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나 작가가 글을 부탁하며 한 말이 있다. 중요하고 또 조심스러운 말투로 이제는 말할 수 있다고 했다. 그의 작업이 초등학교 4학년부터 20대 초까지 겪은 질병의 경험과 닿아 있다는 것을. 그는 뼈에 문제가 있었고, 턱과 목을 받치는 큰 철제 보조기를 착용하고 생활해야 했다. 척추의 휨이 목으로, 그리고 심장 판막으로까지 영향을 끼쳐 큰 수술을 받기도 했다. 한 자세로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누워있어야 한 적도 있었다.
작가의 작업을 처음 만난 것은 두산갤러리 기획전 《눈은 멀고》(2023)에서다. 모서리로 서서 옆으로 누운 형상을 보여주는 〈화이트 본〉(2019-2023), 수평으로 누운 면이 여러 개의 조심스러운 다리들로 받쳐 올려져 있는 〈등허리물결 오버 아이보리 힐스〉(2023). 이 작업들은 수평과 수직, 개체와 다수, 직선과 휘어짐이라는 형상의 이분법적 이해를 간결하고 조용하지만 동시에 근본적인 방식으로 구부려낸다.
등이 땅에 닿지 않는 방식으로 옆으로 누운 몸은,
우리가 걷는 경로에서 길을 돌아가게 만드는 턱이 된다.
여러 다리의 도움으로 바닥에서 띄워진 몸은,
땅 밑에 묻힌 것을 그대로 두지 않고, 올려 보여주고자 하는 조심스러운 의지이자 용기다.
이 작업들은 어떤 평평한 몸에 관한 것이고, 틀어진 뼈에 관한 것이었다. 작가는 어리석고 우둔한 것에 대해, 미숙한 자신의 성정에 대해서 덤덤히 말한다. 이제는 우둔한 면도, 아픈 것도, 어리석은 것도 드러내고 싶다고 한다. 우둔하고 어리석다고 해도, 열망과 열병이 없는 것은 아니라 한다. 이런 그의 고백 앞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그의 질병이 어떤 경험이었는지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말이 즉각적으로 건드린 나의 작은 아픔을 생각해 보는 일이었다. 우리 각자의 몸이 과거에 겪은, 지금 있고, 앞으로도 있을 어떤 아픔. 생채기, 질병, 장애, 정상이 아닌, 비난받고, 기울어지고 휘어진 뼈. 그것들을 모아 보는 일, 그리고 모아진 어떤 뼈 더미를 상상하는 일.
1. 어떤 걸음걸이: 류머티즘과 요추통
작가가 척추에 질병을 앓고 있던 12세와 비슷한 나이에 나도 류머티즘을 앓았다. 신체의 면역시스템이 자신의 관절을 공격하는 자가면역질환인 이 병은 원인을 알 수 없고, 당시엔 확실한 치료제가 있지도 않았다. 이는 그저 어떤 날, 잘 구부러지지 않는 손가락 관절과 손바닥뼈 속의 아픔을 발견하는 일이고, 걸을 때마다 발바닥의 뼈 안의 염증을 느끼는 일이었다. 움직일 때마다 느껴지는 속에서 멍을 베는 듯한 고통은 사람을 위축되게 했다.
류머티즘의 특징은 감기를 앓고 낫는 것처럼, 어느 순간 금세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이 병과 같이 사는 일은 변덕스러운 몸을 인식하고 그것에 짜증을 내는 일에 가까웠다. 지금은 치료제를 먹고 나아져 아팠던 기억을 되돌아보고 있지만, 아마 언젠가 다시 나의 관절은 제 기능을 못 하고 굳어질 거다. 몸은 노화할 거고, ‘멋진 남자’처럼 곳곳이(straight) 서서 앞을 향해 걷는 일은 점점 어려워질 것이다. 머리카락은 새치로 하얘지고, 하나씩 빠지고, 못생겨질 것이다. 젊고, 찬란하고, 유능한, 사회가 환대하는 어떤 몸과는 점점 멀어질 것이다.
류머티즘의 고통을 떠올리는 일은 잠시나마 잊고자 했던 몸의 노화, 퇴물이 되는 것, 언젠간 마주할 죽음을 생각하게 한다. 구나 작가가 우둔함과 아픔을 받아들이고자 한 것처럼, 나는 앞으로의 늙을, 잘 움직이지 못할, 못생긴 내 몸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매력과 건강이 가장 비싸게 판매되는 자본주의 시대에서, 못생기고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몸을 가지는 일은 가난만큼이나 큰 죄를 짓는 일이다. 나는 매력적이지 못한 몸을 용서할 수 있을까? 그런 용기를 가질 수 있을까?
뼈에 생긴 질병 중에 아직도 겪고 있는 것은 요추통이다. 9년 전 데드리프트의 무게를 무리해서 들다(이 또한 ‘멋진’ 몸을 만들기 위한 몸부림 중 하나였다) 허리가 나간 뒤로, 만성적인 통증을 얻었다. 뼈의 통증 때문에 수직으로 서기가 힘들어졌고, S자로 척추가 휘어졌다. 복부에 힘을 주고 있지 않으면 올챙이처럼 배가 나와 이상해 보인다. 정상적으로, 꼿꼿이(straight) 걸으려고 매번 노력하지만, 자꾸 실패한다.
정치 이론가 아이리스 매리온 영(Iris Marion Young)은 「계집애처럼 던지기(Throwing like a girl)」(1990)에서 외부의 시선을 의식하며 행동하는 주체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의 글에서 남자아이들은 야구공을 잘 던지기 위해 효율성을 고려해 물리적으로 움직이지만, 여자아이들은 ‘남자처럼 던질 수 없는 자신의 몸’을 또 다른 외부의 눈으로 의식하며 공을 던진다. 여기서 공을 던지는 자세는 효율적이고 정석적인 움직임을 벗어나, 어정쩡하게 흐트러진다. 사물을 던지는 자이자, 동시에 사물처럼 관찰되는 대상인 ‘대리 주체’, ‘사이 주체’로서 여성. 던져진 공은 직선을 벗어나 이상한 방향으로 튀어 나가 기울어진 호를 그린다.
이런 여성의 던지기와 함께, 게이 남성의 걸음걸이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성애자(straight) 남성처럼 곳곳이 걸을 수 없는 걸음걸이. 엉덩이 근육의 문제인지, 척추의 문제인지, 당당하고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게이 같은’ 걸음걸이. 미국의 미술가 브루스 나우만(Bruce Nauman)은 이런 게이 같은(혹은 멸칭으로서 ‘계집애 같은’) 남자의 걸음걸이에 관한 작업을 했다. 〈과장된 태도로 정사각형 둘레를 걷기〉(1967-68)는 정사각형 라인에 맞춰, 강박적으로 반복해 걷는 작업이다.
‘직선 라인에 두 발을 정렬하라’라는 스코어-명령으로 인해 ‘정상적인’ 걷기가 불가능해지고, 몸은 곡선이 강조된 뒤뚱거리는 걸음걸이로 무너진다. 그리스 조각에서의 안정적인 자세와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콘트라포스토(contrapposte)를 차용한 나우만은, 포즈를 무너트리고, 퇴화시키고, 우스꽝스럽게 하강시킨다.
‘더러운 땅’, ‘물화된 대상’에 가까운 이 몸이 걷는 와중에, 형이상학적이고 이상적인 몸은 낱낱이 소진되어 없어진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서 규율에 따라 강박적으로 움직이는, 그 자체로 불쌍하고 아름다운 몸이 전면에 드러난다.
2. 뼈와 뼈가 아닌 것
뼈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구나 작가가 상상하는 그 어떤 뼈에 관해 일말의 실마리를 얻기 위해, 뼈가 아닌 것을 더듬어 보는 일이 필요할 것 같다. 뼈는 무엇을 위해 있는가? 속으로 지나가는 신경들. 붙어 있는 살점과 근육들, 외부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피부,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매력적인 얼굴. 찬란한 이미지.
살은 생명의 소산이다. 살 한 점에 드글드글대는 수많은 세포들, 신호와 호르몬들, 물질의 이동들. 생명이 꺼지면, 살은 골격 가까이 움푹 들어간다. 더, 더, 들어가고 썩어 스러진다. 구나는 이와 비슷한 살이 없이 죽어 말라비틀어진 것들을 작업에 들여온다. 포도 알맹이가 문드러지고 남은 앙상한 가지, 골격만 남은 마른 나뭇잎, 미라, 칼슘의 빛깔들. 고여 썩는 물. 그는 어두운 밤이 아닌 어스름한 빛이 있는 낮에 이것들을 바라본다.
모든 살이 꺼지고 난 후 드러난 뼈의 이미지는 얼굴의 이미지와는 다르다. 그것은 사회적인 것으로부터 후퇴하고, 한참 물러난 뒤 남은 무엇이다. 긴 시간의 풍화 속에도 살아남는 것. 죽음을 돌아보고, 죽음을 맞이한 뒤에도 남아 있는 찌꺼기. 딱딱한 잔여. 그곳에 통상적인 사회적 이미지가 들어설 틈은 단호히 없다. 그것은 피부를 제시하는 일도 아닐 것이다. 살과 살이 만나, 에로틱한 접촉을 할 수 있는 잠재적인 상태, 작가는 그것과 멀어진다. 우리는 오직 다 죽은 딱딱한 뼈를 만진다. 본다, 떠올린다, 되짚는다. 기억한다.
3. 심봉과 심봉의 바깥: 바니타스적 대상으로서의 뼈
미술의 기원을 사라진 대상을 기억하고자 하는 염원에서 출발한 것으로 본다면, 조각은 영원할 수 없는 인간의 신체를 부피를 가진 물질로 눈앞에 두고자 하는 욕망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피그말리온은 현실의 살아 있는 몸에서 무언가를 경감시켜 만든 대상, 어떤 조각상을 사랑했다.
조각과 인간 신체의 유사 관계를 보았을 때, 인간의 뼈는 조각의 심봉에 해당한다. 작가의 작업은 뼈 자체를 제목에 포함하거나(〈화이트 본〉, 〈아이보리수레아레강줄기백본〉), 유골의 색상과 비슷한 밝은 베이지색을 조각과 회화에 사용한다. 뼈를 단순한 구조체가 아니라 작업의 총체적인 결과물로 드러내는 방식과 태도는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전통적인 조각에서 심봉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중력을 감당하기 위해 짜인 구조물로, 무언가를 물질로 구현하기 위해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만, 전면에서 감춰진다. 이러한 조각은 사건을 행하는 실질적인 존재들을 드러내지 않고, 형이상학적인 이미지를 우선으로 내세운다는 점에서 구조적 보수성을 띤다. 이러한 이유로 20세기 초부터 조각가들은 심봉이라는 구조체에 의문을 품었다.
조각에서 좌대를 없앤 것으로도 유명한 앤서니 카로(Anthony Caro, b.1924)는 심봉과 그 위에 붙는 점토와 같은 가소성의 재료, 외부로 드러나는 최종적인 이미지의 구분을 없애 통합체로써 조각을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당시의 조각가들은 이처럼 심봉 자체의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여러 가지 차별화된 경로를 모색했다.
헨리 무어(Henry Moore, b. 1898)는 조각의 유기적 형상으로 스스로 설 수 있는 방식을, 데이비드 스미스는(David Smith, b.1906) 용접 기술을 사용해 구조체 자체가 형상이 되는 방식을 탐구했다. 이는 조각에서의 심봉(인체의 뼈), 즉 하중을 담당하는 ‘핵’을 구조적으로 제거하는 흐름이었으며, 좀 더 근본적으로는 인간을 유비하는 형상과, 인간(주체)이 만들 수 있는 형상 체계 양쪽 모두로부터 벗어나는 흐름이었다.
일련의 미니멀리즘 조각가들의 이러한 실험적인 작품 중 구나 작가의 기울어진 뼈 조각과 흡사한 형태를 띠고 있는 조각이 있다. 리처드 세라 (Richard Serra, b.1938)의 〈기울어진 호〉(1981)가 그것이다. 이 작품은 1981년 미국 정부의 의뢰를 받아 뉴욕 맨하튼 연방 프라자 광장 앞에 세워진 공공 조각으로서, 길이 36m 높이 3.6m가 넘는 크기를 지녔고, 당시 광장을 이용하던 시민들의 반발에 부딪쳐 1985년 결국 철거되었다.
시민들이 이토록 크게 반발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광장을 가로지르지 못하게 비효율적으로 가로막고 있다는 점, 광장에서 다른 일들이 벌어지지 못하게 큰 공간을 차지한다는 점,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무겁고 위험한 상태라는 점 등등. 무엇보다도 시민들은 이 조각을 ‘아름답다’고 여기지 못했던 것 같다.
리처드 세라의 〈기울어진 호〉(1981)와 구나 작가의 〈화이트 본〉(2019-2023)의 이미지상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이 두 조각은 40년가량의 시차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다. 73t의 무게를 가진 거대한 리처드 세라의 조각은 시민들의 광장에 당당하고 위협적으로 등장했다. 반면 구나는 가볍고 변형에 취약한 특성 때문에 조각의 재료로 잘 쓰지 않는 투명 FRP를 사용하며, 좀 더 사적인 크기로 관객 앞에 놓인다.
〈화이트 본〉의 71cm의 높이는 구조물만큼 크지 않고, 오브제만큼 작지 않은 애매한 크기(로버트 모리스가 말한 신체와 반응하는 조각의 그러한 크기)를 지닌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구나의 조각이 앞서 언급한 미니멀리즘 조각가들의 ‘심봉을 제거하고자 하는 흐름’과는 정반대의 방향을 향한다는 것이다. 그의 조각은 심봉을 제거해 뼈로부터 살점, 피부로 이어지는 조각과 인간 신체의 유비 관계를 벗어나고자 한 90년대 현대 조각의 흐름과는 차이가 있다.
오히려 이는 뼈를 통해 ‘신체의 비어 있음’을 제시한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의 한 장르인 바니타스(Vanitas)의 형식을 떠올리게 한다. 바니타스는 관객에게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유한함, 물질이나 세속적 즐거움의 무가치함을 상기시키는 상징적인 오브제를 포함하는 정물화의 한 장르로, 이것의 이름은 ‘헛되고 헛되다, 설교자는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Vanity of vanities, saith the Preacher, vanity of vanities, all is vanity)’라는 구약 성경의 전도서의 경구에서 유래했다. 바니타스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사물인 해골, 시들고 있는 과일이나 꽃, 하루살이, 거품 등은 구나 작가의 조각과 회화에서 특정한 어법으로 다시 나타난다. 머리카락, 굴, 죽은 식물, 알약과 마른 씨앗들. 작가는 현대의 일상적 사물에서 바니타스적 요소를 새롭게 끄집어낸다.
〈화이트 본〉은 인간 형상을 벗어나고자 한 미니멀리즘의 방향성과는 다르게, 인간 신체의 스러짐과 죽음을 드리우는 사물을 보여 준다. 이는 모든 살점이 사그라들고 남은 특정한 뼈의 형상이다. 우리는 작가가 제시한 이러한 뼈 앞에서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사그라들기 전 채워져 있던 어떤 살과 몸을? 아니면, 과거의 바니타스가 그러햇듯 모든 생이 헛되다는 깨달음을?, 죽고 사그라드는 약하고 비효율적인 것을 관객의 눈앞에 세우고자 하는 작고 기울어진 욕망과 용기를?
4. 「류머티스학의 현상학: 장애, 메를로 퐁티, 최대한의 움켜쥠의 오류」, 게일 셀리먼(Gayle Salamon), 2012, 번역: 전혜은
1)
구나 작가의 어디 하나 고른 면이 없는 투명한 뼈 작업은, 나에게 정상이 아닌, 휘어지고 염증이 있는 뼈를 생각하게 했다. 아픈 사람, 퀴어, 장애가 있는 사람의 행위성에 관한 관심을 가진 전혜은 연구자가 번역한 해당 논문은 아픈 뼈를 고민하던 중 만나게 된 글이다. 이 글은 메리 펠스티너(Mary Felstiner)의 회고록 『엉망진창: 관절염에 대한 공적이고 사적인 이야기』(2007)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의사에게 어디가 아픈지 보여주기 위해, 염증이 생긴 어깨를 아픈 손가락으로 누르는 이야기. 아픈 곳을 설명하기 위해 만지는 행위가 그 행위를 하는 손가락에 고통을 유발하는 이 복합적인 상태를 도무지 말로 설명할 길이 없다는 고백.
마찬가지로 나는, 구나 작가의 아픈 몸을 내 아픈 손가락으로 누른다. 그의 조각에서 드러나는 염증이 난 부분을 가리키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이는 하나의 글쓰기 시점으로는 설명할 길이 없다. 그래서 글의 마지막을 인용으로 마무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픈 손가락으로 다른 아픈 손가락을 누르기. 글과 글 사이, 관절과 관절 사이에 어떤 의미의 쓰라림, 균열 같은 것이 생겨나길 바라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2)
메리 펠스티너(Mary Felstiner)는 회고록 『엉망진창: 관절염에 대한 공적이고 사적인 이야기』에서 자신의 아침 일과를 서술한다. 매일 그녀는 체계적이고 신중하게 몸을 차례차례 움직여보면서 하루를 연다. 그녀의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나는 관절들을 분류해 놓는 일부터 시작한다. 계단에선 발목을 확인해 보고, 부엌 조리대 앞에선 손가락을 풀면서, 오렌지 껍질을 벗기거나 병을 열 수 있길 바라며 애쓰다가 포기한다.
오늘은 너무 뻣뻣하다”(Felstiner 2007) 펠스티너는 류머티즘성 관절염이 몸에 미친 영향, 특히 손아귀 힘이 나날이 약해져서 움켜쥠을 상실하는 절망스러운 결과를 서술하고 있다… 그것은 일종의 박탈로 특징 지어지는 체현이다. 아프거나 허약하지 않은 사람들이 누리거나 그저 당연시하는 자기수용성이라는 특권의 상실, 무심코 반사적으로 기획이나 세계 속으로 진출하는 능력의 상실로 특징지어지는 체현인 것이다. … 그녀의 몸은 세계와의 관계가 가능성보다는 한계로 특징지어지는 듯한 몸이다.[1]
류머티스 내과 대기실에서 나는 지갑을 뒤져 종이를 찾는다, 식료품 영수증을 뽑아내서, 너무도 사적인 내용을 갈겨쓴다. 전에는 이런 건 생각지도 못했다. 이것은 헌납이고, 송시다.
내 곁에 머물러 주세요
팔꿈치여
겁내지 말아요
내 몸에서,
내 아기를 위해
이 길을 왔어요,
뇌물 없이는
지속되기 힘들
축복.
팔꿈치여
견뎌줘요. (Felstiner 2007, 10)[2]
역사를 통한 치유는 실험을 요청한다. 그건 관절이 뼈와 뼈를 연결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내 과거로부터 내가 골라낸 조각들을 하나로 묶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역사]는 치유할 수 있다. 역사는 당신이 사는 삶을 더 넓은 시간대에 놓음으로써 치유할 수 있다. 역사는 당신이 혼자도 아니고 당신 잘못도 아니라는 걸 입증할 수 있다. 역사는 당신의 상태의 호를 구부릴 수 있다, 언젠가 당신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몸은 똑같아도 일어난 곳은 새로운 어딘가가 될 때까지(Felstiner 2007, 202) …
“몸은 똑같아도 일어난 곳은 새로운 어딘가”…이러한 성취가 구부러진 호를 통해 이뤄진다는 점이 시사하는 바는, 최대한 움켜쥠이라는 곧고 확실한 확신 말고도 살만한 가능성으로 가는 다른 길이, 세계와 결속되는 다른 방식들이 있다는 것이다. 살 만한 가능성으로 가는 그러한 다른 길, 구부러진 길들은 다른 이들과 교감과 위로를 나눌 가능성을 제공한다.[3]
[1] 여/성이론 통권 제49호, 135-138쪽, 게일 셀리먼(Gayle Salamon) 「류머티스학의 현상학: 장애, 메를로 퐁티, 최대한의 움켜쥠의 오류」, 2012, 번역: 전혜은
[2] 같은 책, 151-152쪽
[3] 같은 책, 15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