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은 종종 작품을 만들기 위해 자료를 수집, 분석하고 배치하는 과정에서 그 자료가 내포하고 있던 새로운 가능성들을 발견한다. 가능성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은 어떤 사건 혹은 사물 뒤에 숨겨진 수수께끼를 발견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때 가능성이란 수수께끼의 정답에 다가가기 위한 열쇠를 찾을 가능성을 말한다. 나는 김아영 작가에게서 미지의 영역을 향한 호기심을 가지고 모험을 멈추지 않는 탐험가의 모습을 발견한다.

김아영은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 프로젝트(2017)가 이란 출신의 철학자 레자 네가레스타니의 사변소설 〈사이클로노피디아: 익명의 물질들과의 공모〉(2008)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다. 2018 년에 개최된 작가의 개인전 연계 출판물에 “다중세계의 우주론적 정치학에 대한 단상”이란 글을 써준 레자 네가레스타니는 이 글에서 김아영이 다루는 이동식 구멍들을 ‘표면 자체가 아니며 공간의 영역조차 되지 못’ 하는 ‘수수께끼와 같은 존재’1 라고 말한다. 김아영은 이 책의 서문에서 ‘다공성 계곡은 구멍이 많고 개연성이 부족한 계곡이다’ 라고 명시한다.2 그의 묘사는 이 프로젝트의 첫 번째 버전이라 할 수 있는 전시를 2018 년에 처음 보았을 때 내게 떠오른 한 단어와 겹친다. 그것은 ‘바로크’였다. ‘개연성이 부족한 계곡’은 질서가 없이 조각난 채로 혼재하는 바로크적 세계의 모습과 유사하다. 그의 이전 작업들을 상기해보면, 다른 작품들 역시 바로크적이다. 전체가 개별적 부분들을 지배하지 않는, 분산된 느낌이다. 동시에 이 분산된 느낌은 이율배반적이게도 지나치게 지엽적인 부분들이 전체로 확대 연결되는 것 같은 기괴함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질 들뢰즈는 그의 저서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The Fold: Leibniz and the Baroque, 1992)에서 ‘바로크 세계는 밑에서 끼어 넣어지고 위를 향해 미는 두 개의 벡터를 통해 만들어진다고’ 했다.3 들뢰즈가 묘사한 ‘무한한 주름은 접선이 곡선을 가로지르는 곳에 있는 변곡점 그 자체’4 이며 ‘물질과 영혼, 외관과 닫힌 실내, 외부와 내부 사이에서 분리되거나 지나가는’5 구부러진 선이다. 김아영의 〈모든 북극성 파트 I & II – 어느 도시의 이야기 중에서〉(2010)에서 시도한 중첩과 분산의 구조 역시 여러 재료들의 혼재된 운동성을 재현한다. 그러나 이 운동성은 안에서 변화를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통일된 질서가 없기 때문에 내적 변화를 대상화하지 않고, 구조가 곧 변화의 표상이 된다. 김아영은 역사의 주름 사이에 숨은 이야기들을 추적하면서 공적 또는 비공식적 온갖 자료들을 수집하고 분석한다. 그 데이터들은 영상, 사운드 설치, 보이스 퍼포먼스, 스크립트와 다이어그램 등 매체를 달리하며 한 작품에서 다른 작품으로 도약한다. 근대 산업문명의 중요한 자원인 석유에서 추출된 유기물인 역청의 역사는 〈이 배가 우리를 지켜주리라〉(2016), 〈제페트, 그 공중정원의 고래기름을 드립니다, 쉘〉(2014~2015)로 이어지고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로 확장된다. 김아영은 〈제페트, 그 공중정원의 고래기름을 드립니다, 쉘〉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중 석유가 빠져나간 땅 속 공간을 물이 인위적으로 대체하는 그래프를 발견했다고 한다. 이 발견은 김아영의 바로크적 상상력을 자극했을 것이다. 다공성을 내포한 지층의 무한한 움직임은 물질적이면서 동시에 비물질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의 표상과 같다. 한 대상이 암시하는 어떤 가능성은 때로는 본질과 유리되어 보일 수도 있다. 3D 애니메이션으로 재현된 다공성 계곡의 움직임은 거칠고 혼돈스럽거나 고요하고 섬세한 이중적 서정성을 동시에 동반한다. 딱딱한 표면들이 부딪쳐 부서지는 암석들의 이미지는 그 내부를 볼 수 없는 불투명함으로 인해 외부의 창문 또는 통로가 없는 내부의 비물질적 영역으로 대체된다. 그리고 이 계곡은 작가의 상상을 통해 유기적 생명체처럼 변형되고 비정형화된 어떤 힘들을 획득한다.

길가메시 서사시, 코란, 성경에 기록된 대홍수와 방주의 문헌에 등장하는 역청이 〈이 배가 우리를 지켜주리라〉에서 파리의 오페라 극장 팔레 가르니에로 연결되었던 것처럼,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을 구현하는 무수한 돌들의 보이지 않는 정령들이 어디로 이동하게 될지궁금하다. 예맨 난민의 이주 경로처럼 불합리하고 비극적인 현실의 절망 속에서 인류의 미래는 마냥 암담한 것이 사실이다. 중국은 달 표면 탐사활동을 명분으로 달의 뒤편으로 창어 4 호를 쏘아 보냈다. 우주공간 또한 국가간 경쟁의 도구가 된다. 인간은 우주질서를 파괴하는 주범이 될 수도 있다. 어쨌든 중국 연구진은 달의 분화구 깊은 곳에서 채취한 샘플을 통해 지구 상부 맨틀을 구성하고 있는 주요성분인 감람석의 흔적 일부를 발견했다고 한다. 김아영의 이동식 구멍들이 달의 뒤편으로 이주하면서 지구가 생성되기 이전 더 먼 과거의 풍경을 그려내는 것을 상상해본다.



1. 레자 네가스타니, “다중 세계의 우주론적 정치학에 대한 단상”, 김민주, 허미석, 김아영 옮김, 황문영 감수, 『다중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 (서울: 일민미술관, 2018), 101~102.

2. 김아영, “서문: 다공성과 당혹감에 관하여”, 『다중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 (서울: 일민미술관, 2018), 37

3. Gilles Deleuze, The Fold: Leibniz and the Baroque, foreword and trans. Tom Conley (London: The Athlone Press, 1993), 29.

4. Ibid., 14.

5. Ibid., 35.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