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니다킴, 〈디코딩 되는 랜드스케이프〉, 2021, 2개의 데이터스케이프, 비디오, 사운드, 소책자, 4개의 내비게이터, 설치, 혼합매체, 가변크기 © 후니다킴

그건 한동안 내 신체에 이식된 보철 중에서도 가장 무거웠고, 압도적으로 컸으며, 한눈에 어떤 물체라고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장치였다. 윗면이 돔 형태로 이루어진 원기둥 형상의 내부엔 스피커들과 디스플레이, 노트북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어림잡아 전체 높이는 2m, 지름은 1m쯤 되는 듯했고, 이식 후 몸에 느껴지는 저항감을 생각했을 때 무게 또한 30kg쯤은 훌쩍 넘을 듯했다.

그걸 이식하기 위해 거쳐야만 했던 준비 절차도 단순하지 않았다. 이 장치를 내 몸에 이식하기 위해서는 걸음 속도와 키를 내비게이터에게 알리고, 이후 몇몇 안전수칙을 파악해야 했다. 준비 절차는 비단 몸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앎의 문제에도 적극 개입했다.

내비게이터는 이식 대기자들에게 『관점의 매뉴얼』이라 명명된 작은 책자를 건넨다. 거기엔 스스로의 인식을 의심하게 만드는 짧은 경구 같은 물음들이 가득했다. 그 책을 충분히 읽은 뒤에야 이식 대기자들은 마침내 후니다 킴의 〈디코딩 되는 랜드스케이프〉에 정착된 ‘데이터스케이프’를 몸에 이식할 수 있었다. 주어진 시간은 15분 남짓이었다.


감각의 보철

15분간 이식자들은 인간의 눈과 귀로 세계를 읽어내지 않는다. 불투명한 막으로 덮인 시야, 귀 높이를 빙 둘러싼 여덟 대의 스피커는 인간 신체에 내장된 감각기관이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세계를 인지하지 않도록 신체와 세계 사이를 슬쩍 가로막는다. 데이터스케이프를 이식하고 미술관 내부를 천천히 돌아다니는 동안, 인간의 눈과 귀를 대신해 공간에 대한 시청각적 정보를 입수하는 것은 데이터스케이프의 머리 꼭대기에 놓인 라이다 센서다.

자율주행차 분야에서 널리 사용되는 라이다 센서는 360도로 빠르게 회전하며 공간에서 얻을 수 있는 수많은 정량적 정보(벽, 기울기, 움직이는 물체의 위치)를 읽어낸다. 그리고 데이터스케이프는 라이다가 입수한 공간 데이터를 인간 신체로 감지할 수 있도록 가시·가청 영역으로 옮긴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주의할 만한 대상은 없는지 등, 조감 시야를 보여주는 데이터스케이프 내부의 디스플레이와 8채널 스피커는 나를 둘러싼 공간의 정보를 실시간으로 전달한다.

이식자들은 디스플레이를 통해 내 등 뒤에서 무엇이 얼마나 빠르게 다가오는지를 선명히 본다. 동시에 내게 다가오려 했다가 사라지는 대상을 소리로 듣는다. 디스플레이 속 푸른 덩어리가 나와 가까워질수록 사인파 소리는 더욱 선명해지고, 벽에 가까워질수록 화이트노이즈 소리는 짙어진다. 그 사이에서 마치 라디오 주파수를 끊임없이 맞추는 것처럼 제각각의 기원을 가진 구체음들이 불쑥 나타난다. 서로 다른 밀도와 무게를 지닌 이 소리들은 제 나름의 공간감을 형성한다.

영역으로서 존재하는 화이트 노이즈와 움직이는 오브제처럼 존재하는 사인파 소리, 그리고 언제고 다른 세계로 연결되기라도 할 것처럼, 찰나에 잠시 틈입했다가 사라지는 구체음들. 조금은 붕 뜬 기분으로 미술관을 걸으며 낯선 소리들에 둘러싸였다 풀려나기를 반복하고, 나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움직이는 세계를 관찰한다.

그러자 ‘당연히 이럴 것이다’라고 막연히 믿어왔던 공간과 움직임, 소리의 관계는 다르게 구성된다. 몸은 어딘가 덜컹거리고, 움직임은 수월하지 않으며, 외부에 대한 반응도 마치 버퍼링이 걸린 것처럼 조금 느려진다. 내 신체로 감각했던 세계와 데이터스케이프로 읽어내는 세계는 결코 같지 않다.

장치를 이식한 뒤 바라보는 세계는 끊임없이 움직이며 소리내기를 멈추지 않는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 탓에 평형감각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조율된다. 그저 눈 자체의 해상력을 보완하기 위해 착용하는 안경이 아니라 ‘다른 해상력’을 생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안경을 착용한 것처럼, 신체는 경미한 멀미를 겪는다. 오영진의 표현처럼 “육체와 기계 사이의 불화”가 생겨난다.

신체는 이 낯선 기계가 선사하는 감각에 잠시 저항하지만, 곧 둘 사이에서 나름의 접점을 찾기 위한 적응 방법을 모색한다. 몸의 리듬과 데이터스케이프의 움직임이 서서히 동기화되고, 데이터스케이프의 방식으로 나를 둘러싼 세계를 보고 듣는 일은 시간이 지날수록 수월해진다.

하지만 그 인지·감각체계가 몸에 이식될 무렵, 의심의 방향은 다른 쪽으로 이동한다. 어쩌면 울렁거리는 것이 내 신체가 아니라 세계였다면. 본래부터 어지럽고 움직이며 소리내기를 멈추지 않았던 세계를 이제야 인지한 것뿐이라면. 그 세계를 내 눈과 귀로 읽어낼 수 없었던 것뿐이었다면. 우리가 익숙하게 감각하고 인식해 왔던 그 세계는 정말로 믿음직한 것인가?


인식의 렌즈

〈디코딩 되는 랜드스케이프〉 속 공간은 라이다 센서를 거쳐 디지털적으로 디코딩되고, 그 정보들은 다시 인간이 감각할 수 있는 형태로 바뀐다. 디지털을 거쳐 세계를 읽어내는 일은 일견 낯설어 보일 수 있으나 실제로는 우리의 삶 속에서 늘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인간 삶을 둘러싼 정보들은 수많은 센서를 통해 입수되며, 우리가 세계를 인지하는 경험 안에는 온갖 종류의 디지털 디바이스가 침투해 있다.

그 센서와 디바이스들은 각자의 감각체계와 논리로 세계를 읽어내고, 우리는 이들에 깊게 의존한다. 때로 우리는 그들의 구조를 인지하지 못하거나, 그들의 존재를 알아차리지도 못한다. 하지만 이 작업은 그 디지털적 존재들을 우리의 감각 표면으로 끌어내 그들이 읽어낸 풍경을 경험해 볼 것을 제안한다.

그런 의미에서 〈디코딩 되는 랜드스케이프〉는 일견 시각적으로 내 눈앞에 펼쳐진 풍경과 소리풍경을 디지털로 전환하는 것처럼 보인다. 작은 단행본 크기의 디스플레이 속에 가득 들어찬 공간의 이미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재구성되어 쉼 없이 전자음을 울려대는 소리 풍경. 데이터스케이프는 분명 내 눈앞에 실재하던 세계를 디지털로 읽어내 재구성한다. 그러나 이 작업의 목적이 있다면, 그건 다른 방식으로 풍경을 보여주거나 재구성하는 것만이 아니다.

여기서 ‘-스케이프’는 감상의 목적지라기보단 작업의 핵심부로 다가가기 위한 통로에 가깝다. 풍경은 나 자신을 잊은 채 관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각자가 관찰한 세계를 담아내는 반사체, 혹은 거울처럼 존재한다. 데이터스케이프는 나를 둘러싼 공간의 크기와 실시간으로 내 주변을 맴도는 대상 사이의 거리를 읽는다. 비어있을 수도, 가득 채워질 수도 있는 그 공간을 오래 떠돌수록 더 선명히 감각되는 것은 나와 대상 사이의 거리, 그리고 그 공간에 개입해 적극적으로 세계를 인지하는 ‘나’라는 주체다.

이 작업이 마침내 지목하는 어떤 한 지점이 있다면, 그건 지금의 세계를 바라보는 인간의 인지와 감각이다.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 후니다 킴은 공간을 디코딩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이식자들이 신체 감각을 스스로 디코딩해볼 수 있도록 크고 작은 트리거들을 만든다. 데이터스케이프를 이식하는 것은 지금 우리 삶을 둘러싼 디지털에 대한 인식과 감각을 보충하기 위함만이 아니다.

이는 이를테면 안경이 이미 씌워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전혀 다른 종류의 안경을 하나 더 써보는 것처럼, 우리의 인지·감각 조건을 되돌아보게 하려는 목적으로 다른 감각을 신체에 중첩해보는 일이기도 하다.

15분간 신체적, 인지적 이물감을 느낀 이후, 몸에 남는 잔상은 외부 장치가 제거됨으로써 느껴지는 작은 해방감만이 아니다. 사람에 따라 감도는 다르겠지만, 이식자들의 신체와 정신엔 이물질이 차지했던 빈자리가 고스란히 남는다. 내 눈을 다시 사용하게 됐지만 360도로 바라보던 시야가 200도로 좁아졌다는 사실, 내 귀를 다시 사용하게 됐지만 내게 다가오거나 멀어지는 것들이 조용해졌다는 사실에 대한 생경한 인식이 형성된다. 〈디코딩 되는 랜드스케이프〉가 계획한 다음 경험은 바로 장치가 몸에서 빠져나갔을 때 비로소 인지하게 되는 낯선 감각과 그에 대한 물음이다.

예컨대, 내가 본다고 믿었던 것들은 무엇인가? 내가 보고 듣는 세계는 어떤 식으로 구성된 것인가? 내 눈과 귀는 어떤 종류의 센서인가? 내게 이식되어 있는 외부의 센서들은 무엇이고, 나는 이들을 어떻게 활용해 왔는가? 나의 인지 자체를 의심케 하는 이 물음들은 데이터스케이프를 이식하기 전 읽었어야만 했던 『관점의 매뉴얼』에도 흩뿌려져 있었으며, 경험을 마친 뒤 이식자들의 손에 쥐어지는 작은 이야기책 『바라보고 읽어내는 장치』에도 숨어 있던 질문들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의문이 후니다 킴의 〈디코딩 되는 랜드스케이프〉라는 총체적인 경험이 지향하는 목적지다. 이 작업은 공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것에 접근하며, 인간 신체로 쉽게 감각할 수 없는 것을 제안한다는 점에서 필연적으로 또 다른 감각하는 기계를 필요로 하며, 우리의 세계에 늘 존재했지만 쉽게 감각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찾기 위해 하나의 렌즈를 끼워보는 경험을 제공한다.

이것은 확정적인 단언으로 결론지어질 수 없고, 언제나 대명사가 가득한 거대한 물음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결국 나를 둘러싼 세계와 나의 신체, 인식과 감각에 대한 자기 의심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간 작곡

〈디코딩 되는 랜드스케이프〉에서 이식자들은 자신이 인식하는 시공간을 구성하는 주체가 된다. 이는 작가가 말하는 ‘공간 작곡’이라는 개념과도 연결된다. 후니다 킴은 스스로를 ‘공간을 작곡하고 공기를 소조하는’ 작가라 표현하는데, 〈디코딩 되는 랜드스케이프〉는 이런 그의 관점을 작업 안에 그대로 옮겨놓은 것으로도 읽힌다.

공간 작곡이라는 행위가 공간을 어떻게 구성하고 거기서 어떤 소리가 나게 할지 결정하는 일이고, 이제까지 후니다 킴이 전작들에서 작곡된 공간들을 형성해 왔다면, 이번 작업에서는 사람들이 스스로 공간 작곡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제공한다.

이식자들은 화이트 노이즈를 듣기 위해 벽으로 다가가고, 소리의 궤적을 추적하기 위해 한 자리에 가만히 서서 대상의 변화를 감지하거나 뒤쫓고, 때로는 틈입하는 구체음을 기다린다. 공간 안에서의 움직임은 소리로 귀결된다. 데이터스케이프는 그 공간 작곡이라는 행위를 타인이 경험할 수 있는 형태로 물화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작곡된 소리는 나타나는 동시에 사라지고, 기록되지 않으며, 모두의 움직임이 다른 만큼 복제와 재현이 불가능하다. 이것은 현재에 의존한다. 이 작업은 내가 인지한 실재를 바라보고 의심하게 만드는 만큼, 필연적으로 내 눈앞에 놓여있고 내 몸으로 겪고 있는 지금이라는 시간에 단단히 뿌리내린다. 시간 위에서 운동하는 것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세계는 늘 운동하고, 그 세계를 구성하는 나 또한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은 채 현재를 갱신한다. 소리는 그것을 증거하고, 움직이는 것은 늘 소리낸다는 사실이 덩달아 떠오른다.

이러한 지점에서 이 작업이 겨냥하고 있는 시공간이 어디인지도 더욱 분명해진다. 〈디코딩 되는 랜드스케이프〉는 다분히 현재에 발생 가능한 인지와 감각을 탐구하고, 과거의 기록도 아닌, 미래의 예견도 아닌 지금의 경험에 초점을 선명히 맞춘다. 이것은 없는 것을 생성하고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식자들이 직면한 현재 속에 잠재된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읽어내기 위한 프로세스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이 ‘무언가에 대한 은유가 아니라 그저 실재하는 세계, 있는 대상을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말하곤 한다. 이는 이 작업의 출발점과 종착점에 놓여 있는 단단한 목표이기도 하다.


트리거

후니다 킴의 작업은 이식자들에게 즉각적으로 경험되지만, 그 작업의 지향점을 한 눈에 짚어내기란 결코 쉽지 않다. 센서, 디지털, 사운드스케이프, 랜드스케이프, 환경 인지 장치인 데이터스케이프, 신체 등 수많은 매체와 개념이 작업 내부에 거미줄처럼 한데 엮여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식 안내서와 『관점의 매뉴얼』, 육중한 크기를 자랑하는 데이터스케이프 두 대, 내비게이터의 말, 15분간의 경험, 그리고 사후에 경험을 복기하며 함께 읽을 수 있는 이야기책 『바라보고 읽어내는 장치』까지. 이 작업을 구성하는 개념과 요소들은 한 손으로 다 꼽을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이 작업은 그 복잡한 연결망만큼 제각각의 진입로를 만들어 낸다. 누군가는 언어화된 질문을 통해, 누군가는 어색해진 몸짓을 통해, 누군가는 자신의 일상을 뒤덮고 있는 디지털 디바이스와 데이터스케이프가 어쩌면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의심을 통해, 누군가는 들려오는 소리의 궤적을 뒤쫓는 경험을 통해 이 작업이 던지는 질문을 만난다.

이 총체적인 작업 안에서 자신에게 작동할 수 있는 작은 연결고리를 단 하나라도 찾아낼 수 있다면, 그 고리는 이 작업 내부의 연결망으로 하나둘씩 뻗어나가며 다른 질문들을 점차 활성화할 것이다.

〈디코딩 되는 랜드스케이프〉는 관망해야 하는 작품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신체와 인지에 기입되는 경험으로서 작동한다. 그리고 그 이후, 실재를 바라보는 감각에도 영향을 미치기를 기대한다. 작업 곳곳에 놓인 트리거가 언제 어떻게 발현될지는 알 수 없다. 이 장치를 이식한 15분간의 경험이 별다른 감흥 없는 신기한 체험으로만 남아있을 수도 있고, 크게 고민할 필요 없는 낯선 일로 치부될 수도 있다. 기억에서 빠르게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의 경험이 아주 작은 방아쇠가 되어 언젠가 멈칫하는 순간을 만들어 낸다면,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미묘한 기시감을 느끼며 이 경험을 복기하는 때가 온다면, 〈디코딩 되는 랜드스케이프〉에서 심어둔 어떤 인식은 그제야 작동되기 시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방아쇠가 당겨진 이후, 나와 세계에 대한 인식과 감각은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