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풀이된 이미지
아직 얼굴을 갖지 않았으며, 얼굴을 보는 시선의 자장에 노출되지 않은, 신체 내부의 신체 - 태아는 그 몸의 실제성을 심상 차원에서만 확보한다. “촛불”, “촛농 방울”, “쌀알”, “검은 색 펌프스”, “축축한 개 코”, “캐스터네츠”, “검은 수영복”의 모양, 제 멋대로 뻗어 나가는 가지나, 멋대로 뿌려진 씨앗, 새싹이자 주름을 가지고 있는 이 형상들은 신체라고 주장되지만 기호의 상징적 지평에 놓여있다.
35 ii
바람에 휩쓸리는 나뭇잎들 사이 검은 속눈썹
그 뒤로 씨앗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떨어진 씨앗들은 가지런하고
두 귀가 겹쳐져 깊어진 호수
먹구름이 울컥울컥 비를 통해 검은 산이 된다
(후략)
꿈을 기록하던 것과 유사한 얼개에서 국동완은 실제와 사건을 ‘해제’하는 과정에 몰입한다. 달리 말하면, 의미가 결여된 곳에서 의미를 찾고 그 상징적 체계를 구축하려 한다. 그는 비가시적 세계의 심층마저 가시화하고 거기서 자기 언어를 확인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지에 의해 시각적으로 다듬어진 모양은, 기억의 껍질을 덮은 몸을 그리게 되고, 언어에 들러붙는다.
끝으로, 작가가 언어적 구성체로서의 결과물을 다시 한번 해체하는 지점을 지적해야겠다. ‘나는 셋 아니 넷 아니 다섯’에서 드로잉의 각 부분을 해체하고 유사한 도상들을 골라내 묶은 일련의 콜라주 패널들이 이에 해당한다. 이는 언뜻 지시적으로 다가오지 않으며, 쉽게 의미로 환원되지 않는 단순한 시각적 표상들을 다시 한번 의미로 짚어내는 과정에 해당한다.
문자 기호들처럼 의미망을 전제하지 않은 비정형적인 선들을 구조적으로 분해하고, 그 선들이 사실 어떤 지시적 기호들을 형상화하고 있었음을 확인하고자 한다. 나는 국동완의 최근 작업 경향 중 자기 작업의 한 디테일을 확대해 캔버스로 옮기는 과정 역시 이와 상통한다고 보는데, ‘확대’의 방식이 결과적으로 추상적인 화면을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원리에 있어서는 전체적인 무의미의 이미지 세계를 분절된 언어의 단위로 해체하는 방식을 따르기 때문이다.
〈여객선 A Ferry〉의 콜라주, 〈데칼코마니 라이프 Decalcomanie Life〉의 부분을 확대한 ‘900x Magnification Series’, 그리고 ‘나는 셋 아니 넷 아니 다섯’의 콜라주에 이르기까지, 특정한 도상들을 이름-기호 아래에 묶고 펼치는 콜라주 방식은 구성체로서 이미지의 단위를 언어적 기호로 승인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왜 0주에서 40주로 발전된 몸의 형상은 분해되어야 했으며, 분해된 도상-조각들은 , , 등 아카이브 분류 체계와 같은 상위 분류로 다시 귀속되어야 했는가.
답을 해보자면, 애초에 국동완에게 이미지가 구성되는 방식은 유기체적인 살이나, 무의식의 탈구조적 상태라기보다는 ‘언어’였다고 할 수 있겠다. 작가는 속도감 있는 드로잉과 그를 통해 자동기술, 자유연상의 미적 형식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면서, 기실 그 자신의 언어 체계를 확인하고 구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