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llation view of 《Humming Head》(DOOSAN Gallery, 2019) ⓒ DOOSAN Gallery

여성 신체성을 가로지르기 1. 뼈와 싸개: 유동하는 신체 조각

이 글은 2010년 중반 전 세계적인 미투 운동(Me Too movement)과 한국의 페미니즘 리부트1를 경유하며, 한국의 젊은 여성 작가들이 탐색해온 ‘여성적인 것’과 ‘여성의 재현’에 대한 ‘보충’적인 글이다. 이 글은 한국의 페미니즘 미술이라는 계보학적 서사를 목표로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최근 가시화된 페미니즘 미술의 흐름과 언급들에서 누락된, 혹은 형성 중인 어떤 지점들에 주목하고자 한다.

최근 포스트 휴머니즘, 생태학, 물질적 전회라는 여러 담론적 흐름들 속에서 신체에 대한 페미니즘적 의미망은 갈수록 풍성해지고 있다. 또한 글로벌 네트워크와 미디어 환경 속에서 여성의 신체는 자본과 승인의 욕망이 뒤얽힌 더욱 모순적인 지점들을 노출하고 있다. 이에 대한 미학적 재현과 담론은 국내에서 여전히 맹아(萌芽)적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2010년대 이후 국내 젊은 여성 작가들의 작업들에서 이 모순적이고 복합적인 여성성에 대한 새로운 조망들을 분명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고민을 출발점으로 삼아 이 글은 미술에서 발화되는 여성의 욕망, 노동, 감정의 지대로서 ‘신체성’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신체성이란 이상한 말이기도 한데, 그것은 몸(body)에 대한, 특히 여성의 몸에 관한 이야기지만, 생물학적 몸 그 자체(그런 것은 없기도 하거니와), 즉 이분법적 성 담론에서 본질주의 페미니즘이 강조했던 여성적 특질의 긍정, 혹은 선언으로서 몸에 주목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몸은 이미 생물학적인 동시에 사회문화적 억압과 기호들이 각인된 ‘이미지로서의 몸’, 또한 트라우마와 고통뿐 아니라 분명히 언어화되지 못한 어떤 욕망을 탐색하고 있는 ‘변화하는 몸’이다.

하여, 여기서 여성적 신체성에 대한 접근은 재스비어 K. 푸아(Jasbir K Puar)가 말한 배치로서의 ‘신체성(Corporeality, 재현의 경제와 더불어 상호 침투하고 소용돌이치며 서로에게 정동을 전달하는 아상블라주)’2에 가까운 것으로,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1908-1986)가 말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성”으로서의 여성이자, 안드레아 롱 추(Andrea Long Chu)가 “모두가 여성이면서, 모두가 이것을 싫어한다”3고 이야기한 모순과 부정성의 공유 지대로서의 ‘여성적인 것(the female)’에 기반한다.


1. 뼈와 싸개: 유동하는 신체 조각
 
핼 포스터(Hal Foster)는 2000년대 들어 등장한 입체/설치 조각들의 당대적인 특징 중 하나를 ‘위태로움(the precarious)’이라 규정한 바 있다.4 물론, 동시대 미술 실천에서 조각은 대리석, 나무, 청동과 같은 순수한 물성과 고도의 숙련도를 자랑하는 조형성을 탈피했으며, 단독적 입상, 혹은 완결된 형태에서 떠나 파편적이고, 환경적인 양태를 띄어왔다. 이제 동시대 조각가들은 일상 용품, 잡동사니는 물론, 건축내장재와 같은 산업 재료와 폐기물에 가까운 사물들을 마치 시대의 요구라도 되는 양 미술관에 대거 들여놓는다.

하지만 핼 포스터가 지적한 조각의 ‘위태로움’은 이러한 지배적인 경향에 대한 형식 비평의 차원을 벗어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감수성이 미술 안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추려내고자 하는 어휘다. 토머스 허쉬혼(Thomas Hirschhorn), 이자 겐즈켄(Isa Genzken)과 같은 작가로 대표되는 이 위태로운 조각들은 일차적으로 작품의 불안정한 상태와 제한된 지속성을 일컫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예술가들이 다루고자 하는 사람들의 위기, 그리고 이러한 ‘취약한’ 얼굴들에 반응하는 예술의 윤리적 측면을 강조한 말이기도 하다.

이처럼 비정형성, 불안정성, 혼종성과 같은 동시대 조각의 특징을 시대적 감수성과 생명 정치(biopolitics)에 대한 반응으로서 읽을 수 있다면, 지금 한국의 젊은 여성 조각가들의 작업들에서 어떤 감각의 좌표, 혹은 현실에 대한 어떤 반응들을 읽어낼 수 있을까? 나는 지금의 조각들 속에서 희미한 성좌처럼 드러나는 몇 가지 특이점을 건져내보고자 한다. 이야기는 뼈에서 시작해 눈사람으로 끝난다.
 
현재 암스테르담에 거주하면서 한국과 네덜란드를 오가며 활동하는 이미래는 모터나 펌프로 구동시키는 키네틱 조각을 만든다. 이미래의 조각들은 철, 콘크리트, 석고, 세라믹, 천, 실리콘과 같은 다양한 산업적 재료들로 거칠고 기이한 육체성을 구축한다. 특히, 유동액들이 그 구조를 관통하거나 흘러내리면서 그로테스크한 기계 생명체, 혹은 ‘피부가 벗겨진’ 유기체의 기관을 떠올리게 만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슬픔, 처연함, 고통, 연민과 같이 그녀의 조각이 내뿜는 특유한 정서가 형태의 유사성보다, 상승과 낙하, 흡입과 배출과 같은 일련의 운동성에서 비롯한다는 점이다.
 
돌이켜보면, 2010년 중반 이미래의 초기작들에서는 ‘골조’라고 부를 만한 뼈의 운동성이 더 두드러졌다. 스스로 “뼈가 있는 조각을 만들고 싶다”고 말한 바 있는 이미래는 〈뼈가 있는 것들(Things with Bones)〉(2016)이나, 〈Support, Lubricate, Rotate and March〉(2017)처럼 기다란 허우대로 사지를 느리게 회전시키거나 상하 운동을 반복하는 조각들을 만들었다. 그러한 움직임들은 대개 공허하고 무력하다는 느낌을 주었고, 때로는 바보 같기도 하고 서글프게 느껴지는 어떤 리듬을 자아내곤 했다. 속단하자면, 그녀에게 ‘뼈’란 구조를 뒷받침하는 지지체라기보다, 움직임을 위한 일련의 축이자 ‘모체(matrix)’였던 것 같다.

점차 그러한 움직임은 글리세린, 윤활제, 유동액과 같은 재료들과 만나며 더욱 유기적인 모습을 띠게 되는데, 이것들은 갈수록 움직임을 부드럽게 구현하기 위한 기능적인 역할보다는 질척이고 역겨운 체액의 질감을 구현한다. 펌프의 맥동하는 힘과 함께 매달린 조각을 타고 흘러내리는 유액들은 유기체의 형상인 동시에 ‘비체(卑體, abject)’의 형상을 열어낸다.
 
2020년 열린 개인전 《캐리어즈(Carriers)》에서 이미래는 그동안 탐색해온 대형 키네틱 조각의 물질성, 운동성, 그리고 그것들로 의도하는 정동을 폭발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비체 조각’을 전경화했다. 중고 거푸집 나무판으로 나선형의 ‘커튼’을 만들어 은밀하게 들어가게 되는 공간—여기서 당연히 우리는 자궁을 떠올린다— 안에는 천장에 매달린 한 쌍의 조형물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들은 서로 연결된 채 호스들을 통해 액체를 흘리고 뿜어내고 있다.

아래쪽에는 산업용 와이어, 로프, 체인들이 비닐이나 실들을 너덜너덜 달고 있는 하나의 몸체가 보이는데, 이는 엎드려 있는 조각 〈누워 있는 모양〉이 콘크리트와 시멘트로 만든 정적인 조각들과 대조를 이루며 극적인 무대를 선보인다. 이연숙이 세밀하게 기술한 대로, 여기에서 “토해내지고 흘러나오는 끈적이는 액체들”은 “여성성의 비체적인 질감을 활성화”한다.

그러나 그보다 이것들은 “낙하하는 비통함”과 “비가역적인 사건(죽음)에 대한 예감”으로 충전된 슬픔을 환기시킴으로써,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가 말한 ‘실존적 구토’를 유발한다.5 그러한 공허, 그러한 아득함을 우리는 바로 바타유(Georges Bataill, 1897-1962)의 문장에서 발견한다. “만질 수 있는 어떤 것이 객관적으로 우리에게 구토를 느끼게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감정은 텅 빈 어떤 것에 대한 감정이며 우리는 그것을 아득함 속에 느낀다.”6
 
이제 이미래의 매달린 조각에서 구조를 지탱하는 것은 천장에 매다는 줄, 순환계처럼 보이는 호스들, 비계 등이다. 말하자면 ‘뼈’는 사라지고, 이제 혈관, 내장 기관, 사지들의 얽힘 그 자체가 신체라는 형상을 지탱한다. 이것은 물론,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의 ‘기관 없는 신체’를 환기시키지만, 그보다는 희생 제의로 바쳐진 제물, 반쯤은 죽은 유령 같은 타자들의 형상들을 더 직접적으로 떠올리게 만든다.

벗겨지고 관통 당하는 몸, 죽어도 죽지 않은 몸, 발작하는 몸.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그 조각이 차가운 기계장치들이라는 점을 의식한다. 때문에 이미래의 작업은 단순히 언캐니(uncanny), 기괴함 혹은 참혹함에 재현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공포와 매혹이라는 폭력에 대한 양가적 감수성을 건드린다. 《캐리어즈》에서 ‘피부가 벗겨진’ 샤먼이라는 레퍼런스가 극단적인 감수성을 위한 환유적 장치인 것처럼 말이다.
 
2022년 MMK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개인전 《봐라, 나는 사랑에 미쳐 날뛰는 오물의 분수(Look, I’m a Fountain of Filth Raving Mad with Love)》는 철근, 콘크리트, 시멘트 등 거칠고 무거운 산업 재료들이 대거 들어오면서 마치 공사장 같은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프레더릭 키슬러(Frederick Kiesler, 1890-1965)의 ‘엔드리스 하우스’를 본뜬 거칠고 앙상한 공간 구조물, 컴컴한 입을 벌리고 시시때때로 회전하는 콘크리트 믹서, 한쪽 벽을 메운 콘크리트 거푸집에 새긴 김언희 시인의 시구들은 흙, 똥과 같은 원초적이고 반(反)문명적인 날것의 감각을 구현한다.

포도알처럼 매달려 있는 구(球)들과 콘크리트 믹서의 말 없는 입들, 그것은 심연과 같은 공허를 품고 있으면서, 바깥을 집어삼켜 안을 구성해야 하는 구멍의 형상들이다. 《캐리어즈》가 ‘보어(vore)’라는 환상을 형상의 출발점으로 삼았다면, 이런 구멍들은 우리가 배설하는 존재인 동시에 ‘삼키는 주체’(멜라니 클라인, Melanie Klein, 1882-1960), 폭력적인 주체임을 환기하는 듯하다. 또 이미래는 이 삼키는 주체의 내벽을 열어 보임으로써(전시는 언제나 관람자가 어떤 내부로 진입하게 되고 조각의 내부를 들여다보게 만든다), 이 주체 안에 깃든 선홍빛 욕망과 불안, 고통, 슬픔을 불결하고도 매혹적인 방식으로 마주하게 한다.
 
윤지영은 2021년 개인전 《Yellow Blues》에서 다음과 같은 문구를 전시장에 적어두었다. “안에 있는 게 당연하다고 믿어지는 뼈는 가끔 밖에 있기도 하다.” 윤지영에게 ‘뼈’란 어떤 유기체 혹은 사물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구조일 것이고, 그녀는 그러한 구조가 내부보다는 외부에 있을 수 있다고 여긴다. 말하자면, 외면의 형태를 결정하는 내적이고 본질적이고 결정적인 계기란, 사실 이것의 형성, 고정, 변화를 이끈 외부적 힘, 또는 내사된 바깥, 내재화된 외부일 것이라는 이야기다.
 
2015년 《적당한선에서》부터 선보인 〈모난절충〉 작업에서 추상적인 조형물들은 공간의 사방을 가로지르는 줄들에 성기게 매달려 있거나 팽팽하게 당겨지고 있다. 추의 역할, 혹은 버팀대의 역할을 각자 담당하는 오브제들은 유기체의 기관을 연상시킴과 동시에, 사회적 관계망을 보여주는 하나의 장면으로 작동한다. 윤지영은 신체로 은유될 수 있는 이러한 조각들로 어떤 ‘태도’를 보여주고자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커다란 하나를 희생해 여럿을 살리는 것”이라든지, 온전하다고 믿는 어떤 형상을 고수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외부 힘이 필요한지 드러내”고 싶다는 것이다. 그녀가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고민과 태도를 설치 조각의 형태와 벡터로 번역하게 된 계기에는 ‘세월호’라는 트라우마적 사건이 있었고, 미투 운동이 있었다. 하지만 아슬아슬한 균형과 팽팽한 긴장 속에서 서로 당기고 기대는 윤지영의 조각에는 사회적 역할에 대한 강조보다 사회적 역학 속에서 희생하고, 버티고, 일으켜 세우는 연약한 개인들의 정서들이 강력한 무드를 형성한다.
 
윤지영의 작업은 개인들의 상호연결성이라는 맥락에서 그 연결의 접촉지대로서 신체와 ‘싸개’를 주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같다. 전례 없는 팬데믹은 개인들의 연결 가능성을 다른 온도로 체감하게 했고, 윤지영은 그렇지 않아도 잦은 질환에 시달리는 자신에 대한 반영이자 동시대 아시아 여성의 실존적 조건에 대한 반응으로서 하나이자 여럿인 추상 조각들을 만들어냈다. 특히 이 조각들에서 자주 등장하는 재료는 실리콘이다. 특수 분장이나 성형 수술에서 흔히 쓰이는 실리콘은 곧바로 인체의 피부를 상기시킨다.

체온과 비슷한 섭씨 36도가 되면 색이 변하는 구형 조각 〈계속 밤〉은 관객이 끌어안을 수 있는 온기 어린 행성으로 태어났다가, 〈레다와 백조〉 작업을 통해 뿌리 깊은 가부장제 신화를 되받아치는 타투의 신체가 된다. 개인전 〈Yellow Blues〉에서 다양한 입방체 조각들은 자신의 실리콘 싸개를 벗고, 서로의 싸개를 바꿔 걸친다. 몰드메이킹, 캐스팅 등의 집약적인 노동을 거친 윤지영의 조각들은 이러한 본체와 싸개의 맞교환, 혹은 서로의 상실 속에서 목적을 잃어버린 몸, 오직 가면으로서, 유동하는 외피로서만 존재하는 대체물이 된다.

그리고 이는 탈피를 거듭하거나, 일시적인 형태만을 유지하는 잠재적인 몸(특히, 여성의 몸)을 환기한다. 무엇보다 몸에 맞지 않기에 민망하고 우스꽝스럽고, 당겨지다 못해 구멍 나고 찢어진 싸개들은 우리가 피부에 투사하는 자기애, 좌절 그리고 외부적(사회적) 강압을 실감케 한다.
 
엘리자베스 그로스(Elizabeth Grosz)는 실상 몸이란 물리적 실체이기도 하지만 주체가 세계 속에서 행동하면서 접하는 다양한 접촉 양식으로 형성된 ‘이미지’라고 이야기한다. 언제가 환경, 즉 바깥과 함께하는 이러한 ‘몸-이미지’는 몸에 대한 다양한 정서적, 리비도적 태도로 구성되어 특정한 형태를 수행하기 위한 부분이자 능력이 된다. 따라서 주체가 경험하는 이 ‘몸’이란 이미 항상 타자들의 몸과 맺는 관계에 의해 매개되고 연결된 것이다.7 윤지영의 ‘싸개’들은 인체(특히, 피부)에 대한 단순한 유비가 아니라, 이러한 ‘몸-이미지’의 매개성과 연결성을, 그리고 그 안팎을 전사(轉寫)하는 신체의 현실성을 드러낸다.
 
그런데 싸개 또는 껍데기로만 이루어진 몸이 있다면 어떨까? 말하자면, 뼈가 없이 피부로만 만들어진 몸 말이다. 우리는 그러한 실체들을 황수연의 조각에서 발견한다. 2017년경부터 본격적으로 선보인 황수연의 ‘종이 조각(paper sculpture)’들은 옷을 만드는 재단 자의 곡선과 직선을 사용해 종이를 재단하고 붙여 만들어졌다. 따라서 이 조각들은 과거의 조각처럼 물성에서 먼저 출발한 것이 아니라 도면에서 시작한다. 이는 컴퓨터 그래픽, 3D프린팅과 같은 기술이 신생 조각가들에게 미친 모델링의 사고 변화를 보여주기도 한다.

따라서 이 작업에서 평면을 입체로 부풀리고, 도면을 3차원으로 구현하는 욕망과 행위 또한 핵심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이 조각들이 철저히 의도되고 계획된 결과물이라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종이라는 재료가 지닌 허약함은 언제나 시뮬레이션해본 조각의 최종적 형태를, 완벽한 이음새와 조형성을 방해하고 좌절시킨다. 그런 불완전함과 한시성을 보란 듯이 고스란히 드러내는 황수연의 조각들은, 작가 자신의 말마따나 항상 “연약함과 강함, 가벼움과 무거움, 가혹함과 소중함의 사이”에서 머문다.
 
〈꽃사람〉, 〈똥파리〉, 〈소프트 헤드〉, 〈화이트버드〉 등의 이름을 달고 있는 ‘종이 조각’들은 귀여운 동물 캐릭터처럼 보이기도 하고, 의인화된 변종으로도 보인다. 이러한 비인간 생태계는 2019년 개인전 《허밍헤드》에서 각자의 부분들을 더하고 빼가며 더욱 다종다양한 형상들로 나아갔고 일련의 종적 형상을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의 도면이 연속적으로 사용되면서 서로 닮은 꼴로 증식되고 변조되는 형태를 낳게 된 것인데, 황수연은 이러한 과정을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나는 언제나 ‘형상’이라는 것을 가지고 싶었는데, 돌이켜보니 내가 정작 원한 것은 형상이 빠져나올 수 있는 메커니즘이었던 것 같다.” 이는 황수연의 관심사가 상상력 넘치는 생태계를 번식시키는 데 있지 않다는 이야기다. 말하자면 이들 조각은 시뮬레이션이나 모델링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이를 배반하고 우연성과 만나 새롭게 분기하는 부분들의 배치, 준 안정적이면서 형성 중인 사건, 굳이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 1924-1989)의 용어로 말하자면 개체화(individuation)라는 메커니즘을 보여준다.
 
이처럼 황수연의 조각은 기획(program), 확장, 완성이라는 인간적(더 정확히는 ‘남근적’) 욕망을 항상 배반하는 이상한 유희를 품고 있는데, 조각적 관심사로 보자면 물성에 대한 의심과 반항으로 점철된 것처럼 보인다. 물성은 그 사물의 적합한 용도를 결정하고, 사물의 재료가 지닌 강도와 무게는 용도에 맞게 최적화될 수 있는 형태를 결정하곤 한다. 그런데 황수연의 반항—노랑 고무줄을 모래처럼 잘게 잘라놓기, 모래에 본드를 부어 돌처럼 굳히기, 알루미늄 포일 조각을 땅땅하게 만들기 등—은 물성과 마찰을 일으키며, 그 사물의 본성(이라 여기는 무엇)을 거스르는 방법론을 고수한다.

‘종이 조각’까지 가닿은 그러한 방법론은 어쩌면 가질 수 없는 것을 갈망하고, 그 실패를 의식하면서 쪼그라들고 사라질 것들을 껴안는 태도일 수 있겠다. 그녀의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그녀는 정말 눈사람 만들기를 거듭하고 있다. 너무나 가벼운 무게와 한순간의 부피이지만 그것은 한나절 꽤 단단하고 눈부신 존재가 된다. 그러나 더 단단하고 더 오래 존재하기를 욕망하는 순간, 눈사람은 부서지고 만다.

그래서 그녀의 조각은 한시적으로 서로 받쳐주고 맞붙어 살아가는 어설프고 불완전한 부분 존재들(parts)의 소극(farce)이기도 하다.8 그런데 이러한 해학이 지니는 힘은 오히려 강하고 완벽해 보이는 것들을 우습게 만든다는 것이다. 또한 동시에, 나약해 보이는 삶들의 허무함과 무모함이 사실 얼마나 견고하고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