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선필, 〈정동현상표본(SAP) Error+Conservation〉, 2022, 레진, 프라이머, 폴리 퍼티, 아크릴 물감, 바니시, 449x462x335(HxWxD)mm © 돈선필

2024년 9월 20일, 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 돈선필 개인전 《Electric Tomb Raider》를 봤다. 이 전시는 남부터미널 인근에 위치한 국제전자센터 안의 한 점포에서 진행됐다. 한 평 남짓한 작은 점포 안에 작가가 수집한 오타쿠 상품과 제작한 작품이 한데 엉켜 쌓여 있었다.

작품은 일반적인 전시처럼 벽에 걸리거나 넓은 공간에 세워지는 대신 상품 재고처럼 진열대에 진열되거나 쌓여 있었다. 옆의 점포, 앞의 점포와 다를 것 없이 평범한 가게의 모습으로, 마치 숨은그림찾기를 하듯이 진짜 점포들 사이에 숨겨진 전시장을 찾아야 했다.

1997년 문을 연 국제전자센터는 용산 전자상가, 영등포 테크노마트와 더불어 서울의 3대 전자상가로 불리나, 현재는 오프라인 전자상가의 쇠락과 함께 한적한 곳이다. 쇠락과 더불어 리모델링되지 않은 상가는 촌스러운 안내판, 오래된 광고 이미지, 유행이 지난 인테리어와 함께 90년대 어느 시점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그 안에서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장소를 용도변경하여 쓰는 오타쿠 문화가 뒤엉켜 만든 풍경은 기이했다.

한적한 상가들 사이를 지나, 서브컬처 관련 상품이 몰려 있는 곳에 이르자 젊은이들의 욕망의 에너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빈 점포들 사이로 여전히 전자기기를 파는 가게들은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반면 서브컬처 파생 상품을 파는 가게가 밀집한 층은 젊은이들로 북적였다.

그 가운데 전시가 있었다. 높은 임대료가 형성된 도시 안에서, 모종의 이유로 상대적으로 낮은 임대료가 책정된 부동산에 몰래 들어온 전시가 숨겨져 있었다. 그러므로 이 전시는 필연적으로 그 장소 안에서 보아야 한다. 옆 가게와 앞 가게, 위층과 아래층을 지나며 그 틈에 정박해 있는 전시를 만나야 한다.

이로써 전시는 그 모든 것이 현재임에도, 서울의 일상적 시공간을 벗어난 어딘가로 시간여행하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을 느끼게 하면서, 그 장소 자체를 미술의 대상으로, 감상해야 할 작품으로 바꿔낸다. 전자상거래의 활성화로 전자상가가 몰락하는 시대적 상황, 그 틈에서 피어나는 서브컬처 문화, 도시의 그 기이한 현상과 상황 자체를 작품으로 삼아 감상하게 한다.

그러나 돈선필은 그 공간을 감상의 대상으로 삼고 있음에도, 관객과 자신을 구경꾼에 위치에 놓고 장소를 대상화하지 않는다. 오타쿠 상품을 파는 가게 특유의 분위기를 그대로 지니고 있는 전시장은 진짜 점포들 사이에 자리잡고 앉아 진짜와 가짜 사이의 접면을 연기한다. 좁은 가게에 서브컬처 상품을 죽 쌓아 놓고 앉아서 손님을 기다리는 가게와 돈선필의 개인전 전시장은 외관상으로는 차이가 보이지 않았고, 그래서 마치 작가가 그러한 가게를 연기하는 퍼포먼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작가 본인이 그 장소의 일부가 되면서, 진짜들 사이에 그럴듯하게 숨어 있을 뿐이다. 그렇게 돈선필은 미술을 바깥으로 꺼내 세계의 일부가 되도록 하면서, 세계 자체를 미술의 대상이 되도록 한다. 세계를 흉내낸 가짜가 유사 거울처럼 세계 안에서 세계를 비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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