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선필(b. 1984)은 소위 ‘서브컬처’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캐릭터와 구조, 그리고 그에 대한 관심을 작업세계의 주제로 삼아왔다. 작가는 비주류이자 변방의 것으로 여겨지는 요소들을 그 자체로서 의미 있는 사회적 현상이자 공유된 미적 감각의 단서로서 바라보며, 주류 제도권의 체제 및 방식을 서로에게 투과하고 교차시킨다.
 
특히 돈선필은 ‘피규어’가 만들어 낸 각종 사회현상과 함축된 서사, 리얼리티의 욕망, 조형물로서의 자기 완결성 등 복합적 단면을 탐구한다.


돈선필, 〈FFWS_Dreary Tangerine〉, 2025, 광경화성 수지, 레진, 프라이머, 나무, 플라스틱 키트, 아크릴 물감, 리퀴드 크롬, 바니시, 670x420x450(HxWxD)mm © 돈선필

돈선필은 동시대의 언어와 사회의 모습을 ‘구현화(Materialization)’의 관점으로 해석한다. 그의 작업은 감정이나 생각, 개념이나 느낌처럼 모호한 영역을 구체적인 사물처럼 다루는 태도, 혹은 그것을 반영한 물건에 집중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 중에서도 작가가 지속적으로 주목해온 대상은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구현화한 ‘피규어’이다.
 
대부분 피규어는 캐릭터라는 기호와 이미지에 의해 탄생한 결과물이다. 2D 작화에서 3D 입체물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수많은 인력과 시간이 들어가지만, 피규어 존재 그 자체는 비효율성의 집합체다. 


《민메이 어택: 리-리-캐스트》 전시 전경(시청각, 2016) © 돈선필

돈선필은 이처럼 웬만한 다른 사물들에 비해 과도한 기술과 정성으로 제작되었지만, 도저히 쓸모가 없는, 그렇기에 더욱 매력적인 피규어에 애정을 두고 작업의 소재로 끌어들여 왔다.
 
돈선필은 피규어를 단순한 수집품이나 소비재가 아닌, 원본의 이미지와 데이터가 물질적 형태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새롭게 생성되는 조형물로 바라본다. 그의 작업은 일본 서브컬처에서 출발한 피규어의 제작과 유통, 소비 과정을 추적하며, 원본을 재현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추가와 누락, 변형에 주목한다.


《민메이 어택: 리-리-캐스트》 전시 전경(시청각, 2016) © 돈선필

2016년 개인전 《민메이 어택: 리-리-캐스트》에서는 완성도가 떨어지는 피규어를 불량품으로 판단하는 대신, 그것이 특정 캐릭터를 지시하는 기호로 작동하는 방식과 그 조형적 결과에 주목했다. 작가는 기존 피규어를 다시 변형하고 재조형함으로써 원본과 복제물 사이의 관계를 뒤틀고, 피규어가 하나의 독립적인 조형 언어로 확장될 가능성을 탐구했다.
 
돈선필에게 피규어는 언제나 원본에 기반하지만, 다른 차원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무언가가 더해지고 또 다른 무언가는 사라지며 전혀 다른 존재로 변형된다. 그는 이러한 ‘열화-복제’의 구조를 통해 이미지와 사물, 원본과 복제의 관계, 더 나아가 우리가 살아가는 시공간에 대해 탐구하고 해석한다.


《METAL EXP: 외톨이의 움직이는 시간》 전시 전경(취미가, 2018) © 돈선필

한편, 2018년 개인전 《METAL EXP: 외톨이의 움직이는 시간》에서 돈선필은 ‘드래곤 퀘스트’라는 RPG 게임에 등장하는 몬스터 ‘하구레 메탈’을 소재로 삼아 “시간과 운의 ‘모양’”을 주제로 다뤘다.
 
본 게임에서 하구레 메탈은 운이 좋아야만 조우할 수 있는 몬스터로, 한 번 만나면 상당한 경험치를 단숨에 획득할 수 있다. 작가는 이러한 점에서 그 몬스터를 ‘레벨 업’하는 시간이 농축된 모습 그 자체로 여겼다.
 
전시는 투입한 시간만큼 성장해가는 RPG게임의 문법을 따르듯 담담하고 잔잔하게 시간에 대한 고민을 풀어갔다. 전시장에는 안락한 소파와 TV 모니터와 게임 콘솔, 그리고 그 사이를 오가는 메탈 모형을 태운 로봇 청소기와 곳곳에 부착된 메탈 오브제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 안에서 우연하게 발생한 사건과 공산품이 만들어내는 익숙한 풍경은 형태가 없는 시간의 모양새를 추측하도록 돕는다.


《끽태점 喫態店》 전시 전경(아라리오뮤지엄, 2019) © 돈선필

그리고 이듬해 열린 개인전 《끽태점 喫態店》은 제목 그대로 ‘형태를 만끽하는 상점’을 표방하며 소규모 상점의 공간 구조를 차용한 설치 작업으로 구성되었다. 관객은 진열장 사이를 거닐며 작가가 전하는 동시대 다양한 삶의 단면들을 구체적인 상점의 형태로 경험할 수 있었다.
 
유리 진열장 안에는 기존 피규어와 함께, 피규어처럼 생겼지만 피규어가 아닌 조형물들이 뒤섞여 있었다. 이 모호한 형태들은 작가가 피규어 위에 새로운 형태를 덧붙이거나, 조각 형태에 장식 요소를 붙여 피규어처럼 보이게 만든 결과물이다. 작가는 이러한 구체적인 형태와 합성수지 사물을 통해 제작과 창작의 경계에 대해 질문한다.


《끽태점 喫態店》 전시 전경(아라리오뮤지엄, 2019) © 돈선필

마치 테트리스 조각처럼 다섯 개로 분할된 구조물은 각각 독립적인 형태의 조각으로 기능하는 동시에, 우리의 기억과 시간을 간직한 어떤 형태로, 각각의 사물들은 서로 다른 시간을 대변하고 있었다.
 
돈선필이 천착해 온 ‘피규어’는 단순한 축소모형이 아닌, 당대의 모습을 반영하고 진술하는 특별한 상태이다. 전시 역시 상점의 모습의 빌려온 ‘끽태점’이라는 이름의 피규어인 셈이며, 작가는 이를 통해 지금 사용되는 언어의 단면을 구체적인 모습으로 관객에게 제안하고자 했다.


《포트레이트 피스트》 전시 전경(아트선재센터, 2020) © 돈선필

2020년 개인전 《포트레이트 피스트》에서 돈선필은 오늘날 우리가 ‘얼굴’의 이미지를 어떻게 인식하고 소비하는지를 탐구했다. 실제 인물의 초상부터 배우와 가상의 캐릭터, 기호화된 도상에 이르기까지 얼굴은 단순한 신체의 일부를 넘어 개인의 정체성, 국적, 사회적 위치와 삶의 이야기를 대신하는 이미지로 기능한다.
 
작가는 이러한 얼굴의 의미가 실제 얼굴과 유사하지 않은 ‘캐라’의 얼굴에서도 작동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캐라’는 캐릭터의 일본식 독음(キャラクター)에서 파생한 단어로 사람의 성격이나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인물을 뜻한다.
 
캐라의 얼굴은 이목구비를 갖추고 있지만, 그 역할을 하지 못한 채 텅 비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만화 캐릭터를 보며 얼굴을 인식한다. 캐라의 얼굴은 특정한 얼굴을 사진과 같이 재현해내는 대신 사물에 가까운 상태로 이행한다.
 
이를 통해 그는 얼굴이 어떻게 얼굴로 인식되는지, 그리고 이미지가 특정한 대상을 대신하는 과정에서 어떤 의미와 힘을 획득하는지를 살펴보았다.


《포트레이트 피스트》 전시 전경(아트선재센터, 2020) © 돈선필

전시는 이러한 여러 상태의 얼굴을 피규어라는 매체를 통해 구체화한다. 캐릭터를 입체적인 사물로 번역하는 피규어는 추상적인 이미지와 설정을 물질적 형태로 구현하며, 그 과정에서 캐릭터의 ‘리얼리티’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드러낸다. 특히 얼굴은 캐릭터의 설정과 현실감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피규어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즉, 《포트레이트 피스트》는 제목에서 지향하는 바처럼 우리가 알게 모르게 사용하고 이용당하는 얼굴이 가진 힘에 대한 이야기이자 오늘날 얼굴이라 불리는 초상의 이미지가 어떻게 사물화하면서 다른 대상을 견인하는지를 피규어라는 상태로 탐구한다.


《인더스트리얼 미소녀》 전시 전경(아라리오갤러리, 2023) © 돈선필

한편, 2023년 개인전 《인더스트리얼 미소녀》에서 작가는 ‘미소녀’ 피규어의 생산 동력을 둘러싼 생산자적 관점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전 작업이 주로 피규어를 소비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기호와 문화적 현상에 주목했다면, 이 전시에서는 자본주의의 수요와 공급을 넘어 설명하기 어려운 열기에 의해 끊임없이 생성되고 변주되는 미소녀 피규어의 산업 구조와 그 동력을 상상하며 이루어졌다.


《인더스트리얼 미소녀》 전시 전경(아라리오갤러리, 2023) © 돈선필

작가는 전시의 영상 작품을 원본 애니메이션에, 조각 작품을 그로부터 파생된 피규어에 대응시켰다. 조각 사이에 하나의 구성 요소처럼 자리한 영상은 원본과 복제물 사이의 상호보완적이고 유기적인 관계를 드러냈다.
 
영상에서는 미학적 선호와 산업적 요구, 그리고 관습적으로 반복되는 제작 방식 사이에서 고민하는 엔지니어 J의 상념이 펼쳐지며, 조각들은 미소녀 피규어에서 추출한 특정한 특징들을 변형하고 재구성한 형태로 제시되었다.  


《인더스트리얼 미소녀》 전시 전경(아라리오갤러리, 2023) © 돈선필

특히 전시장 대부분을 차지한 ‘바니걸’ 피규어는 머리를 제거한 채 웅크리고 앉아 각기 다른 물체를 손 위에 올려놓은 모습으로 반복되었다. 1980년대 미소녀 피규어의 등장과 함께 성장한 바니걸은 작가에게 미소녀 피규어의 기원과도 같은 존재다.
 
이외의 조각들 역시 동일한 형태의 반복, 형태는 같지만 색을 달리한 변주 등 미묘한 차이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반복과 차이는 피규어가 대량생산되는 산업적 산물이라는 본질을 드러내는 동시에, 개별 조각이 지닌 조형적 아름다움을 부각한다.


《인더스트리얼 미소녀》 전시 전경(아라리오갤러리, 2023) © 돈선필

나아가 전시는 완성된 피규어의 모습보다 생산 과정에서 분리된 파편과 서로 다르게 도색된 동일 조각을 강조한다. 이는 피규어가 완성되기 이전의 생산 단계에 시선을 돌리는 동시에, 그 과정에 개입하는 원형사(原型師)의 보이지 않는 존재를 드러내는 장치로 작용한다.
 
산업과 취미가 융합된 이 독특한 세계를 유지시키는 절반의 축인 생산자 그룹은 그 경계선에서 고민하고 상상하고 실천하는 주체들이다. 본 전시는 완성품이 아닌 그 길에서 발생한 이러한 고민들과 주저함을 이미지화한다.


《음울한 귤》 전시 전경(페리지갤러리, 2025) © 돈선필

그리고 2025년에 열린 개인전 《음울한 귤》은 ‘특촬(特撮)’에 대한 작가의 관심에서 출발한다. 특촬은 아직 도래하지 않거나 이미 사라진 것 모두를 포함하여, 가상의 시공간을 현실로 재현하기 위한 여러 시도들이 결합된 과정이다.
 
여기서 작가가 주목하는 지점은 영상 촬영 이후 그것이 실체를 가진 존재들로 여전히 남아있다는 점이다. 가면, 슈트, 괴수의 몸체, 도심 공간을 표현한 디오라마 세트 등은 필요와 한계로 인해 어쩔 수 없는 조건들을 해결해 나가면서 만들어지고, 촬영이 끝난 뒤에도 현실에 남겨져 기묘한 형상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음울한 귤》 전시 전경(페리지갤러리, 2025) © 돈선필

한편 전시는 개인의 삶, 취미, 일에서 시작된 이야기들이 조각에서 글로, 영상으로, 다시 사물로 퍼져나가고 돌아오는 순환 구조를 촘촘하게 펼쳐 보인다.
 
작가는 텍스트와 조형적 형태 사이의 간극, 물성이 가진 외적 변화와 표면이 균열하는 순간, 그리고 새로운 것들이 솟아오르는 과정을 억지로 봉합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냈다.


《음울한 귤》 전시 전경(페리지갤러리, 2025) © 돈선필

피규어에 대한 연구는 특촬의 구조와 성격을 함축하는 좋은 예시다. 작가는 피규어가 가진 정확한 모습의 재현뿐 아니라, 현실적 비율과 균형에서 벗어난 요소들이 혼재된 모습을 다각도로 분석하였다. 이러한 접근은 어떤 이에게는 아름답고 매력적으로, 또 다른 이에게는 괴상하고 기묘한 혼합물로 다르게 읽힌다.
 
작가는 특촬이라는 호기심의 대상을 따라가며, 과장이나 누락 없이 자신이 인식하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펼쳐냈다. 이는 관객이 볼 수 있는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을 느끼게 하며, 아직 명확히 규정되지 않은 무언가를 표현하는 행위로 이어진다.


돈선필, 〈정동현상표본(SAP) Error+Conservation〉, 2022, 레진, 프라이머, 폴리 퍼티, 아크릴 물감, 바니시, 449x462x335(HxWxD)mm © 돈선필

이렇듯 돈선필은 사물과 캐릭터가 탄생하는 과정과 그것이 다양한 방식으로 소비될 가능성을 탐구하며, 사회적 현상과 사건을 ‘피규어’의 관점에서 새롭게 정의해 왔다. 이를 바탕으로 각각의 대상과 현상에 대응하는 입체 조형물과 서사적 영상을 제시하며, 피규어를 하나의 조형적 형식이자 현실을 바라보는 방법으로 확장한다.
 
하나의 원형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형태로 파생되는 피규어처럼, 돈선필의 작업 역시 하나의 완결된 판단이나 확정된 의미에 머무르지 않고 여러 갈래의 가능성으로 펼쳐진다. 특정한 분위기에서 일시적으로 발생하는 감정과 감각을 포착하는 동시에, 현실과 가상, 원본과 파생물 사이를 가로지르는 과정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보이지 않는 경로를 탐색한다.

"우리는 알 수 없는 것을 규정하는 추상의 능력과 그것을 다시 구체적인 모양으로 갈무리할 수 있는 구현의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평소 생활 속에서 스쳐 가는 작은 사물과 가벼운 이미지를 다시 한번 천천히 대면해 보시길 추천합니다. 아마 거기에는 잠시 잊고 있던, 이미 알고 있던, 한없이 선명한 정동의 모습이 남아 있을 겁니다." (돈선필, 「레자: 가면보다 무겁고 허물보다 두터운 것」(2025)에서 발췌)


돈선필 작가 © Visla Magazine

돈선필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판화과 학부 졸업 후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조형예술학과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최근 개인전으로는 《음울한 귤》(페리지갤러리, 서울, 2025), 《Electronic Tomb Raider》(국제전자센터, 서울, 2024), 《인더스트리얼 미소녀》(아라리오갤러리, 서울, 2023), 《괴 • 수 • 인》(YPC 스페이스, 서울, 2022) 등이 있다.
 
또한 작가는 《리버스 캐비닛》(코엑스, 서울, 2025), 《키치 앤 팝: 한국적 팝아트의 현재》(주상하이한국문화원, 상하이, 2025), 2024 아트스펙트럼 《드림 스크린》(리움미술관, 서울, 2024), 《언박싱 프로젝트 3: 마케트!》(뉴스프링프로젝트, 서울, 2024), 《Fake it Real》(대만디지털아트센터, 타이베이, 2022), 《땅속 그물 이야기》(아르코미술관, 서울, 2022), 《조각충동》(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서울, 2022)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돈선필은 2023년 제1회 서울예술상 시각부문 우수상을 수상했으며,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서울시립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아라리오컬렉션 등의 기관에 소장되어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