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방에서 어두운 방으로 들어가면, 사진들은 미세한 강도로 속삭이는 것이 아니라 큰소리로 외치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무가 기괴하게 자라나있고 자동차가 버려져 있는 텅 빈 후쿠시마(30, 32, 53, 55, 58)나 세월호와 관련해서 모여든 사람들(34, 36, 40, 42), 개발에 의해 사라질 혹은 어색하게 남은 풍경(28, 41, 56, 57, 59, 60), 시위나 장례의 풍경(43, 49, 50, 63) 등은 새된 경고의 목소리처럼 읽힌다.
그러나 아무리 목소리가 달라졌다고 해도 '사진가'의 사진이 현실에 대한 직설적 웅변이나 온전한 명제인 경우는 드물다. 이 사진들은 사진이 잘라낸 현실의 한 토막이 전체를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진의 부분성과 한계를 강조하려는 듯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전체 풍경이 아니라 장면 일부에 집중하고 있다. 게다가 잘 살펴보면 첫 번째 방의 사진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부재감을 드러낸 사진들도 많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사진들이 다르게 읽힐까?
거의 동일해보이는 네 장의 흑백 초상 사진이 있다(27). 첫 번째 방에서 '이것임'의 감각을 체득한 예민한 관객이라면 이 사진들에서 미세한 동작과 의식의 변화를 알아차릴 것이다. 그 변화는 인접한 사진들로 옮겨가고 되돌아오는 행위를 (여러 번) 반복할 때 포착된다. 작고 깜깜한 방 안에는 나무와 풀숲이 웅성거리고 있다(29). 각각은 조금도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식물들이지만, 이들이 군락을 이루자 이상한 반사광, 생경한 형태 등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점차 위치, 주변 건물, 표시선 등의 인공적 요소들이 이상함을 보탠다.
이 식물들은 제주 4·3, 오키나와, 밀양 송전탑 시위, 상계동 개발 현장, 백남기 농민이 살았던 보성 등 각기 다른 비극의 장소에서 찍은 것들이다. 하지만 군락의 형태적 기괴함이 비극의 편재성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이, 보는 이는 사건들 사이의 '상관없음'을 잊게 된다. 길고 음산한 방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두 장의 사진이 도사리고 있다. 두 사진 사이에는 인접함과 크기 외에 아무런 연결지점이 없지만, 그 단순한 요소들이 두 사진을 같은 방법으로 읽게 만든다.
얼굴로 인해 나무는 초상처럼 표정을 갖고, 나무에 비친 빛으로 인해 얼굴에 반사된 빛에 눈이 간다. 그리고 텍스트를 읽으면 살을 부비고 살던 이의 부당한 죽음이 파고든 얼굴(47)과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농성장에 있던 나무를 파고들어 고사시키는 외래종 나무(48)를 한 덩어리로 묶게 된다. 그리고 나면 위에서 말한 사진들의 강도가 이 두 초상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깨닫는다. 양쪽 벽의 사진들은 강한 두 개의 자석의 주위의 쇳가루처럼 늘어서 있다. 그리고 각 사진도 인접한 다른 사진들과 함께 목소리를 내는 각자의 자성을 갖게 된다.
나는 사진가를 지우고 사진 이미지 안에 가능한 한 오래 머물러보려 했다. 이 이미지들은 부재감을 드러내는 방식에 따라 분류될 수 있었으며, 오로지 힘의 미세함만으로 묶이기도 하고, 인접한 사진들에 의해 목소리를 바꾸기도 했다. 그것은 컴퓨터가 사람의 의도를 전제하지 않고 이미지들을 무작위로 조합해서 의미를 솟아나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 과정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미지 읽기는 우리를 다시 사진가로 되돌아가게 한다.
사진 이미지에서 '이것임'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사진가의 가장 미세한 목소리를 듣는 것이며, 그의 힘 조절 자체를 하나의 유의미한 수행으로 보는 것이다. 또 사진을 모으고 분류하고 배치한 효과를 읽는 것도 사진가가 사진을 촬영하는 행위뿐만 아니라 조합하고 재구성하는 행위까지 의미심장하게 보는 것이다. 그래서 허무하지만(그러나 이것이 개인전을 위한 글이라는 점에서는 다행히도) 우리는 홍진훤으로 되돌아온다.
그는 늘 그곳에 없는 것, 뒷모습, 평평해져 버린 비극의 현장을 고요하고 밋밋하게 촬영하지만, 그 사진들을 다시 보정하고 새로 출력하고 재분류하고 전시하는 행위를 통해 의미의 요철을 만든다. 그래서 홍진훤이 자주 말했듯 그에게서 사진가와 기획자의 행위는 구분되지 않는다. 그의 사진을 읽기 위해서는 그의 촬영의 궤적을 따라가야 할 뿐만 아니라 전시와 프로그래밍의 과정들을 지켜보는 것이 필요하다. 차가운 시선으로 이미지를 읽을수록 사진가의 뜨거운 궤적을 보게 되는 것, 홍진훤의 사진을 읽는 경험은 그렇게 압축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