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동완, 〈나는 셋 아니 넷 아니 다섯: 0주〉, 2020, 한지에 흑연, 44 x 56 cm © 국동완

국동완은 꿈을 기록하려 했으며, 임신의 경험을 주제 삼고, 2014년 4월 16일의 사건을 자신의 애도 방식으로 다가가려 했다. 그리고 다른 무엇도 아닌 자기 손에 의지해 마음의 작용이 몸의 끄트머리에서 표현되는 일에 집중하려 했다. 이 과정은 체험된 사건을 미처 언어화하지 못하는 순간에, 그것을 어떤 식으로든 포착하겠다는 의지를 포함한다. 여기서 그는 무언가 그럴싸한 설명을 찾기보다,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사유와 말, 감정의 흔적을 붙잡으려 한다.

이를 위해 동원된 ‘자유연상’의 방식, 즉 ‘자동기술법’이라 말할 수 있는 미적 형식은 국동완의 전체 작업의 얼개를 정리한다. 이는 초현실주의 문학에서 시도된 ‘자동기술’의 언어들이 그랬던 것처럼 발화된 것의 배면 – 욕망과 감정의 심층 – 이 그대로 드러나기를 바라면서 무제한적으로 확장되는 자의적 기호를 받아 적으려는 시도의 연장선에 있다. 그러나 서로 연관 없는 도상들이 엎치락뒤치락 하며 한 권의 책을 구성하게 되는 평면에서, 보이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드러난 실제의 덩어리가 아니다. 오히려, 그 실제를 – 어떤 사건을 적극적으로 해석한 의미의 구조를 노출한다.

국동완의 작업은 시각 이미지에 기대되는 탈구조적인 자유로움 대신, 역설적이게도 그 자체가 지표적 성질을 지닌 기호이자 구성체임을 확인한다. 아래는 이렇듯 국동완의 작업이 관통하고 있는 언어적 구성력을 주목하며, 동일한 제목의 개인전으로 선보이기도 한 2020년 작 ‘나는 셋 아니 넷 아니 다섯’을 중점적으로 살펴본 글이다.


국동완, 〈나는 셋 아니 넷 아니 다섯: 1주〉, 2020, 한지에 흑연, 44 x 56 cm © 국동완

1. 받아 적기: 자동기술법을 위반하기

‘나는 셋 아니 넷 아니 다섯’은 배 속의 태아를 주제 삼은 드로잉 연작이며, 작가는 여성의 신체 안에서 발생하는 어떤 사건으로서 태아의 생성과 발전을 시각적 이미지로 만들어낸다. 마흔 한 장의 드로잉은 월경하는 여성(그가 ‘0주’라 상정한 시기)의 상태에서 출발하여 한 주씩 시간을 늘여 가며 태아가 변화하는 모습을 담는다. (동일한 작업은 각각의 드로잉과 쌍을 이루는 시적 텍스트, 그리고 이 모두를 포함하는 출판물로 발전된다.) 이 작업은 태아의 실물 크기를 고려하고 (사람과 다른 동물의) 태아를 찍은 사진을 참조하지만, 그뿐 아니라 수 개의 이질적인 이미지들을 참조하고 재구성한다는 점에서 콜라주에 가깝다.

한편, 작가는 철저히 자기 경험과 기억에 몰두하면서 자아의 연상작용을 시도하는데, 이를 가능케 하는 형식적 도구로 드로잉에 기댄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국동완에게 드로잉은 연필과 종이, 작가의 손이라는 1차적인 마찰로 이루어지며 비교적 빠른 속도감으로 전개되는 특성을 최대한 활용하는 형식이다. 이러한 형식은 그가 ‘연상작용’의 반응/현상/결과를 즉각적이고 여과 없이 빠르게 얻어낼 수 있도록 하는 장치로 동원된다. (텍스트의 경우엔 단어의 물리적 조합이 눈에 띄고 행 바꿈이 자유롭게 나타난다는 점에서 운문에 가까운 형식을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초현실주의자들의 자동기술, 자유연상 기법의 맥락과 닿아 있다.

초현실주의자들의 자동기술법은 문학에서 먼저 시도되었다. 즉, 의미가 아니라 기표 자체의 무제한적 확장 속에서 표층의 놀이를 시도하고 이로써 무의식에 가 닿는 새로운 문학의 기획이 그 출발이다. 문제는 이를 시각 언어에도 적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풀리지 않은 대목이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시각적 이미지가 자동기술법의 매체로 적합한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미 시각 이미지에는 기호의 연쇄로 이루어진 문자 언어의 체계처럼 전제된 의미망이 없는 상태이고, 이렇듯 전제가 없는 상황에서 의미로부터의 탈주를 가능하게 하는 (회화적) 이미지, 형식을 찾을 수 있는가 (그것은 또다시 고안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i

다시 국동완의 경우로 돌아와서, 그는 ‘자동기술법’을 형식으로 채택하고 있지만 앞서 서술한 초현실주의자들의 문제와는 조금 다른 지점에 있다. 국동완의 작업은 순수하게 시각적인 이미지 – 의미로부터 벗어난 상태 자체의 형식 – 를 얻기 위해 ‘자유연상’과 ‘자동기술’을 시도한다기보다는, 이미지를 문자 언어로부터 출발시키거나 언어로 결론 지음으로써 의미망과 언어적 구성의 세계로 진입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가 받아 적는 이미지, 말은 ‘자유연상’ 혹은 ‘자동기술’의 목적을 위반한다.

요컨대, 국동완이 빚어내는 이미지는, 기호로서 그 자신의 언어적 구성력을 확인하고 이미지를 체계로 변환 ∙ 구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다시 문자 언어로 성실하게 해제된다. ‘나는 셋 아니 넷 아니 다섯’에서 보여주는 ‘태아의 신체’라는 상은 의미를 지시하고 있는 기호화 된 이미지들, 단순한 윤곽선으로 그려진 동물, 사물의 형상들을 모듈 삼아서 콜라주 된다. 각각의 모듈은 ‘태아의 신체’ 형상이라는 맥락 안에서 움직이며, 최종적으로는 작가가 텍스트로 (시적인 방식으로) 해제한 서사적 구조로 귀속한다.

이는 꿈을 연상작용에 기대어 텍스트와 이미지로 기억해내는 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인다. 또, 특정한 문장을 평면 위에 이미지로 구현해 낸 2011-2012년 드로잉들의 경우에, 국동완의 관심은 의미를 상실한 기표 자체의 무한한 확장이 아니라 이미지로써 문장의 의미구조, 서사성을 유지하는 데에 있었다.


국동완, 〈나는 셋 아니 넷 아니 다섯: 15주〉, 2020, 한지에 흑연, 44 x 56 cm © 국동완

2. 마음이 만드는 몸

‘나는 셋 아니 넷 아니 다섯’에서 낱장의 그림들은 각각 어떤 몸을 그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한편, 사실 그렇지 않다. 태아를 품은 여성의 몸, 자라나고 있는 태아의 몸을 상정하고 있는 이 그림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윤곽선이 뚜렷한 인체의 형상, 그리고 한달에 한 번 피를 쏟아내는 몸에 대한 강력한 암시에도 불구하고 실제 보는 이의 눈에 그것은 신체적이거나 살에 가까운 것이 아니다.

44x56cm의 종이 크기는 실제 태아의 크기와 동일한 크기의 형태를 담기 위해 선택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실제 태아의 크기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이 그림이 겨냥하는 바는 실제가 아니며, 이 그림은 대상의 현존, 물리적 차원을 환기하지 않고 보다 관념적 차원에서 접근한다.

선, 지시적 기호, 표층이 살 덩어리, 혹은 실존적 부피를 대신한다. 몇몇 곡선들이 유기체의 살을 드러내는 경우에도 말미잘 등의 해양생물처럼 단순한 생물이 연상될 뿐 그것이 존재로서 부피를 갖는 것은 아니다. 10, 15, 35번 드로잉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화석에 가까운 껍질과 같은 이미지는 태아의 형성, 생성을 박제하고 있으며 오로지 기억의 방식으로만 접근 가능한 상태를 은유한다. 사실상 작가가 그리고 있는 것은 신체가 아니며 그것을 기억하고 재구성하는 언어화 방식 자체다.

‘나는 셋 아니 넷 아니 다섯’은 상상된 것, 마음의 상태, 자기 신체의 약동을 ‘이후’에 기억하고 구성해내는 마음의 지도이다. 임신과 출산의 기억에서 시작한 그의 드로잉 연작은 신체를 작업의 얼개 한 가운데 두고서도 사실 실제적 몸으로부터 어긋난다. 대신, 그 자체의 논리를 따라가는 마음에 주력한다. 실제로 작가는 아이를 갖고자 하는 자기 욕망과 그 욕망을 머리로 이해하는 과정에서 작업에 착수했다고 말했다. 국동완의 관심은 마음의 편에서 몸으로 향하고 있으며, 몸 자체라기보다는 기억이나 마음의 상을 시각화하는 데에 있다. 결국 껍질이자, 피부로 구성된 그림은 몸에 선행하는 마음을 다루는 것이며, 마음의 기호들로서 구축된 시각적 이미지-모듈을 조합한다.


국동완, 〈나는 셋 아니 넷 아니 다섯: 40주〉, 2020, 한지에 흑연, 44 x 56 cm © 국동완

3. 풀이된 이미지

아직 얼굴을 갖지 않았으며, 얼굴을 보는 시선의 자장에 노출되지 않은, 신체 내부의 신체 - 태아는 그 몸의 실제성을 심상 차원에서만 확보한다. “촛불”, “촛농 방울”, “쌀알”, “검은 색 펌프스”, “축축한 개 코”, “캐스터네츠”, “검은 수영복”의 모양, 제 멋대로 뻗어 나가는 가지나, 멋대로 뿌려진 씨앗, 새싹이자 주름을 가지고 있는 이 형상들은 신체라고 주장되지만 기호의 상징적 지평에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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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휩쓸리는 나뭇잎들 사이 검은 속눈썹
그 뒤로 씨앗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떨어진 씨앗들은 가지런하고
두 귀가 겹쳐져 깊어진 호수
먹구름이 울컥울컥 비를 통해 검은 산이 된다
(후략)

꿈을 기록하던 것과 유사한 얼개에서 국동완은 실제와 사건을 ‘해제’하는 과정에 몰입한다. 달리 말하면, 의미가 결여된 곳에서 의미를 찾고 그 상징적 체계를 구축하려 한다. 그는 비가시적 세계의 심층마저 가시화하고 거기서 자기 언어를 확인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지에 의해 시각적으로 다듬어진 모양은, 기억의 껍질을 덮은 몸을 그리게 되고, 언어에 들러붙는다.

끝으로, 작가가 언어적 구성체로서의 결과물을 다시 한번 해체하는 지점을 지적해야겠다. ‘나는 셋 아니 넷 아니 다섯’에서 드로잉의 각 부분을 해체하고 유사한 도상들을 골라내 묶은 일련의 콜라주 패널들이 이에 해당한다. 이는 언뜻 지시적으로 다가오지 않으며, 쉽게 의미로 환원되지 않는 단순한 시각적 표상들을 다시 한번 의미로 짚어내는 과정에 해당한다.

문자 기호들처럼 의미망을 전제하지 않은 비정형적인 선들을 구조적으로 분해하고, 그 선들이 사실 어떤 지시적 기호들을 형상화하고 있었음을 확인하고자 한다. 나는 국동완의 최근 작업 경향 중 자기 작업의 한 디테일을 확대해 캔버스로 옮기는 과정 역시 이와 상통한다고 보는데, ‘확대’의 방식이 결과적으로 추상적인 화면을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원리에 있어서는 전체적인 무의미의 이미지 세계를 분절된 언어의 단위로 해체하는 방식을 따르기 때문이다.

〈여객선 A Ferry〉의 콜라주, 〈데칼코마니 라이프 Decalcomanie Life〉의 부분을 확대한 ‘900x Magnification Series’, 그리고 ‘나는 셋 아니 넷 아니 다섯’의 콜라주에 이르기까지, 특정한 도상들을 이름-기호 아래에 묶고 펼치는 콜라주 방식은 구성체로서 이미지의 단위를 언어적 기호로 승인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왜 0주에서 40주로 발전된 몸의 형상은 분해되어야 했으며, 분해된 도상-조각들은 , , 등 아카이브 분류 체계와 같은 상위 분류로 다시 귀속되어야 했는가.

답을 해보자면, 애초에 국동완에게 이미지가 구성되는 방식은 유기체적인 살이나, 무의식의 탈구조적 상태라기보다는 ‘언어’였다고 할 수 있겠다. 작가는 속도감 있는 드로잉과 그를 통해 자동기술, 자유연상의 미적 형식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면서, 기실 그 자신의 언어 체계를 확인하고 구축한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