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준, 〈나의 리상국〉, 2018 © 최원준

수학자 조지 스펜서-브라운은 『형식의 법칙』에서 인간이 세계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행위가 자신의 관점으로 세상에 줄을 그어 이쪽과 저쪽을 구별하는 형식을 가진다고 했다. 사실, 인간은 세상에 ‘포함된 일부분으로서만’ 세상을 조망할 수 있다. 몇몇 우주인을 제외하고는 지구를 떠날 수 있는 인간은 없으므로 세상을 온전하게 바라볼 위치를, 이른바 ‘비판적 거리’를 가질 수 없다.

이러한 성찰이 함의하는 것은 그 어느 누가 자신의 관점이라는 줄을 긋더라도 전체를 조망하는 시점에서 그은 것이 아니므로, 그로 인해 만들어지는 구별 또한 온전할 수 없다는 점이 다. 사변적 실재론은 여러 사람의 그은 구별을 비교해야 한다고 제안하긴 하지만, 현실적으로 무엇을 비교한다는 것은 그저 우리의 뇌 속에 새로운 앎을 더해줄 뿐이다. 당연히 새로운 앎도 온전하지는 않다. 하지만 적어도 새로운 앎을 바탕으로 다시 긋는 구별은 이전보다 입체적임은 틀림없다.

이와 관련하여 랑시에르가 그의 저서에서 제시한 ‘생각에 잠긴 이미지’라는 개념은 ‘스펜서-브라운’의 형식과 유사한 한편, 미술 감상에 유용한 관점을 제시한다. 먼저 랑시에르가 생각에 잠긴 이미지라는 개념을 주장하기까지의 논리를 거칠게나마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그의 연구는 세계를 지탱하는 구조를 찾아내는 데 있지 않았다. 대신 그 구조를 정립하는 과정에  감성이 도구로 사용되며 기존에는 이 과정에 노동자의 감성이 배제되었음을 고발하는 데 있었다.

그는 이어서 노동자의 감성을 포함하는 감성을 근간으로 새로운 미적인 것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것을 성취하는 방법론이 생각에 잠긴 이미지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예술작품을 제작하는 사람은 이미 답이 정해진 도상을 화면에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줄을 그어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는 이미지를 제시해야 관객이 예술작품에서 느낀 감성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선택의 여부를 결정하게 되리 라는 전제였다.

‘스펜서-브라운’과 랑시에르가 제시하는 구별의 교차지점은 아마도 다른 이와 자신의 앎을 비교하는 과정에 있을 것이다. 옳은 것이 있다는 가정 대신 비교를 통해 대안적인 관점이 만들어질 잠재성에 기대는 방법론이다. 이를 예술에 적용하자면  예술 작품의 의미는 여러 관객의 관점 비교를 통해 의미를 선택/거부 혹은 자신만의 대안적 관점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거치면서 작품의 의미를 구성한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들의 논리로 김홍도 미술관에서 열린 《사이의 언어》에 출품된 최원준의 구작, 〈Made in Korea〉와 신작, 〈No Pain No Gain〉을 논하고자 한다. 필자 자신의 소회와 다른 이들의 관점을 여럿 적어 최원준의 작품을 읽고 이 평론을 읽게 되는 관객에게 의미를 선택 혹은 만들게 하는 사고실험을 제안하고자 한다.

먼저, 〈Made in Korea〉와 〈No Pain No Gain〉를 묘사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 두 뮤직비디오는 동두천 에서 일하는 아프리카 이주 노동자 이구웨 오시나치의 노래를 최원준이 오시나치와 공동 연출로 제작한 뮤직비디오다. 사용된 음악의 장르인 하이라이프는 서아프리카 특유의 리듬과 재즈가 결 합된 대표적 퓨전 댄스 음악으로 싱어송라이터이자 뮤직비디오의 주인공인 오시나치가 주로 작업 하는 장르이기도 하다.

음악에서는 레게와 유사한 경쾌한 리듬이 식별되는데, 하이라이프가 그것 의 원류임을 알게 한다. 가사는 영어, 나이지리아 어, 한국어가 뒤섞인 것으로, 작가가 2022년 12 월 9일 《생생화화》 워크숍에서 서술한 바로는 몇몇 단어들은 최원준 작가가 제안했다고 한다. 〈Made in Korea〉의 플롯은 잠에서 깨어나 일터로 향하는 듯한 어느 흑인(오시나치)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이어서 그가 전통의상을 구매해서 입고 중반 이후부터는 동료 아프리카 노동자들과 한국인 여성으로 보이는 한 명의 댄서가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데, 특별히 기획된 안무가 아니라 즉흥적인 것처럼 보인다. 시종일관 활짝 웃으며 춤추고 노래하는 오시나치와 친구의 모습 중간 중간에는 컨테이너에 트럭이나 자동차 부품으로 보이는 물건 들을 적재하는 모습이 비 친다. 노래의 가사는 자신이 도착했고 친절히 대해주는 한국의 친구들에게 감사한다. 최선을 다하 고 나머지는 신에게 맡긴다, 하나의 사랑 아래에서 조화를 이루고 사는 것, 아프리카의 멜로디, 인류 보편의 멜로디라는 가사 내용이 두드러졌다.

두 번째 작품인  〈No Pain No Gain〉에서는 오시나치가 공장에서 일하는 모습, 동료 아프리카 노동 자들이 일하는 모습이 짧기는 하지만 뮤직비디오 전반에 걸쳐 보인다. 기본 멜로디와 리듬은 전 작과 유사하게 경쾌한 한편, 뮤직비디오의 내용은 한층 어두워졌다. (코로나로 인해) 동료가 목숨을 잃고 공장과 공장을 옮겨 다니며 어려움을 겪었음을 토로한다.

그러나 희망과 용기를 주려는 오시나치의 의도는 무척 직접적인데, 가사를 보면, “태양과 달 빛은 온 세상을 비추고 … … 스타 는 아프리카에서 태어나고, 그의 영감을 담은 메시지가 많은 영혼을 구한다, 튼튼한 다리 주세요, 영혼을 구하고 싶어요” 등 수천 명의 마음 약한 이들이 영감의 메시지를 기다리고 있다는 내용이 특히 두드러진다. “영혼을 구하고 싶다”는 지점에서는 그가 전태일의 동상 근처를 거닐거나 그에게 인 사를 하는 모습이 교차한다. 중간에는 번화한 거리에서 연한 하늘색 새 양복을 차려 입고 롤렉스 등의 명품을 파는 쇼윈도를 구경하는 모습도 포함되었다.

관객1과 2는 모두 예술이론 교육을 받지 않은 이들이다. 필자는 이들 모두에게 구작을 먼저 보여 주고 감상을 물어보았고, 이어서 신작을 보여준 뒤 다시 감상을 물었다. 관객 1의 감상은 다음과 같다.

​“모르겠어요… 멜로디는 경쾌한데 가볍지는 않아. 무게가 있어. 나의 기분이 반영돼서 그리 느끼 는지도 모르죠. 가사는 별로 할 말이 없네요. 단순 반복이기도 하고요. … … 그런데 두 번째 작품 을 보니 이전 작품이 왜 거슬렸는지 알겠어요. 이전 작업에서는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았어요. 혹 시 흑인에 대한 편견 때문은 아닐까 싶기도 해요. 그런데 2편을 보니까 가사도 너무 빨라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고 그냥 거슬리는데, 그런데도 진정성이 있어요.

1편에서는 사랑이라 는 단어를 너무 가볍게 쓰지 않았나? 하고 느꼈고요. 근면해야 잘산다고 하는 게 … 근면하지 않으면 잘사는 것이 아니란 말이야? 가스라이팅 아니야? 네가 사랑을 알아? 하는 생각이 떠올랐 어요.. 그런데 2편에서는 사실적인 표현이라고 해석될 여지가 많았어요. 힘들고 아니고는 객관적 이지 않지만, 그의 괴로움도 느껴지고 그래도 희망이 중요하긴 하지.”

관객2의 감상은 다음과 같다. “인상적인 것은 융합 같은 주제 의식을 몸으로 보여주네. 춤추는 모습이나… 자연스러운, 체화된 …. 험한 일일 수 있는, 노동… 모든 ‘인류에게 모두 이런 특성이 있다’는 걸 느꼈어. 그걸 자신의 멜로디로 드러내고, 그것도 당당하게…. 우리는 친구이며 함께 할 수 있는 나라다. 게다가 실제로 유니버설을 외치지 않아? 자기 음악에 대한 자존감이 있고 거기에 한국은 나를 존중하는 친구다, 보은 이다… …

자신의 자부심을 유니버설한 것이라고 노래해. , 한국에서 만들어지기 는 하나, 자신의 리듬을 융합하는 것을 강조한 듯해. 맨 마지막에 맨 처음에는 모호하게 일하는 이미지는 담겼다는 것을 어찌 해석할까가? 노동과 각자의 문화를 믹스 하는 일이나 한국과 아프리카를 유니버셜하다고 믹스하는 일이 불가능해 보이지만 그것이 예술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 은 아닐까? 그것을 자신의 몸으로, 리듬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섞이지 않을 것 같은 것을 믹스할 수 있었지 않았나?

인류가 영웅 소비, 기술에 주목하지만, 원초적인 자신의 노래로 만든 것은 아닐까? 〈No Pain No Gain〉에서도 일관성이 보여. 이전 작품이 융합을 강조했다면 이번에 는 대조라는 문법이 들어가. 산재가 있고 그럼에도 성공을 기원하지. 전태일이 한 일이 약속의 이 행, 권리의 주장이라면 이 사람의 생각은 긍정적인 마음가짐이 보편적 진리라고 말하는 것 같아. 전태일이 네거티브를 보았다면 이 사람은 좀 달라. 자기존중…. 자긍심이 강한 사람이야. 생명과 같은 네거티브와 그 너머까지 양쪽을 모두 보면서 섭리가 여정임을 본 거지.”

필자 본인의 감상은 다음과 같다.

“첫인상은 비디오가 ‘흥으로 가득하다’였다. 이주노동자를 다루는 대부분 신문은 상대적으로 경제 수준이 낮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임금이 낮은 국가에서 고임금을 찾아 우리나라에 온 이주노동자 들이 얼마나 비인간적인 노동 조건을 수용하게 되는가와 이주노동자들이 한국 노동자의 일자리를 빼앗아 가거나, 잠재적 범죄자로 바라보는 편견을 다루는 기사들로 채워져 있다. 적어도 내가 가 진 정보는 그러하다.

또한, 아직도 부족사회를 형성하고 사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미개하다고 보는 나의 편견을 버리기 어려웠다. 이에 반하여 속 오시나치의 행복한 모습은 예상 과 상당히 어긋나 있었다. 전시장에 쓰인 텍스트를 보면 이렇게 예상의 어긋남이 작가의 의도라고 한다. 그럼에도 오시나치의 ‘흥’과 새 출발을 하는 어느 이주노동자의 순진한 희망을 따로 떼어 놓기 힘들다.

오시나치의 흥과 자기존중은 나이지리아 출신 이주노동자 대부분 감성과는 얼마나 동일하고 또는 다를까? 신문기사와 논문을 살펴보니 그들은 “K팝도 한국 문화도 관심 없고, 이들 다수는 동포 교회와 교민회를 통해 교류하며 고국에서의 문화를 지켜가고 있다”는 매일경제 김슬기 기자의 보 도를 발견했다. 아프리카 이주 노동자를 다룬 한건수 강원대 교수의 연구는 “그들에게 한국은 일 종의 경유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에 따르면, 다수의 나이지리아 이주 노동자는 단순히 임금(외화)을 고국에 보내는 데 궁극적 목표를 두지 않는다. 애초에 나이지리아 는 석유 수출국이고, 세계 24위에 해당하는 시장 규모를 자랑하는 국가이다. 물론 일인당 총생산 은 세계 하위권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한국에서의 이주노동자 생활을 자신이 고국으로 돌아가 한국과 지속적인 교역을 하는 회사를 차리는 데 필요한 인적 네트워킹, 물적 토대를 구축하는 데 둔다고 한다.

이들은 한국이 자신을 착취할 수도 있는 잠재적 적국이 아니라, 미래의 잠재적 무역 대상으 로 보는 것이다. 이들에게 성공적인 이주노동자 생활은 본국으로 컨테이너에 실어 보내는 물품을 근거로 평가된다. 그래서인지 〈No Pain No Gain〉에서는 동료와 컨테이너를 중고차 부품으로 가득 채우는 모습을 포함했다.

그가 나이지리아에서 이미 가수로 활동하던 사람이라는 점과 컨테이너 장면은 그가 예술인으로서, 그리고 나이지리아 이주 노동자로서 설정한 한국과의 관계는 같은 인간이라는 인권의 측면만 아니라 경제, 사회적 측면에서도 동등한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하지만 순진함에 가까운 자기존중의 가사들은 곧 그가 겪을 실망을 떠올리게 한다. 이미 두 번째 뮤직비디오의 분위기는 조금은 암울해졌다.

비디오에서 최원준 작가의 목소리와 오시나치의 목소리를 구별하는 일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순 진한 가사와 케이블 텔레비전 광고를 떠올리는 소박한 형식으로 구성된 뮤직비디오는 최원준 의 선택이었을까? 아니면 오시나치의 선택이었을까? 이전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미학적으로 정제된, 혹은 하이아트에 가까운 문법을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니면 소박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최원준의 〈My Utopia〉와 같은 과거 작품에서 적용된 미학적인 장치들을 이 작품에서 배제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비디오 작품의 시각적 문법이나 가사의 단순함은 오시나치가 바라는 것으로 추정되는 동등한 위상을 오시나치에게 가져다 줄까?”

여기까지가 세 사람의 관점, 아니 구별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여러 사람 의 관점을 교차하고 비교하면서 과연 새로운 앎, 혹은 새로운 감성이 자신의 뇌리에 정립되는 과 정을 경험했는가?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