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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디지털 시대 사진의 구상과 추상 사이에서
2023
신혜영 | 미술평론가

《Equation》 전시전경 © KT&G 상상마당
사진은 기계를 통해 세계를 재현한다. 다시 말해 특정한 대상을 카메라로 포착하여 이미지로 다시 나타나게 하는 것이 사진의 본질인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사람들은 사진을 볼 때 자연스레 그 이미지가 무엇을 찍은 것인지 대상의 정체를 묻는다. 이미지를 대상과 등치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진의 지시적 (indicative) 특징은 매체의 본성이면서도 예술적 표현을 제약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지점에 주목해 사진의 역사에서 여러 예술가들이 대상을 재현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고, 구상성을 지닌 동시에 추상적 형식을 통해 미적 가치를 달성하려는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작가들의 포토그램 (photogram)과 만화경에 기초한 광학장치에 의한 보토그래프(vortographs)부터 사물을 근접 촬영하여 대상의 형태나 표면의 질감을 강조한 미국의 형식주의 사진들까지 다양한 사례가 있다.
디지털 기술이 발달한 이후 그 양상은 더 다양하고 복잡해졌다. 그러나 오히려 조작과 왜곡이 손쉬워진 까닭에 기준과 의도가 분명하지 않을 경우 예술로서의 가치를 확보하기 어려운 경우가 더 많아졌다. 포스트-포토그래피(postphotography) 시대에 사진은 어떻게 예술로서 자신의 영토를 지켜갈 수 있을까.
서동신은 구상과 추상 사이를 오가며 오늘날 사진이 지닌 예술적 가능성을 타진한다. 십 수 년 간 사진과 관련된 여러 분야에서 일해 온 그는 누구보다 사진을 찍는 행위에 익숙하지만, 그런 만큼 사진의 사실적 재현이 지닌 한계에 관해 깊이 고민해 온 것으로 보인다. 사진 매체가 지닌 예술적 표현에서의 제약뿐 아니라, 지시 대상과 이미지 사이의 관계가 단일한 의미작용으로 귀결되는 수용의 측면에서 말이다.
작가는 사진의 지시적 본성을 따르되 촬영 이후 다른 관점에서 작가적 행위와 선택을 이어나감으로써 또 다른 의미작용을 발생시키고 새로운 이미지가 지니는 시각적 아름다움과 그로 인한 쾌를 지향한다. 이 글은 그의 주요 작업인 ‘방정식(Equation)’과 ‘엔트로피(Entropy)’에 관한 것이다.
먼저 ‘엔트로피’가 ‘방정식’에 선행한다. ‘엔트로피’는 ‘방정식’의 출처(source)가 되는 사진연작으로 작가가 주변의 평범한 사물과 풍경을 별다른 조작 없이 촬영한 것들이다. 각각의 이미지는 일상에서 흔히 마주칠만한 모습이지만 약간의 차이로 인해 다르게 보이는 상태를 포착한 것으로, 대상이 지닌 전형성을 드러내기보다 작가의 시각적 거름망을 거쳐 새롭게 탄생한 것들이다.
예컨대 잘 차려놓은 음식사진이 아닌 식사를 마친 어지러운 식탁, 장식장에 잘 정돈해놓은 그릇들이 아닌 설거지를 막 끝내고 질서 없이 겹쳐놓은 습기 맺힌 식기들, 벽에 걸린 작품 앞이 아닌 빈 전시장 안에 돌아가는 대형 팬 둘레에 설치된 접근 방지 선, 구름에 둘러싸인 푸른 바다 위를 나는 비행기가 아니라 빛이 반사된 푸르스름한 바닥 위에 모형 비행기를 올려놓은 것처럼 평면적으로 느껴지는 이륙 중인 비행기와 같은 것들이다.
‘무질서한 정도’ 혹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정도’를 가리키는 ‘엔트로피’라는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작가는 이 세계가 무수히 많은 ‘시각장(visual field)’으로써 저마다 다르게 경험된다는 사실을 익숙한 듯 낯선 사진들로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엔트로피’의 사진 속 대상들은 흔히 놓이는 위치로부터 벗어나거나 원래의 기능과 맥락으로부터 배제되고 우리가 알고 있는 사물의 질감이나 색과는 다르게 제시된다.
익숙하지 않은 카메라의 시점에서 대상을 바라보거나 전체가 아닌 일부분을 근접 촬영하는 등 전체 형상과 실제 크기를 가늠할 수 없도록 만든 결과다. 공사장의 가림막과 방수포는 주름진 은빛 커튼과 푸른 장막으로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작업실 한 편에 켜켜이 쌓이고 기대진 합판은 반복된 기하학적 선과 은은한 빛을 머금은 색면(color-field)이 된다. 이렇듯 작가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대로 ‘인식하는 것(perceiving)’이 아니라 ‘보는 행위(the act of seeing)’ 자체에 주목하여 자신이 경험한 세계를 사진 프레임 안에 새롭게 구성한다.
‘엔트로피’는 이미지로 그치지 않는다. 작가는 촬영 후 개별 이미지에 저마다 떠오르는 하나의 단어를 붙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작가의 자의적 선택에 따른 것으로 비슷해 보이는 이미지에 전혀 다른 단어가 붙기도 한다. 예를 들어 나무와 숲을 찍은 여러 장의 사진에 ‘낮은(low)’, ‘정원 가꾸기(gardening)’, ‘수직으로 세워서(apeak)’, ‘흩어지다(scatter)’, ‘무성한(flourishing)’ 등 품사도 다르고 별다른 연관성도 없는 단어들이 각각 연결되어 있다.
연작의 일부를 모은 사진집 『엔트로피』에는 각 이미지 옆에 캡션 대신 단어의 품사와 사전적 의미가 적혀 있고 책 앞부분에는 단어들을 모아놓은 리스트가 있다. 독자는 이미지를 보고 떠오른 단어와 비교해가며 사전적 의미에 따른 단어를 유추하고 리스트에서 작가가 떠올린 그 단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은 마치 작가와 대화를 나누는 듯한 순수한 즐거움을 준다. 물론 작가가 의도한 의미작용 자체를 거부하는 것 역시 관객에게 허용된 선택이다.
텍스트를 무시하고 이미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앞뒤로 연결되고 양쪽으로 펼쳐진 페이지의 인접한 이미지 사이에서 일어나는 이미지의 연속성(seriality)과 상호작용으로 인해 단일 이미지에서는 생기기 어려운 또 다른 표상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단어와 단어의 연결로 어구와 문장이 만들어지고 그 의미가 확장되듯, 이미지와 이미지의 연결 역시 그 자체 시각적 풍요로움을 가져다준다.
이와 같이 사진 이미지가 지닌 지시적 성격과 그로 인해 제한되는 의미작용을 여러 관점에서 극복하고자 한 작가의 노력은 이후 여러 장의 이미지를 포토샵에서 변형해(transform) 하나로 합치는 연작 ‘방정식’으로 이어졌다. 작가는 처음에 ‘엔트로피’ 폴더에서 단어를 기준으로 이미지를 골라 사용했지만, 단어로 기억하는 이미지의 선택이 한편으로 언어에 갇히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미지를 숫자로 다시 저장해 그야말로 임의로 꺼내어 결합하게 되었다고 한다.
먼저 가장 기본이 되는 변형 방식은 한 장의 이미지를 바탕에 두고 그 위에 여러 장의 작은 이미지를 배치하는 것이다. 이미지의 일부분을 자르지(cropped) 않고 원래 포맷을 그대로 살리되 크기의 극단적 대비와 배치된 위치로 인해 이미지들 간에 일어나는 충돌과 조화가 뜻밖의 새로운 화면을 만들어낸다. 경우에 따라 음화/양화의 색 반전을 더 하는 정도가 – 전체 연작의 제목이자 – 첫 번째 변형 방식인 ‘방정식’에 해당한다.
두 번째 방식 ‘불협화음(Cacophony)’은 두 장 이상의 이미지를 동일한 크기로 겹친 상태에서 RGB 중 특정 색을 일정 비율로 추출해 제거함으로써 생기는 변형이다. 색의 부분적 삭제로 전체 화면의 색이 변하고 해당하는 색이 사라진 부분의 뒤로 중첩된 다른 이미지들의 형상 일부가 드러나면서 불규칙하게 섞이게 되는 보다 큰 변환이 일어난다.
앞서의 ‘방정식’이 이미지들 간의 병치와 그로 인해 전체 화면을 구성하는 ‘물리적’ 변형이라면, ‘불협화음’은 특정 색의 추출이라는 단순한 행위만으로 원래 이미지의 형상들이 알아볼 수 없게 뒤섞이는 일종의 ‘화학적’ 변화가 일어난다. 그 결과는 불협화음처럼 낯설고 불편하지만 작가의 의도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 어쩌면 짐작도 할 수 없는 – 전혀 뜻밖의 이미지로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스티커를 띠어낸 듯 지워진 부분 사이로 보이는 구체적인 형상들은 추상에 가까운 전체 화면과 대조를 이루며 시선을 잡아당긴다. 그런 한편 ‘산술(Arithmetic)’은 같은 크기의 두 이미지를 중첩시키는 것까지는 ‘불협화음’과 같지만 결과물의 양상은 크게 다른 방식이다. 멀리서 보면 정체를 명확히 알 수 없는 흐릿한 하나의 이미지로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아주 가느다란 수평의 절개선이 반복된 채 두 이미지가 하나로 겹쳐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제목이 말해주듯 정확한 산술적 계산에 의한 변형으로, 두 장의 이미지를 각기 10개의 픽셀 너비만큼 가로로 가늘게 자른 후 하나 건너 하나씩 삭제하여 잘려나간 부분으로 서로 다른 이미지가 교차되도록 중첩한 것이다. 겹쳐진 두 장의 이미지는 디지털의 0과 1처럼 부재와 존재가 반복되어 절반만 보이게 된 것이지만 사람의 눈은 그것을 흐릿한 하나의 이미지로 파악하게 된다.
이처럼 작가는 일종의 매뉴얼에 가까운 간단한 몇 가지 포토샵 방법을 사용해 ‘엔트로피’의 구상적 이미지들을 ‘방정식’이라는 추상에 가까운 새로운 이미지로 변형시킨다. 처음에는 세 가지 변형 방식에 따라 ‘방정식’, ‘불협화음’, ‘산술’로 제목을 구분했지만 현재는 ‘방정식’이라는 하나의 테두리 안에서 각각의 방식을 교차 적용하여 보다 변칙적인 화면으로 확장해가고 있다. 여러 장의 이미지를 색의 반전과 부분적 추출을 거쳐 두 장의 이미지로 만들고 중첩하여 교차 삭제하는 식으로 말이다.
일정한 원칙을 적용해 결과를 도출하지만 차수가 올라갈수록 복잡해지는 수학의 방정식처럼 이미지의 숫자와 적용하는 방식이 늘어날수록 최종 이미지는 구체적 형상을 알아보기 힘든 추상에 가까워진다. 그 과정에서 상수가 되는 것은 언제나 작가의 감각과 직관이다. 추상화가가 그림을 그려나가다가 마칠 순간을 자연스럽게 아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상 서동신의 ‘방정식’은 디지털 추상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구체적 형상의 재현으로 인한 제한된 의미 해석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 작업의 의도나 작가의 감각과 직관에 따른 과정과 결과물의 양상뿐 아니라 물질성에 대한 중요성 측면에서도 그것은 추상화와 유사하다.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archival pigment print)로 인화된 그의 사진들에는 전체적인 화면의 분위기를 이끄는 주조색이라 할 만한 ‘색면’이 두드러진다.
구상 사진인 ‘엔트로피’에서마저도 색면은 빛을 충분히 머금은 특유의 톤으로 대상의 일정 면적 이상을 차지하는 고유한 형식적 요소다. ‘엔트로피’를 기반으로 하는 ‘방정식’ 역시 포토샵의 변형을 거친 후에도 그러한 색면이 화면 전반을 주도한다. 인화지에 도포된 잉크의 색면이 캔버스에 펴 발린 물감을 대신할 뿐 지지체(support) 표면 위에 안료(pigment)가 올라앉은 점에서 추상사진 역시 추상회화와 같이 물질성을 지닌 평면이다.
다만 미세하게 분사된 잉크가 인화지 표면을 고르게 뒤덮은 사진 고유의 물질성은 유화 물감의 붓질과는 다른 특유의 형식미를 부여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처럼 복잡한 시각장의 추상 이미지를 완성하기까지 작가는 가장 평범한 소재와 기본적인 디지털 기술을 사용한다. 소형 디지털 카메라를 소지하고 다니면서 일상에서 이미지를 포획하고, 그렇게 채집된 이미지들은 그 자체로 독립적 연작이 되거나 작가의 커다란 저장소 안에 들어 있다가 길어 올려져 단순한 조작을 통해 새로운 이미지로 완성된다.
사양 높은 중대형 디지털 카메라나 포토샵의 복잡한 기술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익숙한 가장 보편적인 도구와 방법을 선택하는 것은 작가가 스스로에게 적용하는 일종의 제약(constraints)일 것이다. 일정한 한계 내에서 우연적 요소의 개입을 허용하면서 수많은 반복적 시도와 예술적 직관을 통해 해석이 열린 고유한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말이다.
그것이 구체적 대상의 기계적 재현이라는 매체의 본성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이미지를 지시대상과 동일시함으로써 생기는 한계를 벗어나 오늘날 예술로서 사진이 설 자리를 확보하기 위한 작가의 전략일 것이다.
“도구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만들어지고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의 욕망과 의도를 나타낸다. 우리는 도구를 만들고 도구를 우리를 만든다. 특정한 도구를 사용해 우리가 원하는 것에 부응하고 우리가 의도하는 바를 드러냄으로써 말이다.” 포스트-포토그래피 논의 초기에 변화된 이미지의 위상에 관해 이야기한 윌리엄 미첼의 말이 서동신의 사진과 만나 깊은 공명을 일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