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llation view of 《Hwadu 話頭》 © Suwon Museum of Art

최태훈의 조각은 그간 조각이란 매체의 성립 요건을 다루는 실험으로 간주되어 왔다. 또한 “레디메이드 사물의 조각적 해석으로 본격적인 조각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작가로서 그의 조각은 “한국 조각의 최전선에서 조각의 귀환을 알리는 젊은 판도의 작업”이라 평가받아 왔다. 용도가 지정된 대량 생산 제품에서 조각의 궁극적 ‘무용성’이라는 창조적 가치를 구출해내는 그의 작업은 지금까지 여러 구체적인 전환점을 맞이하며 변화했다.

2013년부터 그는 〈Mother’s multitasking device〉과 같이 기존 생활용품을 과도하게 결합한 초(超)기능적 사물 조각을 제작했다. 같은 관심의 연장에서 그는 2018년 개인전 《형태는 형태를 따른다》를 통해 ‘DIY 조립’을 내세우는 이케아 가구와 같은 대량 생산 제품을 이른바 “DIY 해킹”이란 행위를 통해 예술 작품으로 전환하는—혹은 “해방”하는 생산적 변형의 조각적 실험을 선보였다. ‘DIY 해킹’의 “최소 조건”이자 자기 규칙은 다음과 같다.

“① 스스로 직립할 것 ② 모든 방향에서 형태가 다를 것 ③ 어디서 보아도 완성도가 균질할 것 ④ 오브제를 재가공(절단, 절곡 등)하지 말 것.” 이와 같이 “기성품의 형태와 유통방식의 문법”을 차용하되 그러한 문법의 의도를 배신하는 ‘해킹 조각’은 제품과 작품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왕복하며 미적 대상으로서 양자의 중첩 상태를 드러낸다. 

한편 그는 2021년을 기점으로 이종적인 사물과 재료의 이질적인 결합을 통해 “기능주의 너머를 상상하는 소조(modeling)” 연작 ‘살(SAL)’로 옮겨갔다. 특히 2023년 2부로 나뉘어 진행된 개인전 중 1부인 《필드 (FIELD)》에서 그는 건축용 내장재로 사용되는 발포 우레탄 폼을 적극 활용하여 마치 전시 공간을 숙주 삼아 몸집을 불려 나가는 듯한 인공 자연을 창조했다.

우레탄 폼이라는 재료 자체가 지닌 “의지”와 “생명력”은 작가로 하여금 경화 단계에 따라 자연스레 도출되는 “우연적이면서도 준(準)자율적인 형상”을 긍정하게 만든다. 규칙과 논리를 따르던 이전 작업과 비교해 어떤 의미에서 작품 제작 과정의 통제권을 재료에 통째로 양도하는 이런 그의 변화는 “최근에는 직관적으로 작업을 시작한다”고 밝힌 발언에서 또한 드러난다.

아마도 작가이자 개인으로서 최태훈은—마치 이케아 가구와 우레탄 폼이 “대안 가족”처럼 하이브리드 결합하듯—살아가며 자연스레 만나게 되는 어떤 변화와 전환의 우연한 계기와 화학적 반응을 경험하게 된건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여성 조각(가)를 다룬 기획전 《집(ZIP)》의 기획과 제작이 그에게 이번 《생생화화 : 화두》에서 발표한 연작 ‘지지체’(2025)의 아이디어를 제공했듯 말이다. 

그는 해당 전시의 기획자 역할을 통해 전시 제작 과정에서의 미술계 내 행위자들의 중요성과 전시라는 결과 자체가 이러한 행위자들, 즉 ‘협업자들’의 비가시적/주변부적/재생산적 노동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전시-결과라는 중심이 협업-과정이라는 주변과 그 위상이 역전되는 순간이다. 이를테면 전시는, 작품은, 결과는 그들을 위해 희생(!)되는 나머지가 없이는 결코—조각 매체의 가장 오랜 구성 원리이기도 한데—‘직립’할 수도 존재할 수도 없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 자체는 완전히 새로운 발견이 아니라 지금까지 그가 가져왔던 과정에 대한 관심과 연결된다. 그는 이미 이렇게 말했다. “내 작업에서 중요한 건 특정한 형태를 구현하는 일이 아니라 프로세스 자체이다.” 최종 형태가 아닌 과정 자체를 작품을 통해 드러 내려는 그의 시도는 로버트 모리스와 같은 예술가에 의해 이끌어진 ‘과정 예술(process art)’라 불린 사조를 떠올리게 만든다. 완성된 공장제 오브제 중심의 미니멀리즘에 반대하며 출발한 프로세스 아트는 재료의 내재적인 속성과 물리 법칙과 같은 자연적인 요소를 작품을 구성하는 필수 원리로 내세운다.

로버트 모리스는 1968년 발표한 텍스트 「반형태 (Anti Form)」에서 “과정의 가시성”을 옹호하며 예술 작품은 이상적인 목적이 아닌 “도구, 제작 방법, 재료의 본질과 같은 수단”의 탐구와 활용을 통해서만 “긍정적”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이런 관점에서 왁스나 펠트, 플라스틱과 우레탄 폼과 같은 가변적인 재료와 “자르고, 매달고, 떨어 뜨리는” 즉흥적인 행위의 우연한 접속/결합/‘협업’은 작품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만들어 가도록(making itself)”하는 계기다.

이제 ‘지지체’ 연작을 보자. 희고 휘어진 채로 ‘반쯤’ 직립한 그의 조각은 평소 작가가 작업실에서 사용하는 도구들, 그러니까 물질적 협업자들을 거푸집 삼아 액상형 연질 우레탄을 위에서 아래로 ‘붓는(pouring)’ 기법으로 만들어졌다. 붓는 기법은 과정 예술의 일원이라 평가되는 린다 뱅글리스의 삼차원적 회화를 연상하게 만든다. 그는 조각이란 인공적 매체에서 자연을 발견하고 발굴하려 시도했던 예술가다.

최태훈의 ‘지지체’는 지난 ‘살(SAL)’ 연작에서 발견되는 해체와 조립의 더하는(additive) 기법과는 달리 오로지 재료가 가진 물성의 특성에 의존하며 이질적 관계들의 상호적 얽힘/작용/접촉이라는 ‘필연적 우연’에 기대하는 조각이다. 주형 단계에서 순식간에 폭발하듯 부풀어 올랐다가 경화 단계에서 “스펀지와 고무”처럼 부드럽게 굳어가는 액상형 연질 우레탄은 최종 형태를 예측하기도 통제하기도 어렵다는 점에서 다루기 까다로운 재료다.

다만 재료가 자신의 가능성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한 조건들—배합 정도나 적정 온도와 같은—을 미리 고려할 수는 있다. 작가는 이런 과정에서 제반 상황을 조성하고 조율하는 ‘협업자’의 위치로 물러난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자신을 작품의 수단으로 격하하는 결정이다. 그는 스스로를 “테이블, 사다리, 손수레, 팔레트” 등과 같은 작업 생활의 사물들로—그리 특별하진 않지만 작품 제작 과정에 있어서는 필수적인 그런 도구들로 만든다. 다시 말해 주변부적/비가시적/비인격적 대상들과 동일시가 있다.

작가에 의해 명료하게 설명됐듯 이런 도구들은 “결과물”의 제작이라는 “최종 과정에서 탈각되는 존재”이기에 “가시화되지 않는”다는, 단지 결과물을 위한 ‘지지체(support)’로만 기능한다는 존재론적 특성을 지닌다.

더욱이 도구는 우레탄과 같은 개성적인 재료가 자신을 전면적으로 드러내며 그 자체로 작업의 물리적/물질적/매체적 토대가 되는 상황과는 정반대로 작업 과정이라는 시간과 공간에 용해되며 일종의 ‘사라지는 매개자(vanishing mediator)’로 남겨지게 된다. 최태훈의 조각에서 이들의 부재는 조각의 표면에 지표처럼 새겨진 사물의 무늬와 거푸집 틈새로 흘러 넘쳐 굳은 우레탄의 부피를 통해 일시적으로 포획되어 세상에 자신을 노출한다. 조각은 마치 그들을 기억하고 애도하기 위한 희고 물컹대는 기념비 같다, 애처롭고도 사랑스러운. 

제품과 작품, 인공과 자연, 중심과 주변, 외부와 내부의 경계와 차이를 질문하며 이들의 위상을 뒤바꾸는 조각적 실험을 지속해온 최태훈은 이번 작품을 통해 ‘협업자들’의 유비를 통해 (비)인간적 행위자들에 대한 자신의 관계론적 지향과 태도를 분명하게 제시한다. 이는 작가가 앞으로 펼쳐진 자신의 경로에서 만날 무수히 많은 변곡점 중에서도 특히 소중한 전환의 지점일테다. 특히 조각을 동반 삼는 삶에 있어서 말이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