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더스트리얼 미소녀》 전시 전경(아라리오갤러리, 2023) © 돈선필

하나의 애정 어린 대상에 대해 특정 개개인들이 구축해나가는 기호적 풍경과 그것의 끝없는 유무형적 확장을 가능케 하는 맹목적이지만 아름다운 열기들이 있다. 돈선필 작가에게 그 대상은 오랫동안 피규어였고, 특유의 면밀하고 집요한 탐구 정신과 애정으로 취미를 넘어선 분석적 진단과 진지한 비판을 자신의 작업을 통해 표현해왔다.

작가 개인에게 피규어는 개인적 애정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작품 대상으로서의 피규어는 특정 대상을 재현하기보다는 사회적으로 합의된 기호적 현상들을 분석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전시 《인더스트리얼 미소녀》도 역시 동일한 범주 속에서 작동하는 데, 이번엔 ‘미소녀’ 피규어의 생산 동력을 둘러싼 생산자적 관점의 이야기를 다룬다.

작가의 이전 전시들이 주로 소비자 관점에서의 기호 현상을 다뤘던 것과는 차이가 있는데, 이번에는 자본주의 시장 구조에서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기반하지만, 동시에 설명 불가한 맹목적 열기로 모든 가공 캐릭터 중 가장 빈번하게 탄생하는 미소녀 피규어가 끊임도 없고 끝도 없이 생성되고 변화해나가는 산업 구조의 특이성과 동력을 상상하고 거기서 파생되는 감상과 성찰을 이야기한다.

전시는 크게 영상 작품 1점과 24개의 조각 작품, 그리고 작가가 창작한 원형사 모형을 찍은 사진(정작 원본 조각은 전시되지 않는다), 미소녀 피규어 설계도 등 총 4점의 사진작품으로 구성된다. 작가는 본 전시의 영상 작품을 원본 애니메이션으로, 조각 작품들은 원본에서 파생된 피규어로 간주하는데, 조각들 사이에서 그 일부처럼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영상 작품은 이들의 상호보완적이며 유기적인 관계를 예측해보게 한다.

작품들은 각각 전시장의 바닥면 일부가 그대로 융기한 듯한 구조의 좌대에 설치되는데, 이 구조는 공간에 가상성을 더했을 뿐만 아니라 격자 무늬의 바닥면을 잘 응용해 흡사 만화 그리드를 뚫고 나온듯한 시각적 이미지를 제시해 지속적으로 원본과 파생물 간 관계성에 대한 질문을 환기시킨다.

원본 애니메이션 역할의 영상 작품은 주인공 엔지니어 J의 생각과 말을 3인칭으로 관찰한다. J는 피규어의 금형 및 설계를 업으로 삼고 있는 전문 설계사다. 이름 모를 원형사에게 어느 날 원형 샘플을 받아 금형 생산을 위한 작업을 해야 하는 데, 받아본 원형이 규격 외의 모습이라 엔지니어 J는 고뇌하기 시작한다. 미학적 선호도와 산업적 관점에서의 고민 속에서 기존에 반복해오던 방식을 바꿔보려다 다시 수긍하게 되고, 또 다시 그 습관이 가져올 균형과 균열을 생각하며 계속 좌절하면서도 또 습관은 고수되는 이상한 순환 고리에 빠져버린다.

기존 스타일은 고수하지만 그런 습관적 방식이 형태의 단순화로 이어진다는 고민은 계속 이어지면서 상념에 빠지는 엔지니어 J를 뒤로 하며 영상은 마무리된다. 영상 작품의 첫 화면은 곧 출시될 미소녀 피규어를 올해 4월에 찍은 화면이고, 제일 마지막 화면은 작년에 촬영한 해당 미소녀 피규어를 인터넷으로 선구매하는 장면이다. 영상을 역순으로 편집한 것인데, 관람객들은 이를 스스로 파악해내지는 못한 상황에서 영상 말미에 엔지니어 제이가 커피를 마시며 미래를 추억한다는 모순적 표현과 함께 자신도 모르게 비선형적 시간 구조에 갇히게 된다.

원본이 아닌 이미지만을 보고 선구매 후 몇 달을 기다리는 그 열정, 오래된 과거에 제작된 애니메이션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부활하는 미소녀 피규어 제작의 열기 등 어느 순간 시작과 끝의 의미가 없이 뒤틀어진 시공간 속에 무한 반복하는 원형사와 그 열정적 피규어 애호가들을 상상하게 된다.

전시된 조각 작품들은 미소녀 피규어의 기호에서 작가가 선택한 특징적 부분들이 변형된 형태다. 각각의 형태는 특정 피규어를 둘러싼 시각 언어를 이해하는 만큼 눈치챌 수 있는데, 그것이 본 전시를 이해하는 데에 크게 중요하지는 않다. 이미 무언가의 일부분임을 연상하게 하는 형태 묘사와 유사하게 반복되는 특정 형태들의 나열이 조각 그 자체로서의 시각적 쾌감과 경쾌함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급될 필요가 있는 존재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바니걸’ 피규어다.

전시장에서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바니걸들은 모두 머리는 제거된 채 웅크리고 앉아 있고 손 위에는 각각 무언가를 얹고 있다. 아마도 또 다른 그 어떤 피규어의 부분일 것임을 연상케 하는 형태들이다. 바니걸은 1980년대 미소녀 피규어가 등장하고 급성장하던 시대를 관통하는 존재들 중 하나인데, 작가 개인에게도 미소녀 피규어를 상징하는 원조이자 시작점으로 간주된다. 그 외 전시되는 조각들도 동일한 형태가 2점, 혹은 형태가 동일한데 색이 다른 식의 미묘한 반복과 차이의 장을 펼친다.

이때 대량생산된 가공물이자 산업구조물로서 피규어의 태생적 특징을 명확히 전달하면서 동시에 미적 대상으로서의 조각적 아름다움이 동시에 발현된다. 이러한 산업구조물과 조각 작품의 혼종이 발생시키는 온도차는 돈선필 작가의 전반적인 조각 작품을 감상하는 묘미 중 하나다. 이 전시에서는 조금 더 나아가 특히 두드러진 형태적 측면에서의 파편성과 동일 조각들을 상이하게 도색한 부분들을 강조함으로써, 완성된 피규어로서의 형태가 아닌 생산 라인에 올라온 피규어의 일부분을 두드러지게 제시하면서 생산자로서 원형사의 보이지 않은 존재감을 은근슬쩍 드러낸다.

대량 생산의 결과물이긴 하지만 피규어는 여전히 정교한 수공 공정을 요구한다. 눈 하나를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20개 이상의 복잡한 레이어를 쌓는 도색 작업을 필요로 하는 등, 수많은 이들의 다양한 기술과 끝없는 열정 속에서만 작동 가능한 산업이다. 이 과정에서 발생되는 수많은 고민과 결정들이라는 게 있다. 특히 피규어는 대량생산 공정을 통해 탄생하지만 단순히 자본주의의 결과물을 넘어선 수많은 개인의 의지와 애정이 반영되면서 발전하는, 하지만 동시에 사회 내 통용되는 기호적 해석과 취향까지도 반영해야 하는 지극히 미시적이면서도 거시적인 세계를 공존시키는 꽤 이율배반적이며 모순적인 독특한 구조의 세계다.

산업과 취미가 융합된 이 독특한 세계를 유지시키는 절반의 축인 생산자 그룹은 그 경계선에서 고민하고 상상하고 실천하는 주체들이다. 본 전시는 완성품이 아닌 그 길에서 발생한 이러한 고민들과 주저함을 이미지화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피규어 문화와 순수미술의 접점을 “감상 외에는 쓸모가 없다는 점에서 닮아있다”고 가정하는 작가의 현명한 진단을 곱씹어보면서, 피규어 엔지니어를 둘러싼 상황과 현상을 펼쳐낸 본 전시는 자연스럽게 미술가인 그가 처한 상황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 결과, 생산자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피규어 산업의 끝없는 추진 동력을 다루면서 미술작가로서의 돈선필 작가라는 전혀 다른 영역에서의 생산자적 미술 작가의 입장도 상상하게 된다. 엔지니어 J의 성찰적 고뇌는 결국 작가 돈선필의, 혹은 또 다른 수많은 미술작가들의 그것인 것이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