준다. 가령 〈승선하지 않았다〉(2021)의 세월호 참사와 〈덤 더미 덤 덤〉(2023/2026)의 이태원 참사, 그리고 최근작인 〈To Be Determined〉(2024)가 씨름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떠올려 보라. 이른바 ‘역사적 트라우마’에 해당하는 이 독특한 계열의 기점에 놓이는 작업은 518 광주를 다룬 〈Another Left〉(2019)다.

이 작업의 내용과 알고리즘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1980년 광주의 죽음과 숭고한 투쟁을 다룬 영화 「택시운전사」(2017)의 중요한 장면을 둘로 나눠 순방향과 역방향으로 병치시킨 것이 전부다. 중요한 것은 해당 장면이 주인공인 송강호가 탄 택시를 보호하기 위해, 광주의 택시 기사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후진으로 기어를 바꾸고, 광주의 택시 기사들이 집단으로 희생하는 장면이 바로 영화의 클라이맥스라는 사실이다.

이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허구적인 장면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를 앞뒤로 돌려 재생함으로써 작가는 죽음을 향한 선택의 순간과 그것의 불가역성을 동시에 가시화한다. 영화적 알고리즘이 허용하는 허구적 가역성과 역사적 시간의 불가역성을 기어 변속 이미지 안에 압축함으로써, 작가는 둘 사이의 긴장과 비대칭성을 역설적으로 도드라지게 만든다.

이렇게 근원적인 차원에서 결코 ‘되돌릴 수 없는 것’으로 정의되는 죽음과 시간은 그의 작업에서 종종 되돌릴 수 있는 것처럼 제시되기도 한다. 이는 ‘거꾸로’라는 부사를 거꾸로 뒤집은 언어유희로, 2019년 전시의 제목이었던 《올욲억-거꾸로거꾸로》가 시사하듯, 백워드 매스킹(backward masking)이나 필름을 거꾸로 돌리는 식의 기술적인 차원뿐 아니라, 한국의 ‘박사모’나 ‘MAGA(Make America Great Again)’로 대표되는 과거 지향적인 정치를 통해 전지구적으로 구현 가능해진 가능성이기도 하다.

물론 죽음은 이러한 가역성의 극한에 놓이지만, 이를 되돌릴 수 있게 될 때 (시체를) ‘둘 곳이 없다’는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가장 ‘난처(難處)’해지는 건 무덤일 것이다. 2019년 전시의 표제작에 가까운 〈대난굴시대〉 (2019)의 중핵에 무덤이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 추정되는 인물은 “나의 무덤은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라는 자막으로 자신의 처지를 기술하지만, 오히려 정체를 알 수 없는 들짐승은 자기가 죽을 자리를 잘 찾은 것으로 묘사된다.

전시 제목이기도 한 3부 〈올욲억-거꾸로거꾸로〉에서 재구성된 영화들 대부분이 굴에 들어가거나 무덤을 파헤치고 도굴하는 내용들이고, 2부에 등장한 두 명의 배우가 ‘세월호’ 희생자와 덕혜옹주였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정처 없’게 된 죽음의 문제와 씨름했던 것인데 이는 크게 두 가지 함의를 갖는다. 하나는 〈Another Left〉가 활용한 「택시운전사」의 클라이맥스 장면이 해당 영화에서 유일하게 허구적인 장면이었던 것과 달리, 죽음의 ‘(비)가역성’을 되돌린다는 것이 더 이상 허구적이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빈 무덤’이라는 알레고리가 가령 기독교에서 (예수의) ‘부활’이라는 단일한 의미를 상징하는 것과 달리, 동일한 방식으로 활성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21세기에 접어들자 518 희생자들과 박정희, 그리고 세월호 희생자들은 따로 또 같이, 하지만 전혀 다른 스펙트럼에서 구천을 떠돌기 시작한다. 이는 이태원 참사를 희미하게 환기하는 〈덤 더미 덤 덤〉의 왼쪽 화면에 등장한 인물이 엉성하게 반복하려 애쓰는 T자형 몸짓의 함의와도 무관하지 않다. 이는 모션 캡처의 센서 신호가 손실될 때 시스템이 자동으로 복귀하는 초기 자세인데, 그는 이 자세와 비슷한 몸짓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Lee Jungwoo, Floating Clouds, 2026, Single-channel video, color, sound, 4K, 31min 25sec. Made with world models (Genie 3 and Omni Flash by Google, Happy Oyster by Alibaba), and Ray-Ban Meta smart glasses. © MMCA

5. 2025년 시점에 재구성한 이정우의 포트폴리오에서 가장 눈에 띄게 반복되는 것은 ‘~하지 않는다’라는 표현이다. 그는 “보정하거나 최적화하지 않는다”고,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온전하게 복원되었는가”가 아니라고 일관되게 강조한다. 그 대신 보존되는 것은 오류와 오작동들이다. 이정우가 활용해 온 다종 다기한 매체는 이 지점에서 곱씹을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드론(〈레지스탄츠〉)과 모션캡처(〈덤 더미 덤덤〉), 포토그래메트리(photogrammetry) (〈To Be Determined〉)와 AR(〈Plant Apples and Get Avocados〉, 2024), 게임엔진(〈Because:Surrounded by Three Dimensions〉, 2024)과 생성형 AI(〈씌여진 영화, 씌여질 역사〉)에 이르는 일련의 기술들을 떠올려 보자. 우리가 살펴본 논의의 연장선에서, 이 다양한 장치들은 하나같이 ‘오작동’한다.

하지만 이러한 오류와 실패, 오작동은 처음부터 그와 함께 해왔던 것이기도 하다. 물론 〈레지스탄츠〉 라는 제목이 시사하듯, 한때 이정우는 드론을 비롯한 장치들의 오작동을 자신의 의도에 반하는 기계의 ‘저항’으로 간주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이러한 자신의 독해가 ‘오독’이라는 생각에 기운다. 문제의 ‘고장’은 기계의 ‘저항’이라기보다 드론에 내장된 프로토콜이 인간의 명령과 경합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재규정된다.

이정우에게 이는 AI가 만들어내는 ‘환각’에도 적용되는 논리로서, 이들은 더 이상 ‘오작동’이 아니라 자체에 내장된 알고리즘을 준수한 ‘작동’의 산물로 간주된다. 2019년 전시의 제목이었던 《올욲억-거꾸로거꾸로 》 가 시사했던 것처럼 거꾸로 쓴 글자나 백워드 매스킹으로 변조된 음성들은 ‘작동’과 ‘오작동’의 구분을 자명한 것으로 가시화하기도 한다. 하지만 〈무제-완벽한 순간들〉이 웅변하듯, 가속되거나 감속된 시간의 효과를 사람들이 분별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되돌릴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정상적인 작동과 오작동 사이의 구분이 의외로 자명하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이미 배태한다.

그의 최근 작업들은 이렇게 새로운 독해를 명시적으로 전경화한다. 《Loops of Algorithmic Karma》(2024)는 〈To Be Determined〉, 〈Because: Surrounded by Three Dimensions〉, 〈Plant Apples and Get Avocados〉 의 세 작업으로 구성된다. 〈To Be Determined〉는 철거 압박에 놓인 베를린 평화의 소녀상을 매일 직접 방문해 기록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위안부 피해자들의 죽음과 고통을 기억하고 애도하려는 실천을 구성한다.

하지만 포토그래메트리가 만들어낸 파편화된 3D 메시는 결코 완벽히 복원되지 않는다. 또 〈Plant Apples and Get Avocados〉 는 말 그대로 ‘사과를 심었는데 아보카도를 얻는다’고 말한다. AR 기술의 공간 좌표 추적 알고리즘을 통해 가상의 기념비를 호출하도록 설계됐지만, 동일한 위치와 동작을 반복해도 출력은 매번 달라진다. 특정 요소가 나타나지 않거나 무관한 오브젝트로 대체되는 것이다. ‘콩 심은데 콩 난다’라는 속담을 떠올릴 때 이들은 명백한 ‘오작동’의 사례일 뿐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들을 보정하지 않음으로써, AR 추적 알고리즘의 한계를 내재적인 것으로 가시화한다.

‘사과를 심었는데 아보카도를 얻는’ 가장 최근의 사례는 〈씌여진 영화, 씌여질 역사〉다. AI에게 1940년대 중후반 한국 남성의 얼굴을 요청해도 그것은 서양인의 형상을 출력하고, 발포 유예를 명령하는 자신의 프롬프트를 지속적으로 거부한다. 악당은 일본인이 아니라 독일군이 기본값이다. 이정우는 이렇게 ‘편향’을 보이는 인공지능이나 엔진의 한계에 대한 명시적 비판을 제기하지 않는다. 가령 케이트 크로포드가 『AI 지도책』에서 수행한 것처럼 AI 기술의 배후나 소유 관계를 폭로하지도, 열악한 노동 조건과 환경 파괴 행위의 개선을 촉구하지도 않는다.9

대신 이정우는 “조건이 주어지면, 시스템은 그 조건 안에서 가장 ‘적합한’ 결과를 도출할 뿐”이라고 강조하고, “다시 말하자면 지금의 작업에는 더 이상 정상과 비정상, 또는 오작동과 정상 작동의 구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을 긋는다. 그에 따르면 “이것이 지시하는 것은 시스템 자체가 아니라, 그 시스템을 작동시키는 지금의 중력이다.” 이러한 결론은 그의 작업이 갖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간주될 수도 있지 않을까? “정상과 비정상” “오작동과 정상 작동” 사이에 아무런 구분이 없다는 말은 주어진 현실을 그저 받아들이라는 일종의 투항 권유가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흥미로운 건 〈Because: Surrounded by Three Dimensions〉 이다. 임진왜란 시기의 해전을 다룬 한국 상업영화의 에셋을 게임엔진 시뮬레이션에 중첩시킴으로써, 그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조선, 혹은 한국의 조건이 “피할 수 없는 지정학적 운명”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인위적으로 파라미터를 초과하는 값을 입력해 파도가 비틀리고 중력이 역전되지만, 이러한 오작동은 통계와 시뮬레이션이라는 기술 언어의 구성물로 드러난다.

이는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일까? 극복하지 못할 알고리즘이란 없는 것일까? 비가역성의 한계 사례인 죽음조차 가역적인 현상이 된 세상이라는 의미에서? 그렇다면 작가는 왜 ‘케첩’을 먹지 못했던 것일까? 국가의 지정학적 위치와 오이나 복숭아를 못 먹는 과민반응 중 ‘운명’에 가까운, 보다 강력한 알고리즘은 어떤 것일까?

이에 못지 않게 흥미로운 또 다른 작품은 생성형 AI를 활용한 최신작 〈씌여진 영화, 씌여질 역사〉다. 해방 직후에 만들어진 「자유만세」는 ‘친일’경력을 가진 감독과 주연을 맡았던 배우의 월북 등을 이유로 일련의 검열과 재편집을 받았고, 결국 누더기가 된 채 50분 분량만 살아 남았다. 여기에 AI라는 산소 호흡기를 대면서, 작가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고 말하는 생성 모델의 자유와, 해방 직후 이 영화가 호출 했던 자유가 서로 어떤 방식으로 어긋나고 겹치는지, 그리고 배우의 월북으로 비워진 자리가 오늘날에는 자동 검열과 데이터 편향에 의해 또 다른 방식으로 지워지는 과정을 따라간다. 〈씌여진 영화, 씌여질 역사〉는 이렇게 두 시기의 ‘자유’를 생성과 재구성의 과정 위에 겹쳐 놓으며, 과거의 검열과 오늘의 편향이 현재의 기술과 매체 조건 속에서 어떻게 반복되고 변형되는지를 드러낸다.

그리고 한 장면에서 관객은 “그 어떤 이미지도 잠재 공간의 중력을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라는 문장을 한국어와 영어로 듣게 된다. 반으로 나뉜 스크린 각각에는 세 명의 등장인물이 보이는데, 이들은 분명한 공통점과 미세한 차이점을 나눠 갖는다. 먼저 위의 문장을 말하는 남성은 양자 모두 상처를 입은 듯 왼팔을 감싸 쥔 채 등 뒤의 간호사에게 안겨 위태롭게 서 있다. 이들 뒤로 독일군의 것으로 보이는 군복을 입은 장교가 서 있고, 이들 셋은 모두 숲속에 있다. 이러한 기본 구도를 짚고 나면 차이점이 선명해진다.

먼저 왼쪽 화면에서 다친 남성과 간호사는 백인인데, 우측 화면의 둘은 동양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좌측 화면의 간호사는 여성이지만 우측 화면의 간호사는 여성 간호사 복장을 착용한 남성의 얼굴을 하고 있다. 1940년대 중반 한국에서 만들어진 영화에 ‘트랜스젠더’ 캐릭터가 어울린다고 보기는 일반적으로 어려울 것이다. 이런 점에서 흥미로운 건 양자가 공유하는 독일군 장교다.

그는 양쪽 화면 모두에서 백인으로 등장하며, 세 명의 등장인물 가운데 시각적으로 유일하게 일관성을 유지한다. 이정우가 환기했듯, 이는 2025년 중반과 하반기 시점 그가 활용할 수 있었던 생성 인공지능의 데이터셋이 갖는 우스꽝스런 결과물이자 내재적인 한계의 산물이다. 2차 세계대전이 결국 독일군에 대한 미군의 승리로 기억되는 이유가, 그만큼 많은 영화들이 전자의 선악구도를 확장 세공해 온 역사의 산물이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6. 이 모든 건 ‘중력’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을까? 시스템의 중력을 가시화한다는 것은 그 중력 자체의 변화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일까? 아니면 ‘중력’이라는 개념 자체가 지구와 인류에게 갖는 무게처럼, 그것은 일종의 ‘운명’처럼 주어지는 것일까? 앞에서 환기한 이전 글에서, 나는 이정우의 작업에서 역사란 “비극과 희극 사이에 어정쩡하게 끼어 있다”고 썼다. 이 ‘어정쩡함’은 작업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정직함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헤겔을 비틀어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른 한 번은 희극으로”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역사적 반복에서 행위의 가능성을 묻는 질문이기도 했다. 이정우의 “중력”은 이 질문을 닫을까,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열까? 중력의 알고리즘도 가역적일까?

『철학적 탐구』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오직 한 사람이 하나의 규칙을 따른 경우가 오직 한 번만 있었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10고 쓰고, “보고가 이루어진 경우, 명령이 부여되거나 이해된 경우 등이 오직 한 번만 있었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11고 덧붙인다. 그에 따르면 “규칙을 따른다, 보고를 한다, 명령을 내린다, 체스 게임을 한다는 것은 관습들(용법들, 제도들)이다.”12

그에게 알고리즘이란 변화의 가능성에 노출된 ‘관습’인 것이다. 관련된 논의의 연장선에서 그는 “기계는…그 작동 방식을 이미 그 안에 담고 있는 듯이 보인다”고, “우리가 기계를 안다면 나머지 모든 것-즉 기계가 하게 될 움직임-은 이미 완전하게 결정되어 보인다는 것처럼 보인다”고도 쓴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마치 기계의 이 부분들은 이런 식으로만 움직일 수 있다는 듯이, 그 외의 다른 일은 할 수 없다는 듯이 이야기한다. 어떻게 그런가? – 우리는 그것들이 구부러지고, 망가지고, 녹을 수 있다는 등의 가능성을 잊고 있는가? 그렇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그런 가능성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13

이정우에게 알고리즘이란 과연 어느 정도까지 “구부러지고, 망가지고, 녹을 수 있”는 것일까? 단단히 언 알고리즘도 증발하거나, 아이스크림처럼 녹을 수 있을까? 이 기이한 질문에 답해야 하는 건 그만이 아닐 것이라는 의미에서, 그가 세공해 온 작업의 과거와 현재, 미래는 섬세한 눈과 귀를 가진 많은 이들의 주목을 요한다. 클레의 말대로 진정 예술이 “보이게 만드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보이지 않던 알고리즘을 보이게 만든다는 건, 가령 AI가 다양한 영역에서 ‘환각’으로 환원될 수 없는 방식으로 꾸준히 웅변하듯 “기계가 아주 다르게도 움직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는 근원적인 의미에서 말이다.

 

1. 개별적 의도와는 무관하게, 적대적 관계를 매개로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고 보존한다는 이 역설은 여러 학문적 지평과 역사 속에서 발견된다. 이러한 현상의 환기는 종종 모든 비판과 저항을 향한 냉소주의를 강화하기도 하지만, 적대적 운동마저 포섭하는 예속의 권력을 직시하는 일이야말로 근본적 사유와 비판의 토대일 것이다. Lim Jie-Hyun, “The Antagonistic Complicity of Nationalisms: On Nationalist Phenomenology in East Asian History Textbooks,” in Contested Views of a Common Past: Revisions of History in Contemporary East Asia, ed. Steffi Richter (Frankfurt: Campus Verlag, 2008), 205–222; Michael Burawoy, “For Public Sociology,” American Sociological Review, Vol.70 (Feb. 2005), 4–28; Peter F. Drucker, “Science and Industry, Challenges of Antagonistic Interdependence,” ScienceNew Series, Vol.204, No.4395 (May 25, 1979), 806-810.
2. Paul Virilio, Polar Inertia (London: SAGE, 1999) 참고.
3. 하르트무트 로자,『소외와 가속: 후기 근대 시간성 비판』, 김태희 옮김(서울: 앨피, 2020), 56.
4. 김애란, 「김애란 작가에게 묻다: 문학은 왜 존재해야 하는가?」, 손석희와의 인터뷰, MBC 〈손석희의 질문들〉, 2026년 4월 15일, https://www.youtube.com/watch?v=GVyMqldFQU4. 김지환,「AI에게는 없는 ‘망설임’」, 『경향신문』, 2026년 4월 20일 자 참고.
5. Lorraine Daston, Rules: A Short History of What We Live By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22), 85.
6. Gregory J. Chaitin, Conversations with a Mathematician: Math, Art, Science, and the Limits of Reason(London: Springer-Verlag, 2002), 44.
7. Rules, 8.
8. 같은 책, 271.
9. Kate Crawford, Atlas of AI: Power, Politics, and the Planetary Costs of Artificial Intelligence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21). 국역: 케이트 크로퍼드,『AI 지도책: 세계의 부와 권력을 재편하는 인공지능의 실체』, 노승영 옮김(서울: 소소의책, 2022).
10. Ludwig Wittgenstei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rev. 4th ed., trans. G.E.M. Anscombe, P. M. S. Hacker, and Joachim Schulte (Malden, MA: Wiley-Blackwell, 2009), 87(§199). Emphasis original. 국역: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이승종 옮김 (아카넷:파주 2016), 242.
11. 같은 책, 84(§193). Emphasis original. 국역: 같은 책, 233.
12. 위와 같음. 국역: 같은 책, 234.
13. 위와 같음.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