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수연(b. 1981)은 재료의 물질성과 자신의 신체가 만나며 발생하는 관계와 변화들을 사유하고, 이를 조각의 형태로 표현하는 작업을 해왔다. 작가는 주변의 다양한 물질들을 몸으로 쓰다듬고, 만지고, 마찰시키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낯선 물리적 현상들에 주목한다.


황수연, 〈Black Effector〉, 2023, 사진 인쇄물, 이펙트 스프레이, 글리터, 3D 프린트 라이터와 신발, 240x109x78cm © 지갤러리

황수연은 종이, 호일, 모래 등 다양한 재료를 오랜 시간 탐구하며 재료 고유의 특성과 시간의 흔적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조각을 제작해 왔다. 그는 작업을 자신과 동등한 존재로 바라보며 그 연약함을 연구하고, 이해하고, 또 받아들이는 태도로 임한다.
 
그는 신체적 행위를 통해 재료의 변화를 관찰하고, 재료가 변화하며 도달한 상태를 받아들이며, 더 이상의 개입이 필요하지 않은 지점에서 자신의 행위를 멈춘다.
 
따라서 황수연의 작업에서는 작가의 행위가 재료를 일방향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재료의 반응과 상태에 따라 조율되고 멈추는 과정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황수연, 〈A4 드로잉〉, 2008, 종이에 연필, 가변크기 © 황수연

초기 작업에서부터 황수연은 재료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각 작품에 고유한 정서와 성격을 부여하며 기존의 성질을 벗어나거나 특이한 형태의 조형물을 제작해 왔다. 예를 들어, 2008도 작업인 〈A4 드로잉〉의 경우, 국제 표준 규격 종이인 A4지를 연필로 까맣게 칠하는 반복적 행위를 통해 종이의 결과 질량을 변화시킨다.


《도는 달걀》 전시 전경(금호미술관, 2017) © 금호미술관

그리고 2017년 금호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도는 달걀》은 모래, 알루미늄 호일, 종이, 고무줄, 파스텔과 같은 재료들의 가장 기초적인 성질을 집요하게 탐색하면서 조각화한 결과물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황수연은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재료들을 두드리고, 주무르거나, 긋는 등의 행위를 반복했다. 가령, 얇고 가벼운 알루미늄 호일을 뭉치고 망치질을 함으로써 단단한 덩어리로 만들고 (〈더 단단한〉, 2014-2016), 흩날리는 성질을 가진 모래에 본드를 부어 견고하고 묵직한 형상으로 표현했다(〈더 무거운〉, 2016).


황수연, 〈Material table3. 종이 얼굴, 종이 몸〉, 2016 © 황수연

한편, 종이 조각 작업은 신체에 맞는 옷을 만들기 위한 재단용 곡선자를 이용해 만들어진다. 곡선자를 사용하여 도면을 제작하고 이를 합쳐 조각으로 세울 때에도 종이의 물성을 거스르지 않으며 마무리한다.
 
이로써 곡선자로부터 얻은 형태는 어깨의 선, 겨드랑이의 윤곽을 내포하며 유연한 선을 지니는 동시에, 종이의 날카로운 옆면과 같은 직선과 함께 뒤섞인다.
 
이러한 작업은 견고함과 연약함 사이에서 신체의 흔적과 물질의 표면을 중첩하고 역전시키며 납작한 종이에 부피를 부여하고 다시 표피로 돌아오길 반복한다.


《허밍 헤드》 전시 전경(두산갤러리, 2019) © 두산갤러리

나아가, 2019년 두산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허밍 헤드》에서는 기존의 종이 조각들이 마치 진화하듯 변화한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황수연은 구부리거나 접거나 구기는 것도 가능한 성질을 갖고 있는 종이로 '종이 얼굴'과 '종이 몸'을 만들었다.
 
정해진 부피 안에서 종이를 재단하고 접고 붙이는 과정 속에서 조금씩 형상이 만들어지고, 이들이 마치 생명체와 같이 하나하나의 인상을 갖는 얼굴이 되었다. 신체에 맞는 옷을 짓기 위한 재단자로 만든 종이조각은, 사람의 몸을 닮았고 계속 만들어지면서 각자 서로의 형상을 닮아가게 되었다.


황수연, (좌) 〈나태(머리)〉 / (우) 〈두 개의 몸과 두 개의 구름〉, 2019, 프린트, 스테인리스 스틸 / 프린트, 철, 62.5×52×60cm /173×130×207cm © 두산갤러리

《허밍 헤드》에서 종이조각들은 더욱 제각각 다양한 형상과 특징을 가지면서 진화해 나갔다. 어떤 종이조각들은 키가 커졌다. 혹은 종이의 연약한 성질을 극복하려는 듯 형태는 유지한 채, 더욱 단단한 것으로 몸을 바꾸기도 했다.
 
큰 것, 작은 것, 넓적한 것, 날씬한 것, 다양한 형상의 종이 몸과 종이 얼굴들은 눈이 닮고 코가 닮은 것처럼, 왼쪽이 오른쪽을 닮기도 하고, 위쪽과 닮기도 했다. 마치 가족들처럼, 혹은 하나의 새로운 종(種)처럼 서로서로 조용히 이어지는 종이조각들은 각자의 닮음과 차이를 바라보게 한다.


황수연, 〈녹는점〉, 2020, 흑연, 종이, 스테이플러, 29.6x19cm © 누크갤러리

이렇듯 황수연은 ‘종이’라는 친숙한 재료의 물성이 신체와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변화하고 형태를 갖추는지를 지속적으로 탐구해왔다. 평면과 입체가 서로를 참조하며 발전해온 종이 조각 연작은, 이후 ‘녹는점’(2020-) 연작에서 기존의 부피감을 벗어난 납작한 형태로 전환된다.
 
단단하거나 풍성한 형태를 지녔던 기존의 형상은 종이 위에 연필 드로잉과 종이 콜라주로 새롭게 나타난다. 부피감이 사라진 듯 보이는 드로잉은 본래 입체였던 형상이 녹아내려 평면에 안착한 순간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작가는 연필 드로잉을 하는 과정에서 ‘동그랗게 녹아드는 것’을 상상했다고 말한다.


황수연, 〈녹는점〉, 2021, 흑연, 종이, 130x74cm © 학고재 갤러리

한편, 여러 겹의 종이를 중첩해 만든 종이 콜라주는 무언가를 ‘납작하게 담아두는’ 상태를 상상하며 제작되었다. 부재로 인해 채워지고, 다시 사라지는 순환적 과정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녹는점’이라는 제목으로 응축된다.


황수연, 〈이펙터〉, 〈피셔 1, 2〉, 〈소파쥐〉, 2022, 《조각충동》 전시 전경(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2022) © 서울시립미술관

한편, 2022년 북서울미술관 기획전 《조각충동》에서 황수연은 세 개의 개별적인 덩어리면서 서로 연결되는 ‘종이 몸’ 조각 〈이펙터〉(2022), 〈피셔 1, 2〉(2022), 〈소파쥐〉(2022)를 선보였다.
 
이 일련의 조각은 피터 브뤼겔(Pieter Bruegel)의 〈맹인의 우화〉(1568)를 모티브로 제작되었다. 세 개의 큰 덩어리로 이루어진 ‘종이 몸’은 서로의 일부를 몸의 한 부분처럼 끼워 맞출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하나의 덩어리로 연결된 채 서로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앞날을 향해 나아가는 듯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황수연, 〈이펙터〉, 2022, 프린트된 종이, 이펙트 스프레이, 글리터, 280×150×87cm © 황수연

앞서 살펴본 것처럼 황수연은 그동안 사람의 옷을 재단할 때 사용하는 자를 활용해 인체의 스케일과 제스처를 형태의 기본 단위로 구성하고, 뼈대 위에 종이를 일정한 규칙에 따라 붙여 속이 비어 있는 ‘종이 몸’을 만들어왔다. 납작하고 가벼운 종이를 입체로 구성하는 과정에서 전통 조각의 내적 구조를 변형해온 것이다.
 
이 작업에서는 여기에 부분적으로 나무를 사용하고, 프린트된 이미지 데이터를 피부로 활용하면서 재료와 구조에 변화를 주었다. 작가는 얇은 종이가 중력과 장력을 견디며 ‘텅 빈 몸’이라는 결핍을 안은 채 서 있는 모습에서 몸이 내포한 갈등을 발견하고, 이를 조각의 구조를 통해 드러내고자 했다.


《마그마》 전시 전경(아라리오갤러리, 2024) © 아라리오갤러리

한편, 2024년 아라리오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마그마》에서 황수연은 소셜 미디어 숏폼 컨텐츠를 신체적 수행으로서 재해석한 결과물들을 선보였다.
 
일상에서 쉽게 노출되는 숏폼 이미지들은 작가에게 수많은 유동적 잠재성으로 존재했는데, 그중 세상의 다양한 물품들이 제작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상에 특히 끌렸다고 한다.
 
작가는 이들 움직이는 이미지를 간섭하고 그 속에서 조형적 요소를 끄집어내 입체적 조각으로 이끌어냈다. 이 과정에서 작가의 신체는 따라하기의 방식으로 개입했고, 숏폼 속 대상의 형태나 속성은 사적 체험과 해석이 더해진 새로운 조각으로 탄생했다.


황수연, 〈나쁜 라켓 ”…”〉, 2024, 스테인리스 스틸, 와이어, 157x200x90cm (2pcs.) © 아라리오갤러리

예를 들어, 작품 〈나쁜 라켓 ”…”〉(2024)은 배드민턴 라켓의 제작 과정에 대한 숏폼 영상에서 영감을 받아 그 제작 과정을 작가 스스로 수행하면서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그 과정에서의 조형적 고민이나 예외적 시도들이 더해지면서 유사한듯 매우 다른 형태로 귀결되었다.
 
한편, 평면 조각들은 각각 제품을 절단, 성형하는 도구인 칼금형과 점토를 주재료로 하는 두 개의 연작으로 구성됐다. 먼저 ‘칼금형’ 연작은 제스모나이트에 칼금형을 배치하고 아크릴 미디엄이나 코팅제 등을 더하면서 입체와 평면을 가로지르며 상호 침투하는 공간 구성을 보여준다.
 
이 작업 또한 숏폼에서 파생된 입체 조각과 비슷한 맥락에서 재단하고 생산하는 프로토타입으로서 칼금형의 유동적 생산성에 새로운 물성을 가미해 추상적으로 확장한다.


황수연, 〈쥐〉, 2023, 나무 패널에 아크릴, 점토, 아크릴 미디엄 겔, 흑연, 25.7x17.7cm © 아라리오갤러리

또 다른 연작 ‘클레이 마인드’는 점토를 이용해 회화성을 표현한 조각이다. 점토 특유의 물렁한 재질을 이용해 눌러지고 문질러지는 마찰면의 촉각성과 작가의 지속적인 신체적 자극을 고스란히 화면에 드러내며 하나의 물리적 현상을 만들어냈다.
 
또한 점토를 중첩시키면서 표현되는 회화적 요소와 조각적 요소, 그리고 점토라는 재료의 물리적 단단함과 시각적 연약함을 공존시켜 이질적인 시각적 쾌감을 증폭시킨다.


《파스텔, 총알, 아름다운 손가락들》 전시 전경(지갤러리, 2024) © 지갤러리

이렇듯 황수연은 재료와 끊임없이 씨름하고,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 다양한 조각적 실험을 이어왔다. 재료의 성질을 몸으로 경험하는 과정에서 작가는 생물학적 관점으로 자신의 작업을 바라보며, 일상에서 포착한 섬세한 정서를 더해 조각의 동시대적 가능성을 확장하고 있다.

"저에게 만들기는 존재할 수 있는 방식과 그 조건을 이해하는 일입니다. 몸이 지면에 닿을 때는 물리적이나 사회적으로 마찰이 일어나기 마련이어서 촉각적이고, 동력이라는 것이 작용합니다.
 
조각이라는 본질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조각이라는 것을 바라보고 그것이 될 수 있는 조건들과 저의 개입이 일어납니다." (황수연, 아라리오갤러리 《마그마》 인터뷰 중)


황수연 작가 © 키아프 서울

황수연은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조형예술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최근 개인전으로는 《파스텔, 총알, 아름다운 손가락들》(지갤러리, 서울, 2024), 《마그마》(아라리오갤러리, 서울, 2024), 《파츠》(학고재 디자인 I 프로젝트 스페이스, 서울, 2021)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코미디》(d/p, 서울, 2026), 《Provisional Forms》(CYNC, 서울, 2026), 《끝없이 반짝이는 거울의 방》(우란1경, 서울, 2025), 《근사치》(휘슬, 서울, 2023), 《조각충동》(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서울, 2022), 《작아져서 점이 되었다 사라지는》(아트선재센터, 서울, 2021), 《젊은 모색 2019: 액체 유리 바다》(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19)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황수연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2021) 및 두산레지던시 뉴욕(2019) 등에 입주하여 작업을 했으며, 그의 작품은 서울시립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