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하는 사람은 세계와 아무 상관이 없다.
경험을 실로 그 사람 안에 있으며 그와 세계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다.
- 마틴 부버, 나와 너, 9쪽
구나는 말수가 적은 작가다. 그는 작업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주저한다. 확신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는 확신하는 자신을 의심하기에 주저한다. 작업은 침묵에 더 가깝다. 심지어 전시에 대한 단서도 매우 제한적이다. 쌍둥이의 목차는 마치 베일에 싸인 어떤 인물-들을 추적하는 느낌을 준다. 관람자는 최소한의 힌트를 토대로 작업 사이를 더듬거릴 뿐이다. 나는 그의 작업을 본다는 표현보다 읽다가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현대미술은 당연히 독해하는 것이라고 지적할지도 모르겠다.
여기에서의 ‘읽다’란 구나의 작업은 조형적 어휘를 통하여 문학적 정서를 끌어낸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작업의 표제들,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낱말과 문장 들은 보는 행위에 영향을 준다. 심지어 영감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그래서 인색한 단서에도 불구하고 작품 자체만큼이나 제목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하다. 〈테이블, 센티멘털 로그인〉(2020)은 부재와 기억에 관한 작업이다. 그 기억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찾는 건 작업을 마주한 각자의 몫이다.
누구라도 낡은 테이블을 만지면서 이제는 부재하는 과거를 떠올릴 수 있지 않은가. 만약 그런 경험이 없다면 구나의 테이블, 기능은 사라지고 기표와 언어만 남겨진 앙상한 테이블에 접속해보자. 우연히 기억과 접속하는 날이면 예기치 못한 사람, 냄새, 풍경, 소리가 불현듯 엄습한다. 그 어떤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억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각한 이후가 될 것이다. 여간 말수가 적은 작가와 달리 그의 작업은 관람자의 배회를 허용한다.
여기 납작한 비정형적인 두 개의 판이 서로 기댄 상태에서 한쪽 판 사이로 불쑥 코처럼 보이는 판이 불쑥 솟아있는 작업이 있다. 김현의 시에서 발췌한 문장을 표제로 사용한 〈너의 등으로 내 얼굴이 쑥 들어갔다〉(김현, 기화, 입술을 열면, 창비, 2018)라는 작업이다. 김현의 시 “기화”는 보이지 않는 따뜻함이 어떻게 영혼을 어루만지는지를 가만가만 이야기한다.
그저 추상적인 형태로만 머물던 이 작업이 표제를 만나자 불현듯 타인의 진심이 나의 영혼을 흔들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던 기억을 불러온다. 납작한 세계가 서로 얽힌 모습에 문장이 닿자 어렴풋이 관능적인 이미지가 스쳐 지나간다.
어쩌면 삶이란 평생 자신의 생각과 행동 사이의 오차를 줄여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말과 글, 생각과 행동,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 사이의 간극을 말이다. 문명화 된 인류는 태어날 미래 세대에게 훈육을 용인했고 문명이 심화될수록 훈육의 강도도 덩달아 강화되었다. 이것이 푸코가 현재를 이해하기 위하여 과거를 되돌아본 이유였고 데리다가 한 개인이 자신과 무관한 오랜 역사와 관습으로 재단될 수 있는지를 물었던 까닭이었다.
구나의 작업은 보는 것을 문제 삼고 있지만 그 기저에는 불확실하고 심지어 비자율적인 인간의 지각을 의심으로부터 비롯된다. 전시 《쌍둥이의 목차》는 이런 실존의 고민을 품고 있다. 특히 일란성 쌍둥이에게 실존이란 하나가 곧 둘이자 둘이 하나인 삶을 살게 된다. 형제는 당연히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기 마련이지만 쌍둥이처럼 외모가 동일한 쌍둥이 형제는 외모, 목소리, 말투, 걸음걸이, 성격의 동일함 혹은 오차는 개인의 내면보다 더 우선적으로 존재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외형상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분명히 다른 존재인 쌍둥이는 상호참조적 존재로 하나는 다른 하나와 비교되면서 둘은 마치 하나처럼 받아들여진다. 예를 들어 워홀이 프린팅한 마릴린 먼로는 동일한 원본을 참조하여 복제되었다. 원본에서 파생된 시뮬라크르는 무한복제가 가능하다. 따라서 원본은 복제물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그러나 쌍둥이는 서로 매우 닮아있지만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이기에 그들은 각자 원본이지만 동시에 비교 대상이 된다. 그들은 평생 비슷한 것과 다른 것을 비교 받으면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게 된다. 그러나 만약 우리에게 이러한 외형적 기준, 외모와 음성의 유사성을 존재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면 어떨까?
쌍둥이의 목차는 말과 사물의 관계처럼 의도적으로 운명적 끈을 엮어놓은 문화의 틀을 벗어난다. 그것은 구나의 작업이 애초부터 던진 질문이다. 구나는 이번 전시에서 닮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쌍둥이라는 표상은 눈요깃감으로 신화로 지나치게 소비되었다. 닮음이란 서로의 존재가 이미 다르다는 사실을 전제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그래서 구나는 닮음보다 서로가 맺는 관계에 집중하고자 한다. 쌍둥이의 목차는 잘 알려진 쌍둥이의 전형을 반복하지 않는다.
여기서 쌍둥이는 소울메이트, 도반, 나와 너 혹은 타자이기에. 이미 만들어진 세계의 기준을 따르지 않으면서 형성되는 유연하면서도 감각적인 관계를 찾기 위한 여정으로 볼 수 있겠다. 이 관계는 두 존재, 연인, 우정, 형제를 아우른다. 따라서 이번 전시는 지난 해 개인전 《너와나와너와나》(2019, 갤러리 기체)와 이어져있다. 공간과 좌대 위에 세워지고 매달려 불안정하게 존재하는 언어를 가지지 못한 사물 혹은 부스러기들은 하나가 되고자하지만 실패할 수밖에 없는 연인의 신체를 떠올린다.
구나는 신체의 겉모습을 재현하지 않는다. 대신 신체를 해부하여 시적 언어의 물화를 시도한다. 문학적인 작업 표제가 자아내는 정서는 논리나 개념보다 감각적인 면이 보다 강하게 드러난다. 서양미술사를 따라가다 보면 고전주의에서 모더니즘으로의 변곡점이 나타나는데, 미술이 시대를 표상하는 기호에서 미술이란 본질을 찾아가는 혹은 발명하는 시기임을 알게 된다.
예술의 기능과 사회적 역할을 차단하고 순전히 그 자체로 존재하려는 욕망이 폭발하던 이 시기는 언어와 이미지의 연결고리를 의도적으로 지우거나 어긋하게 한다. 이 시기의 미술은 시각적인 것 너머 존재의 진실을 탐구하고자 했다. 구나의 작업은 미니멀리즘과 탈매체라는 정형화된 미술사적 서사와도 어긋나 있을 뿐만 아니라 가상적 세계를 떠도는 빈곤한 이미지의 변주와 번역이 마치 동시대를 견인하는 미학으로 치부되는 현상과도 거리를 두고 있다.
그럼에도 구나가 펼쳐놓은 지칭할 수 없는 것들의 조합은 가장 기초적인 행위들 – 질료들을 편평하게 펴고, 동그랗게 말거나 동그란 또는 네모난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 구멍을 내거나 도려내어 그것들을 엮고, 서로를 기대어 세우는 – 을 거쳐 시적 장면을 끌어낸다. “이를테면, 작품의 현실에 대한 찬미, 시에 있어서 언어의 리듬의 찬미, 음악에서 소리의 찬미, 회화에서 빛이 된 찬미, 집에 있어서 돌이 된 공간의 찬미가 그것이다.”(모르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 323~4쪽)
쌍둥이의 목차는 끊임없이 공명을 만들어낸다. 표제와 작업, 물질과 공간, 너와 나/나와 너 사이의 조응은 영화의 시퀀스가 엮인 것 같은 몽타주 효과를 일으킨다. 굳이 영화적이란 의미를 덧붙일 필요는 없다. 그의 작업은 명시적이지 않고 늘 두루뭉수리하고 비인칭적이며 무엇과 관계된 형용사적 태도를 유지한다. 이는 고정되지 않으면서 늘 상호작용하는 어떤 상태, 성질, 질감에 힘을 싣는다는 걸 의미한다. 쌍둥이의 목차는 이러한 작가의 태도를 가장 잘 드러낸 전시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