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수, 〈당신의 눈앞에〉, 2019, 360도 VR 컴퓨터 생성 영상, 2분 30초 © 이병수

가상 공간으로의 전회: 절대 침몰하지 않는 난파선처럼

가상현실이 현실 같은 가상으로 바뀌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우리는 몸소 체험하고 있다. 사이버 공간에서 장소에 기반한 사회적 세계의 재매개화(Remediation)를 추구하면서도 반대로 매체 안에서 혹은 매체를 이용한 행위자들의 재공간화(Respatialization)를 경험하고 있기도 하다.

이병수의 이번 전시 《이음새없는세계》는 작가의 매체에 대한 탐구와 비판적 문제의식을 예술적 실천을 통해 질문한다. “너무 매끄러운 이음새의 세계”라서 어떤 봉합의 흔적을 찾을 수 없이 잘 직조된 VR환경에서 우리는 어떤 인식적 세계를 경험하고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세계가 우리에게 진실로써 표상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에 대해 반성적 태도를 요청한다.

이병수는 현실에서 확신하는 모든 것들을 경계하고, 그 이면의 불확실한 영역을 가시화시키기 위한 다양한 예술적 시도를 이어왔다. 전작 〈잇따라서 One After Another〉(2018)와 〈우리 세계를 위한 송시 Ode to Our Communities〉(2018)에서 작가는 진지한 매체적 실험과 연구를 통해 반성적 질문을 던지기를 멈추지 않는다.

특히 〈잇따라서〉에서는 지도를 이용한 새로운 공간 전유 방식인 백두산의 구글 어스 이미지를 와이어프레임으로 모델링한 구조 위에 위성이 미리 찍어둔 천지의 모습을 시간을 달리하여 캡처하고, 여기에 바람과 구름 등의 요소를 추가하여 원본과 그래픽 영상을 병치하여 ‘사변적인 지도 제작’으로부터 공간을 새롭게 사고하는 방식으로 등장시킨다.

일종의 공간적 전회(Spatial turn)를 시도하는데 먼저, ‘초월적 장소’의 모색으로의 전향이고 둘째로 ‘측량적 너머에 존재하는 공간’ 모색으로부터의 실험이며, 마지막으로 ‘공간이 어떤식으로든 시간과 분리되어 있다는 사고’로부터의 증언적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장소성’을 기반한 매체적 실험은 공간적 전회가 지시 대상이 있는 세계의 견고한 물질성을 강조하면서도 반대로 의문시하며 전복하는 방식으로 드러낸다.

지도로 그려져 있지만 ‘그리지 않은 공간’으로의 전향을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결국 사회적 실천 공간과 영토적 질서 공간의 이원 대립을 매체를 통해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가상적 세계를 어떻게 인식해야 할까에 대한 연구를 지속한다.

전시에서 작가가 매체를 대하는 태도는 기술적 방법론의 진화된 실험이 아니라, 오히려 매체의 주체가 되어야하는 우리에게 단지 소비자나 노예로 전락되는 것에 대한 경고이자 반성적 질문으로 시작한다. 먼저 〈당신의 눈앞에 Before Your Very Eyes〉(2019)에서 이병수는 매체의 자기반성적 실험으로의 진화한 형태이자 시도를 가상현실(V.R, virtual reality)에서 찾고 있다.

이 작품은 3차원 컴퓨터 그래픽의 x, y 좌표를 연상시키는 발광테이프가 설치되어 있는 그리드 공간 속에 전망대 형태의 구조물에 올라 망원경을 바라보듯이 감상하는 설치작품이다. 관객은 전망대에 올라가 오큘러스 리프트(Oculus Rift)를 착용하고, 제시된 VR환경으로 접속된다. 가파르고 좁은 전망대 구조물에서 관객의 신체는 그리 자유롭지 않다. 그저 360도 시점의 움직임 정도만이 가능할 뿐이다.

인식적 환경에서의 ‘접속된 공간’은 기술의 유토피아적 전망으로의 초월적 장소를 모색하면서 ‘몰입’의 세계로 안내한다. 거기에는 ‘시간과 분리된’ 가상적 풍경이 존재하며 바다의 한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한다. 결국 미디어로 매개된 객체이자 주체로서의 우리는 ‘탈육화’된 채 존재할 수 있다. 이 탈육화된 주체는 ‘지금’과 ‘여기’라는 현존재적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는다. 시간적 공간적 현존은 중요하지 않다. 바닷물은 점점 차오르고, 아직은 특정할 수 없는 어떠한 기물이 점점 다가온다.

서서히 다가오는 기물은 어떤 인물의 두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물은 더 차오르다가 우리의 키를 훌쩍 넘기고,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되는 찰나에 우리는 불안과 공포의 감정을 체현할 수 있다. 인간과 관계있는 기본적 영토 중에서 하늘을 정복하기 전까지는 바다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안전하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나 심연의 공포는 잠깐일 뿐, 이내 우리는 안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실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이것은 실체가 없는 가상의 환경이고 우리는 ‘현존’ 대신 ‘원격현존’의 주체로서 몸 없이 정신과 감각만으로 존재할 수 있는 세계에 놓이는 것이다. 바다에서 익사할 위험 따위는 애초에 없다. 가상현실이 시공간의 한계를 벗어난 세계일 뿐, 분명한 것은 지금 이곳의 현실은 아니라는 점이다. 가라앉는 심연에서 우리가 숨을 쉴 수 있다고 현실이 아니었지 하고 안도하는 사이, 〈당신의 눈앞에〉는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에 존재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 앞에 서게 된다.

이 작품에서 작가의 작은 유머적 실천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둥둥 떠다니는 ‘플라톤의 두상’이 다. ‘아하’하고 그 상징적 의미를 눈치채는 순간, 작가가 얼마나 진지하게 매체적 반성을 관철하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다. 플라톤은 그 유명한 ‘동굴의 비유’에서 동굴 벽에 투사된 그림자들은 형상화된 이미지들의 움직이는 행렬에 의해 투영된다고 하였다. 그것은 우리가 가 본 장소, 마주친 얼굴, 풍경이나 신체, 대지, 반복되는 제스처나 운동 이미지로서 각인된다.

이미지의 가상성을 전제한 것이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원본(original)과 이미지, 또는 원형(model)과 그것에 대한 복사물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철학이 이후 자신의 영역의 토대를 세우는 플라톤주의의 본질적 특징으로 인식했다. 이 유명한 이야기는 플라톤의 『국가론』에서 소개하고 있는데, 동굴에 사는 사람들은 어린 시절부터 묶여있어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그림자만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들에게는 벽에 비쳐 보이는 모든 것들은 실재하는 것처럼 움직이나 만들어진 가짜이다.

현재에 동굴 벽을 비유하자면 영화 스크린이나 컴퓨터 모니터, 더 나아가서는 VR 환경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진짜’처럼 보이는 그 ‘가짜’들은 실제를 위장한 ‘가상적 이미지’로서 기술로 매개되어 우리에게 표상하며 인식된다. 그래서 가상적 이미지들은 물질성으로부터 해방되고, 스스로 자기생성적 존재로 전환된다. 그러나 철학적으로 따지자면, 가상적 세계는 인식론적으론 거짓이고, 존재론적으로는 열등한 세계이다.

자, ‘절대로 침몰하지 않는 난파선’처럼 우리는 물리적 현실과 독립된 또 하나의 현실로 존재하는 인식적 세계로 초대된다.


결핍되고 구속된 공간: 자기 제한적 체현(Self-limiting embodiment)

플라톤의 철학은 일반적으로 기술을 임시적이며 감각적이며 우발적으로 발생하는 ‘거짓 지식’으로 이해한다. 기술에 대한 서구 철학의 오랜 관습적 전제이기도 하지만 기술의 양가적 측면을 떠올리게 만드는 대목이다. 기술은 우리 삶의 다양한 요소들을 바꾸어 놓는다. 기술로 매개되는 현실의 모습, 현실을 구성하는 시-공간적 요소를 변화시키고 있다.

일례로 인스타그램의 풍경 속에서 살고, 유튜브는 일상이 된 현실에서 우리는 언제나 미디어를 통해 매개된 삶을 산다. 우리의 감각적 경험의 많은 부분이 미디어 기술이나 대중문화가 이미 구성해놓은 형식에 맞추어지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무엇이 선이고 후인지 판단하기 힘들다. 종국엔 미디어가 우리를 제한하고 잠식하는 사이, 그 주체성을 잃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가상현실이 기술 이미지의 가장 극적인 결과물이라면, 가상현실의 실재성은 예술의 가상성과 맞물린다. 가상현실은 고도의 해상도를 자랑하는 연속되는 3차원의 그래픽이다. 현실을 시뮬레이션한 가상현실은 사용자에게 지각되면서, 또 다른 실제로 변한다. 우리는 이제 언제 어디서나 사이버스페이스로 항해를 떠난다. VR은 관람자로 하여금 가상의 현실 공간 내에 위치하게 해 직접 세계를 보는 주체로 만든다.

관람자가 앞으로 나아가고 고개를 돌리면서 만들어 내는 장면들은 바로 관람자 자신이 보고 체험하는 세계가 된다. 어디로 가서 무엇을 볼지, 어떤 방향에서 얼마나 가까이 얼마나 오랫동안 볼지를 결정하는 사람은 VR 기기를 착용하고 지각하고 있는 관람자 자신이다. 그런 면에서 VR은 관람자의 참여를 반드시 필요로 하고 상호작용이 요구되는 매체다. 이런 인터렉션이 우리를 인식의 지평안에서 자유롭게 할까? 작가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오히려 인식의 확장적 측면을 기술 매체가 제한하고 통제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특히 〈이중 구속 Double Bind〉(2019)은 기술 장치적 경험이 ‘우리의 신체를 어떻게 구속하고 제한하는지에 대한 실험’이다. 서로 마주 보고 연결된 VR기기는 한쪽의 움직임에 의해 다른 쪽도 영향을 받게 되면서 두 관람객의 충돌을 의도한다. 사용자의 몰입을 위해 신체적 자율성을 반영하는 기계적 특성(HMD의 복잡성을 매우 간편히 해결하고 있는 현재의 오큘러스 리프트의 핸디함)은 역설적으로 서로의 움직임을 통해 통제하고 제한하는, 고정된 설치를 통해서 작동된다. 또한 자율적인 시선 처리에서도 제한을 두는데, 환경 자체를 무대처럼 블랙아웃시키고, 이윽코 스포트라이트가 지시하는 곳으로 시선을 처리하게끔 유도한다.

인터렉터가 움직이고 느끼고 생각하는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결국 우리의 신체란 ‘주체’와 ‘객체’의 이중적 관계를 설정하고 무언가를 하는 행위에 천착하는 한계에 대해 지적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신체는 ‘매체에 의해 구속적으로 수행되는(per-formed)’ 것임을 폭로한다. 기술과 인간의 이 같은 유기적인 관계를 빌렘 플루서식으로 ‘장치-작동자 복합체’로 정의할 수 있다.

이 때 장치는 인간의 신체기관과 사고과정을 시뮬레이션하고 동시에 그 사고를 다시 기계화하는 블랙박스로서, 이 과정에서 장치와 작동자는 피드백적으로 융합된다. 다시말하면 ‘간주관적(Intersubjective) 입장’으로 인간은 결국 기술 미디어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객체라는 것의 증거가 된다. 따라서 가상현실의 콘텐츠도 사용자를 환상의 세계로 도피시키는 대신에 낯선 현실을 담음으로써, 결국 사용자가 현실을 다르게 보도록 한다.

이런 장치는 빈틈없는 시뮬레이션 작업을 통해 환상을 더욱 완벽한 가상현실 환경으로 만들기보다 매체적 ‘거리두기’ 방법으로 혼합현실(Mixed Reality)적 체현의 감각을 부활시키면서 작동시킨다. 이러한 방식은 지속적인 기술 진화에 따른 유토피아적 전망이 아니라 기술 매체의 작동자인 인간이 결국 매체에 의해 조정되는 객체임을 폭로하면서도 주체성의 회복을 위한 작가의 실험이자 태도이다.


모든 것은 사라지고 사유만이 남는다

《이음새없는세계》의 주요 작품에서 관객은 VR 체험을 하지만 그곳에 인간의 실체는 없다. 텅 빈 공간과 사물과 인공적 풍경만이 있을 뿐이다. 가상의 세계에는 탈육화된 우리의 지각만이 있을 뿐 인간의 실체적 증거를 찾을 수 없다. 장치에 의한 일시적(temporary)이며 환승적인(transit) 공간이라는 반증만 있을 뿐이다. 〈이중 구속〉에서 추락한 대한항공기, 어지렵혀져 있는 컨테이너, 버려진 냉장고와 가구들, 각종 폐기물로 제시되는 이미지 환경을 통해서 우리는 공간이 내포하는 사건 혹은 사고를 유추하고 해석할 수 있다.

인간이 없는 매체적 공간은 텅 비어있어서 우울하다. 〈우울한 렌더링 Gloomy Rendering〉(2019)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울한 렌더링〉에서 초월적인 시선으로 관망하는 메트릭스의 세계는, 지시대상의 상실을 바라보던 보드리야식의 우울한 만족보다 ‘실재’에 대한 반작용적인 노스텔지어처럼 진짜 자연과 몸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일지도 모르겠다. 이병수는 〈이중 구속〉에서 실제처럼 보이는 사물들의 이미지를 떠돌아다니는 3D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와서 환경을 만들었다.

구축된 환경으로서의 가상현실은 진짜 현실은 아니지만 진짜 같은 현실을 제시한다. 작품에서 제시된 모든 가상은 이제 현실과의 교환적-대체적 가치가 아닌, 상호 의존적인 관계이자 기대어있는 현실이다. 그래서 멀리 있는 그리고 시간의 경과를 거슬러 현존할 수 있다는 시-공간적 속성을 기반으로 ‘지금’, ‘여기’로 대변되는 실체적 공간과 구별되지만, 때로는 다른 맥락에서 읽혀지게 만든다. 그것은 시-공간 개념을 재편하여 현실의 기억이나 사건으로 소환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우울한 렌더링〉과 〈당신의 눈앞에서〉가 사회적 트라우마인 ‘세월호 사고’라던가 ‘항공기 추락 사고’ 같은 현실에서 기인한 지시대상적 근거들을 상기시키는 효과를 가져오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상보적 관계에서 진짜 같은 가짜인 하이퍼 리얼에 갇혀 있는 우리는 가상과 실제 그 사이에서 표류하고 있다.

전시 공간의 1층 윈도우에서 볼 수 있는 3채널 3D 컴퓨터그래픽스 영상작품인 〈Screen Cave〉(2018)는 물리적인 스크린의 경계에 갇혀 방황하는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되어 전지적 시점으로 인간을 관찰하는 3대의 육면체 브라운관 TV에서 플레이된다. RGB로 대변되는 세 개의 공간에서 무한히 맴돌고 있는 벌거벗은 인간의 움직임은 가상의 디지털 세계 속에 속박당한 현대인의 나약한 모습을 은유한다. 미디어에 갇혀버린 우리를 유비하는 인간 이미지는 원초적이다.

마치 인격이 없는 동물 같은 존재로서 말이다. 날것의 본체로서 과거로 회귀한 인간, 어쩌면 가상 현실이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어리석은 슬로건이 아닐까. 사회적 제도가 인간, 자연적 인격 그리고 사회나 국가로 인도하는 것과 같이 점점 하이퍼 리얼의 세계인 가상적 사회는 거대한 네트 서버와 프로그램 구조로서 인간이 더 이상 유일한 문화적 존재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전시장 가득히 실체 없이 기인하는 이 우울감의 원천은 이것이 아니었을까. 기술에 의해서 사물화되어버리는 비인격적인 무언가로의 회귀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 말이다.

전시 《이음새없는세계》가 제시하는 세계는, 앞서 보더라도 기술적 선행 요건과 그러한 이미지와 연동되는 작가의 ‘기술적 상상력’이 간절히 요청되는 순간들과 마주한다. 그래서 예술이 이로부터 취해야 하는 성취는 보이지 않고, 숨어 있으나 분명 ‘존재하고 있는’ 그 너머의 세계를 폭로해 내는 것이리라. 결국, 그 역할은 기술 장치를 사용하는 예술가에게 주어진다.

기술 매체에 의해 생산된 우울하고 고독한 잉여물처럼, ‘비-사물’ 혹은 ‘비인격체’로서의 무엇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인공적인 환경에서 참된 가치를 고민하고 예술을 통해 구원하고자 하는, 그래서 기꺼이 고독한 창조자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 작가의 태도처럼 우리는 기술 매체의 주체이자 현명한 소비자가 되어야 한다. 기술적(혹은 장치적) 재현은 결국 예술가를 포함한 모든 창작자와 사용자들의 주체적 지각을 통해 새로운 이미지의 유형으로 작동하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해로울지 이로울지 모를 차원에 머무르면서 말이다. 그래서 세계에 대한 보편적 평등의 감각으로서의 이러한 지각의 추출은 결국 ‘모든 대상의 외피를 벗겨내는 것’이라는 벤야민의 통찰력처럼, 그 본질을 비평할 수 있는 것은 새로운 유형의 지각이 작동하는 올바른 층위 안에서 머물러야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 현실의 이미지를 본뜬 유토피아 혹은 디스토피아의 조각들은 변증법적 종합의 순간으로서 우리 앞에 있다.

그래서 장치가 소거되는 마지막에는, 모든 것은 사라지고 우리의 사유만이 남는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