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릴케의 책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구분을 잘 하면 잘 할수록 실수를 범한다는 것이다.” 1 - 빌렘 플루서
생성이라는 말부터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쉽게 생성형 인공지능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만, 기술적으로든 미학적으로든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은 새로운 무언가를 생성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창작의 두 가지 방법론, 그러니까 포이에시스와 미메시스의 구분은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 두 개념의 구분은 차라리 변증법적으로 지양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여전히 인간은 거대 언어 모델을 기반으로 한 인공지능과 달리, 독창적인 생성의 방법론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애초에 인간 메커니즘의 미메시스이고, 아직 완전하진 않지만 이른바 특이점이 멀지 않았다는 전망은 유효해 보인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우리는 진정 다양한 차원에서 인간과 기술 사이의 문제들을 깊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번 전시도 그러한 고민의 한 측면에서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이 생성하는 텍스트와 이미지 또한 기계가 생성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구조를 반영한다. 물론 예술 작업의 생성은 그것이 만들어지는 구조에 대한 성찰까지 포괄하기도 하지만, 예술적 방법론 역시 특정한 코드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미시적인 차원에서는 이미지가 구성되는 형식의 문제가 있다. 생성형 알고리즘에 “큐비즘 스타일로 사과를 그려줘”라는 명령을 입력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진 오늘날 매체 환경을 생각해 보자.
이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가시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예술을 둘러싼 인식적 범주에 있다. 그것은 강아지와 컵케이크를 구분하는 문제와 전혀 다른 차원이다. 인간들조차 무엇이 예술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여기에는 레디메이드나 인프라씬(infrathin) 같은 미학적 개념들을 경유해 사유할 것도 있고, 제도와 담론의 인정이라는 차원에서 작동하는 문제들도 있다.
예술 제도를 둘러싸고 이미 벌어지고 있는 여러 논쟁들이 증명하듯, 예술에서 기술적 생성의 문제는 단순한 판별의 문제가 아니라, 굉장히 담론적이고 정치적이다. 이러한 국면에서 거대 언어 모델을 기반으로 한 생성형 알고리즘을 매체로 삼는 예술 작업은 기본적으로 오늘날 기술과 예술을 둘러싼 문제들에 대한 메타 인지를 시도한다고 볼 수 있다.
“현상 해독(Decoding the Phenomenon)”이라는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하여 만들어진 이미지와 텍스트를 통해 세계가 어떻게 코드화되어 있는지 거꾸로 올라가며 귀납적으로 분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무언가 디코딩하려면 그것이 어떻게 코딩되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거대 언어 모델은 인간들이 여태 쌓아놓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그것은 세계의 구조를 그대로 반영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문제는 특히 여러 오류를 통해 가시화되곤 했다.
거대 언어 모델을 기반으로 한 알고리즘에서 과적합(overfitting) 같은 오류가 드러내는 문제를 살펴보자. 초기 이미지를 생성형 모델에 연어(salmon)를 이미지로 출력하라고 입력하면, 물속에서 헤엄치는 붉은색 순살 연어회의 이미지가 생성되곤 했었다. “salmon”이라는 언어와 연결되는 이미지 데이터가 살아있는 물고기에 비하여 음식 연어회가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데이터 학습에 오류가 발생한 것이다.
그렇게 붉은 순살 연어회가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이미지는 한때 생성형 인공지능을 조롱하는 밈처럼 사용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잘못 생성된 이미지들은 오히려 자연스럽게 잘 만들어진 이미지보다 훨씬 예술적으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그리트식 초현실주의를 연상시키는 그런 오류들은 그 자체로 예술적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론 데이터로 구성된 세계의 어떤 균열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조영각은 예술적 차원에서 거대 언어 모델을 다루면서 이러한 균열을 곳곳에 발생시키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는 〈현상적 이유의 추이적 문장들〉은 인공지능이 생성한 격언을 기반으로 한 3채널 영상이다. 격언은 오랜 시간 축적된 인간들의 지혜와 통찰을 담아낸다고 여겨진다. 인공지능이 여러 데이터를 학습하여 비슷하게 만들어낸 격언은 데이터를 조합하여 만들어낸 가짜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통해 무언가 반성할 수도, 깨달을 수도 있다.
인간중심적 관점으로 보면 깊이라고는 전혀 없는 데이터 쪼가리를 통해 진짜 성찰에 도달할 수도 있다는 문제는 인간과 기계의 이분법을 이상하게 가로지르기도 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밀착취재 2: 그린 인플루언서〉의 이미지들은 집에 걸어 두면 복이 들어온다는 미신을 근거로 하는, 이른바 풍수 회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풍수론과 오늘날 소비문화를 겹쳐놓는 그 이미지들은 미신과 데이터 기반 기술을 시대착오적(anachronism)으로 뒤섞으며 또 다른 맥락의 균열을 가시화한다. 기술적 체계는 냉정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인간들의 믿음은 아무리 헛된 것일지라도 데이터의 세계에서도 오묘하게 번역되어 작동하고 있다.
〈대화 상자〉는 점점 더 가속화되는 모빌리티 사회에서 너무도 일상적인 사물인 택배 상자들을 펼쳐낸다. 스스로 언박싱하면서 이야기와 이미지를 펼쳐내는 그 움직이는 상자들은, 디지털 세계와 물리적 세계가 연동되는 구조를 표상하는 것처럼 보인다. 모빌리티 체제가 고도화될수록 디지털 인터페이스의 이미지와 실제 물질적 사물 사이의 거리는 점점 좁아진다. 배달앱을 켜 화면 속 음식 그림을 누르면 얼굴만 비춰도 돈이 빠져나가고, 어느새 그것이 우리 눈앞에 놓이는 세계에서 우리는 이미 살고 있다.
〈정직원〉에서는 이러한 문제가 조금 더 근본적으로 탐구된다. 우리 사회의 물적 토대의 근간을 이루는 생산관계의 변화가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소위 자동화 사회라 불리는 생산관계 차원의 사회 변화는 인간 자본가와 인간 노동자 사이의 계급 관계를 완전히 재편하고 있다.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제 인간 노동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점점 더 사라져 갈 것이다. 곧 노동자들은 자본주의가 자멸하지 않도록, 공황을 막기 위해 소비자의 역할에만 머물게 될지도 모른다. 일론 머스크 같은 최첨단 자본가들이 급진적인 좌파 의제였던 기본 소득을 주창하는 세계에 우리는 이미 살고 있다.
조영각은 이렇게 인간과 기술과 사이의 다층적인 문제들을 현상의 차원으로 뱉어내는 기계적 언어 구조를 짜낸다. 그렇게 만들어진 기계들은 데이터로, 인공지능으로 납작하게 번역된 세계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것을 입체적으로 성찰할 예술적 계기를 제공한다. 여기에선 현상을 디코딩하는 귀납과 예술가적 직관에 의한 연역이 동시에 작동하고 있다. 코딩과 디코딩, 연역과 귀납으로 동시에 추적되는 세계의 어떤 모습들.
문제는 여기서 이루어지는 (디)코딩이 데이터의 구조에 이데올로기적으로 은폐되어 있는 진실을 드러내는 계몽주의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계몽주의는 더 이상 계몽할 것이 없을 때 실패한다. 데이터로 만들어내는 가상의 현상에 배후는 이미 뒤집어져 있다. 우리에게 의미심장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오히려 그 현상뿐이다.
세계를 돌아볼 수 있는 균열은, 이곳을 이루고 있는 코드를 다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례적인 오류로 감각되는 기이한 현상이 창출하는 곳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닐까. 지금은 쉽게 읽어낼 수 없는, 혹은 지금의 시간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발터 벤야민이 예술의 책무를 운운하며 일찍이 짚어냈듯, “오직 나중에만 완전히 충족될 수 있는 요구의 창조”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1 빌렘 플루서, 『디지털 시대의 글쓰기: 글쓰기에 미래는 있는가?』(Die Schrift, Hat Schreiben Zukunft?), 문예출판사, 윤종석 옮김, 1998, 15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