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훈(b. 1982)은 사물과 인간 사이에서 작동하는 관계와 힘에 개입하며, 기존의 기능과 사용의 논리를 넘어선 사물의 가능성을 탐구해왔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 규정된 사물의 용도와 기능에서 벗어나 새로운 상호성을 모색하는 그의 작업은 조각적 실천을 통해 사물과의 관계를 다시 구성한다.


최태훈, 〈Mother’s multitasking device〉, 2013, 방부목, 합판, 소형 냉장고, 컴퓨터, 모니터, 스피커, 회전의자, 바퀴, 화장대, 매트, 가변크기 © 최태훈

최태훈은 흙을 붙이고 떼어내며 덩어리를 만들어가는 소조적 감각을 바탕으로 생활 주변의 사물을 직접 만지고 더듬으며, 익숙한 물건에 잠재된 형태와 가능성을 드러낸다.
 
초기 작업에서 최태훈은 쓰레기통, 쓰레받기, 빗자루 등 일상의 사물들을 조각으로 변환하는 작업을 선보였다. 예를 들어, 2013년도 작품인 〈Mother’s multitasking device〉에서 그는 소형 냉장고와 컴퓨터 등의 다양한 생활용품들을 결합하여 초(超)기능적 사물 조각을 제작했다.


《형태는 형태를 따른다》 전시 전경(스튜디오 148, 2018) © 최태훈

이러한 사물의 탈기능적 구성은 2018년 개인전 《형태는 형태를 따른다》를 통해 ‘DIY 해킹 조각’이라는 방식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최태훈은 이케아 가구와 같이 사용자가 직접 조립하는 대신 저렴한 값의 DIY 대량 생산 제품을 재료로 택했다. 그리고 DIY 가구의 유닛을 조립 설명서에 따르지 않고 자의적으로 조합함으로써 사물의 기존의 용도를 ‘해킹’하는 실험을 전개해 나갔다.


최태훈, 〈세나 구성〉, 2017, 세나(DIY 수납박스), 175x175x160cm © 최태훈

그의 ‘DIY 해킹’에는 다음과 같은 규칙이 존재한다. 첫 번째로는 스스로 직립할 것, 두 번째는 모든 방향에서 형태가 다를 것, 세 번째는 어디서 보아도 완성도가 균질할 것, 마지막으로는 오브제를 재가공(절단, 절곡 등)하지 말 것.
 
이러한 규칙에 따라 구성된 사물 조각들은 새롭게 창작된 작품도, 온전한 제품도 아닌, 익숙함과 낯섦이 교차하는 경계에 놓인다. 관객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익숙하면서도 낯선 구조로 지닌 사물들을 바라보며, 그 형태가 만들어진 방식과 과정을 역추적해볼 수 있었다.


《남한 앙상블》 전시 전경(SeMA창고, 2019) © 서울시립미술관

이처럼 DIY 산업이 표방하는 자유의지를 조각의 언어를 통해 재해석해 온 최태훈은, 2019년 개인전 《남한 앙상블》에서 동시대의 라이프스타일을 조각적으로 재구성한 ‘쇼룸’을 제시하였다.
 
전시는 시뮬레이션된 공간에 가구를 가상으로 배치해볼 수 있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이케아 플레이스’의 (비)경험을 실제 공간으로 옮겨왔다. 작가는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자신만의 쇼룸을 구성하고 그 안에 다양한 가구를 배치한 뒤, 온라인에서 제공되는 정보만을 바탕으로 가구의 복제품을 제작해 실제 전시장에 예술작품의 형태로 선보였다.


《남한 앙상블》 전시 전경(SeMA창고, 2019) © 서울시립미술관

이는 디지털 환경에서 사물을 경험하고 인식하는 방식을 전시의 구성 안으로 직접 끌어들이는 시도였다. 실제로 존재하는 가구를 직접 경험하는 대신 이미지와 정보만으로 대상을 파악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사물과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의 변화를 구체적인 전시의 장면으로 드러냈다.


최태훈, 〈살-우드 타입 2〉, 2022, 목재(벽선반, 스툴), 발포 우레탄 폼, 250x110x90cm. 사진: 조준용. © 최태훈

한편, 최태훈은 2021년도부터 이종적인 사물과 재료들이 만나 스스로 형태를 결정하는 과정을 통해 “기능주의 너머를 상상하는 소조” 연작 ‘살(SAL)’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뼈대와 피부, 근육을 모두 의미하는 이름의 ‘살’ 연작을 통해 그는 새로운 살을 붙이며 자생하는 새로운 조형 언어를 만들고자 했다.


최태훈, 〈살-자소상 1〉, 2022, 철제 네스팅 테이블, 발포 우레탄 폼, 160x100x85cm. 사진: 김진솔. © 최태훈

이 작업에서 작가는 건축용 우레탄 폼을 ‘살’의 재료로 삼는다. ‘살-자소상’(2022) 연작에서는 이케아의 네스팅 테이블, 철제 선반을 뼈대로 구성한 후, 그 위에 우레탄 폼을 발포하여 조각의 몸체를 만든다.
 
이전 해킹 조각이 기성품의 기능을 배제하고 사물의 형태만으로 자의적이고 논리적인 형태를 재구성해보는 시도였다면, ‘살-자소상’ 연작은 한 발 더 나아가 사물의 기능과 형태로부터 독립을 시도하는 자생적 존재로서의 조각을 상상한다.


《조각충동》 전시 전경(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2022) 사진: 김진솔. © 최태훈

이 작품들은 마치 스스로 성장하는 유기체를 닮아있다. 특히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기획전 《조각충동》에서 선보인 〈살-자소상 5〉(2022)는 우레탄 폼으로 만들어진 살이 전시공간의 벽과 연결되는데, 이것은 사물에서 돋아난 살이 전시장으로 퍼져나가는 것 같기도 하고, 공간으로부터 파생되는 과정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것은 뼈와 살, 유기물과 무기물, 구조와 형상, 구상과 추상 중 어느 한쪽에만 자리를 내어주지 않고, 이들을 포괄하는 조각의 생장점을 형상화한다.


《필드》 전시 전경(P21, 2023) © P21

이와 같은 조각의 유기적 확장은 2023년 2부로 나뉘어 진행된 개인전 중 1부 전시 《필드》에서 더욱 증폭된다. 최태훈은 심봉 위에 흙을 붙여 형상을 만드는 전통적인 소조 형식으로 갤러리 P1, P2를 뼈대 삼아 공간 전체를 거대한 조각 작품으로 변모시켰다.
 
울퉁불퉁한 우레탄 폼의 불균질한 형상으로 뒤덮인 전시 공간은 마치 거대한 유기체에게 잡아 먹힌 듯한 장면을 만들어냈다.


《필드》 전시 전경(P21, 2023) © P21

작가가 사용하는 액상 우레탄 폼은 원료와 안료가 혼합되는 순간부터 경화가 시작되며, 발포와 동시에 빠른 속도로 부풀어 올라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증식하고 굳어간다.
 
이러한 재료의 특성으로 인해 작품의 최종적인 형태는 작가의 의도만으로 결정될 수 없다. 작가는 재료의 움직임을 통제하기보다 그 변화와 확장을 지켜보며, 재료가 스스로 형태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기다린다. 따라서 그의 작업에서는 특정한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보다 프로세스 그 자체가 더욱 중요하다.


최태훈, 〈살-톤 3〉, 2023, 발포 우레탄 폼, 유리컵, 수저, 포크, 빨래 집게, 청소 솔, 휴지통, 수납통, 꽃병, 독서대, 타월, 샤워볼, 91×60×40cm. 사진: 김진솔. © 최태훈

반면, 2부 전시인 《톤》의 경우 비교적 작은 사이즈의 프리 스탠딩 조각들이 공간을 이루고 있었다. 최태훈은 서로 전혀 관련이 없는 이종의 사물들을 비슷한 톤의 색상에 따라 구성하여 마치 ‘대안 가족’처럼 꾸렸다.
 
일상에서는 서로 다른 쓰임새로 접해 있지 않았을 이종다양한 사물들은 우레탄 폼의 접착력을 매개로 연결되어 하나의 집합체로 재구성되었다. 


최태훈, 〈지지체 3〉, 2025, 발포 우레탄, 207x220x142cm © 최태훈

한편, 2025년도 연작인 ‘지지체’는 작업과 전시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가시화되지 않는 사물들에서 시작한다. 테이블, 사다리, 손수레, 파렛트 등은 조각가의 창작 활동을 지지하는 비인간 협업자다. 최태훈은 ‘지지체’ 연작을 통해 작가와 작업, 작업실과 전시장 등 예술 생태계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이들의 존재 방식을 조각 언어로 드러낸다.
 
작업 과정을 살펴보자면 우선 작가가 직접 사용하는 물건들을 거푸집과 같은 틀이 되도록 연결하고, 안쪽 공간에 연질 우레탄 폼을 부어 떠낸다. 이 과정에서 우레탄이 내부를 채우는 동시에 틀이 된 사물 사이의 틈으로 빠져나오며 안과 밖이 하나로 조형된다.


최태훈, 〈지지체 2〉, 2025, 발포 우레탄, 230x247x143cm © 최태훈

캐스팅은 원형을 다른 재료로 옮겨내는 기법이다. 거푸집은 원형이 결과물로 주조될 수 있도록 이어주는 역할을 하면서 최종 과정에서 탈각되는 존재다. ‘지지체’에서 사용된 사물들은 거푸집처럼 결국 떨어져 나간다.
 
완성된 조각에는 사물의 표면이 음화되어 새겨져 있다. 이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제 몫을 하며 서로를 연결하는 수많은 존재들의 협업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최태훈, ‘파수꾼’ 연작, 2025, 《제25회 송은미술대상전》 전시 전경(송은, 2025) © 최태훈

더 나아가, 2025년도 연작 ‘파수꾼’은 작가의 창작 생활을 지켜주는 사물들과 작가 자신의 신체가 상호 작용하는 과정을 드러낸다.
 
우레탄이 부풀어 경화하려는 순간에 손수레를 밀거나 테이블을 접어 올리며 사물에 운동성을 부여하고, 돌아오는 반작용과 변칙적인 환경의 동역학이 조각을 발생시킨다. 이러한 작업에서 재료와 대상은 능동적인 참여자가 되어 작가와 협업의 관계를 맺는다.


최태훈, ‘파수꾼’ 연작, 2025, 《제25회 송은미술대상전》 전시 전경(송은, 2025) © 최태훈

이렇듯 최태훈은 일상의 사물들을 조각화하면서 그것이 지닌 사회적 의미와 용도로부터 해방시키고, 더 나아가 유기적으로 자생해 나가는 조각의 가능성을 실험해 왔다.
 
사용자로부터 해방된 사물의 유기적인 확장은 제품과 작품, 인공과 자연, 중심과 주변, 외부와 내부의 경계를 질문하며, 조각 언어 안에서 비인간 객체들의 주체로서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물건을 조각화하면서 형태적으로, 의미적으로 해방시킨 느낌이었다. 마치 가구가 되어야 할 사물의 운명을 예술작품으로 바꿔주듯. 그러고 보니 사물이 나름의 자기 언어를 가지고 ‘자생’하길 바랐다." (최태훈, 작가 노트)


최태훈 작가 © 최태훈

최태훈은 서울시립대학교 환경조각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최근 개인전으로는 《톤》(P21, 서울, 2023), 《필드》(P21, 서울, 2023), 《우드타입》(GCS, 서울, 2022), 《살(SAL)》(오시선, 서울, 2021), 《자소상》(탈영역우정국, 서울, 2020), 《남한 앙상블》(SeMA창고, 서울, 2019)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송은 × 언박싱 프로젝트: 생성적 형상들》(송은, 서울, 2026), 《제25회 송은미술대상전》(송은, 서울, 2025), 《집(ZIP)》(아르코미술관, 서울, 2024), 《프레이머》(샤워, 서울, 2023), 《조각충동》(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서울, 2022), 《인저리타임》(뮤지엄헤드, 서울, 2021)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최태훈은 가파도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2023), 금천예술공장(2019),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2016-2017) 등에 입주 작가로 선정되었으며, 《집(ZIP》(아르코미술관, 서울, 2024)을 총괄 기획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