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 베니스비엔날레에서 ‘초대받지 않은 작가’ 성희승은 자르디니 공원에 있는 루마니아관에 설치된 감시카메라를 이용한 퍼포먼스를 했다.

2003 베니스비엔날레에 참가한 루마니아의 실험예술단체인 키네마 이콘(Kinema Ikon)은 ‘예술에서 저자란 누구인가?’란 질문을 제기하며 루마니아관에 의도적으로 감시카메라를 설치했다.

보안과 감시를 목적으로 설치하는 감시카메라가 관객과의 상호작용을 위한 매체가 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한 성희승은 얼굴에 노란색 물감을 바르고 노란색 비키니를 입은 채 그 감시카메라 앞에서 뜀박질하고 국민체조로 알려진 맨손체조를 하는 퍼포먼스를 했다.

붉은색 비키니를 입고 산마르코 광장에서 퍼포먼스를 하던 낸시 랭이 루마니아관 퍼포먼스에 합류하여 바이올린을 연주하면서 성희승과 함께 들락날락하는 장면은 고스란히 감시카메라의 영상에 담겼다.

​1999년과 2001년 두 차례에 걸쳐 예술감독을 연임한 하랄트 제만(Harald Szeemann)이 ‘큐레이터 독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전시기획과 실행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실을 의식한 탓인지 2003 베니스비엔날레의 예술감독을 연임한 하랄트 제만(Harald Szeemann)이 ‘큐레이터 독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전시기획과 실행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실을 의식한 탓인지 2003 베니스비엔날레의 예술감독을 맡은 보나미(Francesco Bonami)는 비엔날레의 주제를 《꿈과 갈등: 관객 독재(Dreams and Conflicts: The Dictatorship of the Viewer)》로 정했다.

​그런 점에서 키네마 이콘과 루마니아관 커미셔너이자 큐레이터인 칼린 만(Kalin Man)이 컴퓨터와 TV모니터, 프로젝터 등의 멀티미디어를 동원해 관객과 상호작용하는 작품을 발표한 것은 비엔날레의 전시관행에 대한 문제제기와 함께 새로운 전시방법의 제안이란 의도를 반영한 것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않게도 ‘초대받지 않은’ 작가가 나타나 퍼포먼스를 하니 루마니아 작가로서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감시카메라에 녹화된 영상을 DVD에 저장해 성희승에게 건넸고, 화질이 선명하지 않고 픽셀마저 깨어진 영상은 〈초대받지 않은/초대받은〉으로 탄생했다.


성희승, 〈Piazza San Marco〉, 2003, 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에 채색, 50 x 40 cm © 성희승

다른 작품에 의도적으로 개입하여 스스로 참여작가가 되는 과정을 통해 창작과 소통의 관계에 질문을 던진 성희승은 뉴욕에서도 맨해튼과 브루클린의 한국인이 운영하는 수퍼마켓에 설치된 감시카메라 앞에서 수행한 ‘초대받지 않은’ 퍼포먼스를 통해 예술의 일상화를 실천했다.

이러한 개입으로서의 행위예술은 작가와 관객의 경계를 해체함은 물론 예술의 존재 의미를 새롭게 묻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아와 초자아의 개념을 시각적으로 실현하고자 그는 2005년에는 관람객이 작가의 몸에 물을 끼얹는 종교의식과 유사한 행위를 통해 구원의 의미를 묻는가 하면, 같은 해 뉴욕대학(NYU)과 중국 베이징영화대학(北京电影学院)과의 교류 프로그램에 따라 레지던스 작가로 참가하여 베이징영화대학에서 삭발하는 퍼포먼스를 실행했다.

머리카락을 깎는 행위는 속죄와 참회는 물론 불교에서는 출가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공동체가 개인에게 사회적 징벌을 가하여 추방할 때도 이루어진다. 그의 삭발 퍼포먼스는 자아의 재탄생을 향한 결의의 표현으로 볼 수 있는 만큼 결단이 필요한 행위임에는 분명하다.

이 퍼포먼스는 앞에서 말한 모든 의미의 해석 앞에 열려있을 뿐만 아니라 2008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급변하는 도시환경을 목격하고 그것을 어떻게 몸으로 표현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자 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2019년에는 7일간의 퍼포먼스에서 일주일 동안 매일 한 시간씩 작품을 제작하는 모습을 공개하며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과정이 작업의 연장임을 밝히고자 했다.  


성희승, 〈Early summer-1〉, 2022,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31 x 42 cm © 성희승, 이미지 제공: 자하미술관

◈ 내가 그린 삼각형, 어느 우주의 별이 되었을까

작은 삼각형으로부터 시작한 성희승의 작품은 점과 선이 모여 형태가 되고 색채가 더해지면서 이차원적 평면은 마음으로부터 우주까지 품을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만든다. 집적된 수많은 선은 마치 모세혈관처럼 화면 속으로 흐르며 수렴과 확산의 과정을 통해 전면회화를 만든다. 그림은 뉴런과 시냅스처럼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된 기억의 영역이거나 마음의 지도, 또는 수많은 세포로 이루어진 유기체이거나 우주 거품과 가스로 가득 찬 거대한 성운을 연상시킨다.

​그의 작품을 보면 문득 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떠올리게 만든다. 이 제목은 친구이자 시인인 김광림의 시 〈저녁에〉에서 따온 것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저렇게 많은 중에서/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는 시구처럼 김환기의 그림에서 무수한 점들은 별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 점들은 김환기가 고향인 신안 앞바다에서 밤마다 보았을 별일 수도 있고, 뉴욕의 작업실에서 내다본 대도시의 불빛일 수도 있다. 김환기의 별은 점이라기보다 작은 색면으로 미디엄을 많이 함유한 묽은 물감으로 여러 차례 겹쳐 그린 것이 특징이다. 이 푸른 색면이 화면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으므로 결과적으로 전면회화처럼 보일 따름이다. 


성희승, 〈Humidity〉, 2003,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260 x 162 cm © 성희승

전면회화는 일반적으로 추상표현주의 회화에서 발견되는 특징으로 이야기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 뿌리는 회화의 본질에 대한 숙고로까지 연결된다. 1880년대 말 파리에서 결성된 나비파(Nabis, 나비는 히브리어로 ‘선지자’ 의미)의 일원으로 고갱을 좋아했던 모리스 드니(Maurice Denis)는 1889년에 발표한 ‘신전통주의의 정의(Définition du néo-traditionnisme)’에서 “그림이란 전쟁터의 말이나 누드, 또는 어떤 일화이기 이전에 본질적으로 일정한 순서의 색채로 덮인 평탄한 표면이라는 점을 기억하라”고 했다.


성희승, 〈Universe #200802〉, 2020,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151 x 130 cm © 성희승

사실 회화의 형식적, 조형적 요소의 기본은 점·선·면·형태·색채이며 이것이 만들어낸 공간은 평면이다. 형태가 특정대상을 재현하거나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그림은 본질적으로 선으로 이루어진 ‘형태와 색채의 향연’이 일어나는 평면이다.

브라크(Georges Braque)는 입체주의의 효시가 된 〈에스타크의 집〉에 대해 정말로 집들이 아니라 캔버스 위에 그려진 형태와 색채라며, “화가는 형태와 색채(라는 언어)로 생각한다. 화가의 목적은 ‘설화적 사실을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회화적 사실을 구성하는 것’이다”고 주장했다. 이 작품을 본 마티스(Henri Matisse)가 미술평론가 루이 복셀(Louis Vauxelles)에게 ‘기이한 입방체(bizarreries cubique)’라고 말했는데 그것을 주목한 복셀이 브라크의 새로운 스타일에 대해 ‘큐비즘’이란 이름을 붙였다. 

훗날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는 소비에트나 독일 나치, 이탈리아의 파시즘과 같은 전체주의를 경계하며 쓴 「아방가르드와 키치」 이후 자신의 논리를 더욱 다듬은 「더 새로운 라오콘을 향하여」를 발표한 후 그 논리를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 나타난 회화를 다룬 「미국형 회화」에 적용했다.

그는 「모더니스트 회화」에서 ‘평면성(Flatness)’을 회화의 자기규정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자신의 형식주의 이론을 정식화했다. 그러나 그린버그가 「미국형 회화」에서 로스코(Mark Rothko)의 작품에 대해 ‘그의 거대한 화면은 순수하고 반투명하며 경계가 불분명하지만 뚜렷하게 나타나는 빛으로 이루어진 듯하고 그 형태는 마치 숨을 쉬고있는 듯 보이며 보는 사람을 빨아들이는 힘을 갖고 있다’고 평가했지만 정작 로스코 자신은 “나는 추상화가가 아니다. 나는 색과 형태 사이의 관계에 관심이 없으며, 나의 관심을 끄는 유일한 것은 비극, 황홀, 운명과 같은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는가일 뿐이다”고 했다.

이런 점은 색면추상의 대표직인 화가인 뉴먼(Barnett Newman)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형식으로서의 추상이 아니라 ‘숭고’, 즉 ‘낭만적이면서 흥분되고 동시에 일종의 ‘계시’라고 할만한 새로운 예술’에 관심이 있었다.

회화를 구성하는 것이 형식적 요소임에는 분명하지만, 그것만을 비평의 기준으로 삼으면 클라이브 벨(Clive Bell)이 그랬던 것처럼 작품의 내용과 의미에 대해 침묵하여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미니멀아트 운동이 본격적인 궤도로 진입한 1966년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는 마치 브라크가 말한 바를 반복하듯 “나의 그림은 그림 위에서 볼 수 있는 것만이 ‘거기에 있다’는 사실에 입각하고 있다. 그림이란 사실상 하나의 객관적 실체(他者)가 된다. (…) 그림 위에서 보고 있는 것이 전부이다”고 했다. 나에게 스텔라의 유명한 “당신이 보는 것이 곧 당신이 보는 것이다(What you see is what you see)”라는 말은 멋있게 들리지만 어쩐지 무책임한 동어반복이거나 초라하고 궁색한 회피처럼 들리기도 한다.


성희승, 〈Stardust〉, 2023, 산불의 재, 143 x 111 cm © 성희승

마치 화면을 직조하듯 수많은 삼각형 그리기를 반복하여 만들어낸 성희승의 작품은 전면회화처럼 보인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 속에 조밀함과 성김이 공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공간도 닫혀있는 것이 아니라 열려있다. 이 열린 공간은 우리의 시선과 숨결이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틈이자 이차원적 평면을 삼차원적 공간으로 확장하도록 유도하는 가능성의 영역이다. 그 위에서 마치 유성처럼 빛나는 별의 형태가 화면을 가로지르기도 한다.

어떤 경우 그가 그은 선들은 스테인드글라스의 테두리처럼 형태를 구획하면서 서로를 연결한다. 그것을 보면서 나는 어린 시절에 불렀던 〈반달〉을 떠올린다. 아쉽게도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쪽배, 계수나무, 토끼 한 마리는 동요에만 존재하더라도 그 낭만적 상상마저 포기할 수는 없다.


성희승, 〈Universe #212003〉, 2021, 캔버스에 아크릴과 한지, 73 x 90 cm © 성희승

김환기의 작품에서 푸른색이 신안 앞바다의 쪽빛을 연상시키듯 성희승이 그은 선 하나는 집적과 확산을 거듭하며 조밀한 수풀을 구성하고 겹겹이 쌓인 선의 율동은 색채와 함께 은하를 형성한 것으로 지각된다.

인공조명이 지배하는 도시에서는 어린 시절 보았던 밤하늘에 영롱하게 빛나는 별을 더 이상 볼 수 없다. 그의 그림은 우리가 잃어버린 밤하늘의 별에대한 향수를 자극한다. 그런 점에서 그의 그림은 기억이 켜켜이 쌓인 내 마음의 표상이자 내가 가고 싶은 미지의 세계로 향한 동경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무수한 별의 탄생과 죽음의 장관을 보여주는 우주처럼 생동하는 그의 화면은 나의 상상력이 머물도록 유혹한다. 작품을 본다는 것은 그 별 속으로 여행하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과 같다.

그가 그린 삼각형 하나는 어느 우주의 별로 태어날까?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