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Re-portal
이지현은 어떤 기억을 그림으로 그리고 거기에 또 다른 기억을 덮어씌우면서 새로운 기억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기억이 순수할 수가 없고 얼마든지 왜곡, 조작 가능하여 주관적으로 형성되는 것이기에 자신의 그림은 과거의 기억에 새로운 이미지를 덮어 씌워 미래 기억(future memory)을 담아보는 것이 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러한 그림은 안 좋은 기억을 복기시켜 주기도 하고, 그러다가 납득되지 않았던 과거의 어떤 일을 새삼 이해시키고 마음 속 걱정과 염려를 평온하고 안정적인 상태로 바꿔 주기도 한다.
2018년 작가는 대학원 졸업작품으로 〈Re-portal〉(2017-2018)을 발표하였다. 이 작품은 회화, 영상, 그리고 목조 구조체, 부드러운 조각과 오브제, 비디오, 사운드가 모두 종합되어 있는 설치 작업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여러 가지 기능을 동시에 가진 물건을 좋아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많은 레이어와 여러 기능을 가진 사물들에 흥미를 갖거나 그렇게 될 수 있는 가능성들을 상상하는 것을 좋아했다.
〈Re-portal〉의 전체 형태도 우주선이나 타임머신을 상징하는 형태로 구조물을 제작했고, 안쪽에는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친숙한 사물들과 재료들을 동원하여 작은 요새 또는 아지트 같은 공간을 만들었다. 한 켠에서는 작가의 아들이 들려준 컴퓨터 안으로 들어갔던 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꿈 속에서 컴퓨터 안으로 들어간 아이는 그곳에서 탈출하는 구멍(portal)이 있을 것이라 믿고 여행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작가는 아들이 ‘portal’을 빠져나오는 출구라고 받아들인 것에서 착안하여, 출입이 모두 가능한 구멍이라는 뜻으로 이 작품 제목을 〈Re-portal〉이라 명명한 것이다. 거기에는 〈Re-portal〉이 여성, 딸, 어머니로서 자신의 개인적인 관점을 드러내는 소재뿐만 아니라 유년 시절의 기억, 그리고 가족을 회상하는 소재들을 관람자들에게 이해시킬 수 있는 출입구(entrance)가 되기를 원하는 마음도 깔려 있다.
호기심과 탐구심이 가득했던 유년 시절의 이지현에게 몽상은 다른 세계로 가는 중요한 창문이자 통로가 되어주었다. 그래서 〈Re-portal〉은 그 통로를 향한 입구(entry)여야 할 뿐만 아니라 또다른 세계로 가는 출구(exit)의 역할도 중요한 것이다. 그는 이 작품의 감상자들이 자신의 기억, 생각, 경험을 작품에 투영해보기를 바라는데, 그럴 경우 감상자마다 각자의 이야기가 만들어질 것이고 그럼으로써 작가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사실 그 자신부터가 타인의 저작에 자신의 기억과 몽상을 투영해보곤 하는 것 같다. 이지현은 사르트르, 카프카, 보르헤스 등의 문학작품을 좋아하며 자주 읽는 편이라고 한 바 있다. 그는 바슐라르가 몽상을 예찬하는 것이 좋고 융의 이론에는 자신이 생각하는 무의식에 대한 해석을 대입해보기도 하였다. 논문에서도 이들을 인용한 바 있는데, 특히 보르헤스의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은 〈Re-portal〉 작업에 제법 영향을 주었다.
이 소설의 화자는 자신의 조상인 추이펀의 소설에 대해 설명하는데, 모든 소설에서 작중 인물이 여러 가능성과 마주칠 때마다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것들은 버리지만, 추이펀의 소설 속에서 작중 인물은 모든 것을 동시에 선택한다고 말한다. 그럼으로써 추이펀의 소설에서는 모든 결말들이 일어나고, 각 결말은 또 다른 갈라짐의 출발점이 된다는 것이다.
앞서 이지현의 ‘판타즈마’가 시간이 걸리는 대형 페인팅 작업을 할 때 떠오르는 생각들을 그때그때 잡아 두려고 작가가 작은 캔버스에 노트하듯 그린 그림이라고 말했는데, 그러므로 ‘판타즈마’는 이지현의 회화가 더 많은 것을 시도할 수 있는 단서를 만들어 놓는 것이기도 하지만, 작가의 기억과 몽상 그 모든 것들을 놓치지 않고 노트하여 모든 결말이 일어나게 하면서 또 모든 출발점이 되게 하는, 마치 추이펀의 소설처럼, 끝없이 갈라져 무한의 결말을 향하게 하는 회화적 모티프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