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입규, 〈Social Network Service〉, 2021, 의자, 카메라, 컴퓨터, 빔프로젝터, 삼각대, 인터렉티브 실시간 비디오설치 © 장입규

디지털 기술이 보편화됐다는 전제는, 어느새 클리셰처럼 소비되고 있다. 이를테면 그것은 사용자로서의 주체가 이미지에 보다 능동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는 가설을 토대로, 우리의 ‘확장된 자율성’에 호소한다. 그러나 ‘확장된 자율성’은 사실상 개별 이미지와의 관계(성)에 종속돼 있을 뿐이다. 만약 이미지가 걷잡을 수 없이 증식하면서, 한때 우리를 주체로 규정했던 사용자라는 정체성을 압도한다면 어떨까?

실제로 웹 상에 산개해 있는 이미지의 잔해들은, 알고리즘의 역학에 의해 거의 실시간으로 상호 작용하면서, 사용자가 미처 예측할 수 없는 이미지를 재/생산한다. 이는 자연스레 (사용자 편의성이라는 기치 아래) 사용자를 소외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가 더 이상 주체의 관점에서 이미지를 개별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상황을 초래하기에 이른다.
 
그런 의미에서 ‘확장된 자율성’은 사실 알고리즘이 사용자에게 제공한 이미지와의 지엽적인 관계를 대변하는 레이아웃의 형식에 가깝다. 우리는 그러한 레이아웃 속에서 이미지를 (사용자 편의적으로) 식민화하는 과정에 몰두한 나머지, 그것을 추동하는 권력 의지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여지에 대한 논의를 유보하고 있다.

즉 우리가 사용자로서 이미지에 선행하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주관에 따라 이미지를 남용할 수 있다는 생각, 그리고 실제로 그것을 일상 차원에서 기꺼이 수행하는 일련의 과정은, 이미지와의 위계를 지속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러나 주지하듯 권력 의지는 (사용자에 선행하는) 레이아웃에 의해 규정된 허구에 불과하다. 달리 말해 사용자는 오로지 레이아웃을 통해서만 스스로를 주체로 자각할 수 있는 허구적 존재에 가깝다.
 
장입규는 얼핏 그러한 허구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cut and paste〉(2021)로 대변되는 근작들은, 작가가 자신의 일상을 배회하면서 다소 무작위하게 수집한 사물들을 이미지와 대응시킨 채, 각기 다르게 편집한 결과다. 이는 (알고리즘에 의해 호명된) 사용자의 관점을 토대로 사물들의 이해관계를 재/구성하면서, 앞서 논의한 레이아웃이 이제 현실마저 포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레이아웃이 광범위하게 확장된 상태는, 결국 우리가 여전히 주체성을 권위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는 허구를 증폭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사용자는 언제나 주체성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으며, 디지털 기술은 그러한 상태를 점차 가속화하는, 즉 우리가 스스로를 주체로 호명하기 위한 가능성의 영역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일종의 촉매로 기능한다.
 
그러나 일련의 작업들은 단순히 사물-이미지를 유희적으로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그 과정을 왜곡시키는 데 주력한다. 즉 작가가 사물을 이미지 차원에서 편집하는 행위는, 그것에 내재된 상품으로서의 사용 가치를 위반하려는 시도이며, 이로써 사물은 레이아웃 속에서 자신의 환영성을 부각시킨다. 문제는 이때의 환영성이 작가에 의해 편집된 사물들의 (사용 가치와 무관한)이해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동력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상품이라는 물신을 해체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레이아웃이 조성한 이미지의 영토를 재편하려는 권력 의지의 무용함을 폭로하기에 이른다. 즉 이미지를 답습한 사물들의 이해관계가 환영이라면, 결국 주체의 식민화 전략은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무단 점거함으로써 주체성을 확증하는 모순적인 허구에 불과한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마침내 주체성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자각하게 된다. 즉 〈cut and paste〉는 사물이 현전하는 상태와 그것을 거듭 유보시키는 이미지의 역학 사이를 가늠하게끔 유도하면서, 레이아웃에 종속된 주체의 제한적인 시야에 균열을 일으킨다. 그러한 인지적 혼란은 우리가 사용자의 권한에 자족하지 않은 채, 레이아웃의 외부에 기꺼이 편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주체를 계승하는 새로운 존재에 대한 낙관주의로 귀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레이아웃의 외부는 (주체와 무관한) 이미지의 잔해들로 과포화된 세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주지하듯 그곳은 알고리즘에 의해 계속 증식하는 이미지들이 초래한 폐허이며, 결국 개인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이미지의 총량은 인지적 혼란을 넘어서, 자아라는 합의의 형식을 와해시킨다.
 
그러한 파국은 〈Social Network Service〉(2021)에서 이미 예견돼 있었다. 해당 작업이 작가의 타임라인에서 다소 예외적인 이유는, 바로 이미지와 부합하려는 개인의 불확실한 실존을 직설적인 방식으로 가시화하기 때문이다. 공간 상에 평행하게 도열해 있는 의자들은, 그것들과 마주한 각각의 카메라를 통해 실시간으로 촬영되고 있고, 관객은 그런 식으로 연출된 장면에 얼마든지 참여할 수 있다.

문제는 관객이 임의적으로 선택한 의자에 착석하는 순간, 관객 정면의 스크린이 송출하고 있는 사분할된 의자의 이미지로 수렴된 채, 자신의 신체 일부를 노출하게 된다는 점이다. 즉 작가는 카메라로 대변되는 ‘기계의 눈’에게 감시당하기를 자처함으로써 이미지 차원에서 비/자발적으로 편집된 신체를, 지금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SNS의 맥락 속에서 제시하고 있다.
 
편집된 신체는 한때 그것이 담보하고 있던 인간의 물리적인 형태를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점차 고어gore해진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고어하지 않은데, 왜냐하면 편집의 과정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의 관객은 여전히 멀쩡하기 때문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관객이 스스로를 유사 고어물로 소비하게끔 유도하는 상황이며, 이는 ‘기계의 눈’을 향한 노출증적 감각의 선정성을 암시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감각이 사실상 폐허에 가까운 이미지의 생태계에서 부/적응하고 있는 자아에 의해 조형된 결과물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결국 편집을 명목으로 스스로를 훼손하는 장면을 관망할 뿐인 탈주체의 유령적인 상태를 지향할 수 밖에 없는가? 앞서 〈cut and paste〉가 사물-이미지를 편집하는 과정에서 드러냈던 감각의 틈새는, 우리가 그것을 포착하기 위해 주체의 관점에 빙의할 것을 요청한다. 즉 사물의 환영성은 이미 탈주체화된 개인과 의도치 않게 공명하면서, 환영이 현전하는 상태를 가시화할 수 있는 개인의 역량을 토대로 주체성을 재정의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자아보다 비대해진 이미지의 총량을 수용할 수 없지만, 그와 별개로 이미지가 (레이아웃을 초과한 채) 현실로 유입되는 문제적 상황에 대한 증거로 사물의 환영성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이는 환영을 무려 객관적으로 합의하기 위한 발단이며, 합의가 원만하게 전개될수록 주체로부터 소격된 유령은 자신의 존재론적인 근거를 확보하게 된다. 즉 유령이라는 존재는 ‘기계의 눈’이 미처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한 대상으로 거듭난 채, 자신을 이미지로 재현하려는 자동화된 방식을 거부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때 감각의 틈새가 요청했던 주체의 관점은, 사실상 자아로 대변되는 통합적인 주체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유령의 의지를 발생시킨다. 일련의 작업들은 그러한 강령술을 위해 사물-이미지를 제의적 도구로 활용하면서, 다름아닌 우리를 반복해서 유령으로 초대하고 있다. 물론 우리가 초대에 어떻게 화답할 지는, 아직까지 미결의 문제로 남아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