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입규, 〈desktop〉, 2020-2023, A4용지에 프린트, 파일철, 휴지통, 가변설치 © 장입규

예술이기에 취할 수 있는 미적 관점의 방식, 그것은 현실의 삶과 두는 일정한 거리감에 바탕한다. 구조를 구축한 것은 개별의 객체들이지만, 그 집단화의 과정 그리고 일체가 되려는 체계의 본능에 의해 이들 객체 혹은 주체들의 입장은 때로 신기루가 된다. 그리하여 이른바 시스템은 자기 조직의 견고함을 지속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느새 구성원들은 그들의 합의로 사회를 형성했다는 사실을 망각... 아니, 떠올리지 않아도 되는 걸 허락받았다.

그로부터 공통의 집합 결사체는 복잡한 제 구조의 속성을 감당할 만큼의 다양성, 또한 이러한 다양성을 가능케 하는 더 섬세한 결과 도출의 과정을 스스로 포기해 버린 상황을 스스로 초래했다. 사회라는 범주는 그렇게 자율성을 획책했고 계속해서 자신을 고도화해 왔다. 이제 그 구성원들인 우리는 이 사회가 결정 내려 준 삶의 목적을 목표해 가면서 그로부터 내 존립의 근거를 발견하는 데 급급하다. 거대 구조의 운용에 일개의 개인이 직접 관여하는 것을 거의 불가능한 일로 여긴다.

효율을 위해 책임은 분화하고, 이렇게 부여된 사회적 책무에 모두는 종사한다. 그 척도의 합리성을 헤아리거나 수정하려는 노력은 무의미하며, 이미 어떤 양식으로서 자리하는 형성체 자체를 어떻게 잘 수용할 것인지가 존재 이유가 되어 버린 것이 바로 지금의 시스템이다. 사회, 좀 더 너른 범주에서는 시대와 같은 차원의 구성을 해제하면서, 동시에 해당 체제의 유지와 지탱의 요건을 얼마나 (타인보다) 빠르게 이해하는 것이 일신의 안위를 보장하는 데 가장 중요한 조건 중 하나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보통의 논리 공식을 개관하자면 바로 그러하다.)

자기 정화를 위한 최소한의 순환 작용을 위한 어떤 틈이나 여유 시공으로서 집단 조직의 경향은 변화의 요인을 용인한다. 그렇다고 해서 특정한 패러다임이나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생성하는 계급의 집권 문제가 마냥 평화롭게 구성원 전원의 동의를 이끌어 내는 이상적 형태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은 또 아니다.

때문에 개인의 인식이 작동하는 원리와 방식을 설정하는 일이 곧 불안에 기초하는 자존, 나아가 그것이 자아인 동시에 한 그루의 분화형 개체로서 매개된 관계를 무너뜨리는 것을 방지하고 행복과 같은 개인의 욕구와 욕망의 실현에 집중토록 함으로써, 그 상위 수목 구조의 생명을 보전하는 필수 요소로 삼는다. 근대의 도래에 큰 역할을 한 과학이나 제도, 합리나 이성과 같은 부분이 과연 어떤 형상의 위상으로 귀결하게 할 것인지, 그 기하학을 밝히는 일이 모던(Modern)의 흐름에서 주요했던 이유도 이 체계 보전의 성질에 기인하고 있다.

다시금 거리두기의 수행으로 돌아와 보자. 그 중요성을 가늠하는 일은 당대의 예술, 그 사회 참여의 가능성과도 실은 연관이 있다. 작품의 내용과 형식 그리고 이를 통해 전하는 미적 의미와 가치의 크기와 너비, 무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토록 무겁고 거대하며 넓고 웅장한 체계나 구조에 필요한 균열을 일으킬 방법이 오로지 그 외연의 면면과 반드시 상응해야 하는 것은 아닐 테다.

만약 세계와 주체의 관계를 설정하는 일, 더불어 그 사회 참여를 위한 행동을 미술이 수행할 수 있다고 하면, 그 역시 시의적으로 분명 바람직하고 적합하다 평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보이는 것, 어쩌면 일말의 인공적 가상체(Simulacre)에 불과할 수도 있는 그것에 매몰되지 않게 하면서도, 다른 한편 원본의 구조에 도달할 수 있게 하는 거의 유일한 창구로서 미술은 구조의 해제를 한 번 더 시도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장입규의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그렇듯 당대의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는 단지 이 구조를 파악하는 단계에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어떠한 의미나 가치로 받아들여야 할 건지, 그 사유의 단적 결론을 작품으로 승화한다. 그렇기에 작가가 꾸민 예술작품은 단일하고 응집된 방식으로 자기 의미와 가치를, 더불어 그로부터 개입하는 개별 자아의 체험과 삶에의 적용이라는 다단하고 복잡한 심적 과정에 일부 영향을 선제적으로 가정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흥미로운 건, 그의 작업에 서린 태도와 어조가 일반적인 전수의 수행에서 취하기를 요구하는 반성이나 교훈의 양태, 또는 예술의 범주를 거름망 삼아 조장하는 의심이나 비판을 통한 공격적 변화를 꾀하는 식과는 사뭇 다르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작가의 작업은 집단적 사회 구조의 상위 단에서 개별 주체의 삶에 달하는 하위 층위에 이르기까지 합의라는 명목으로 행하는 통제의 무형적 권위를 마주하는 개인의 입장을 대변한다.

문제라면 문제가 될 수 있는 것들을 실제 어떠한 방식으로 다루고 수용할 것인지, 그렇다면 그 인식의 범위와 깊이는 또한 어떠해야 할 건지를 고민하길 장입규의 작업은 돌이키라 하는 거다. 관계란 언제나 성찰의 의식을 함의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같은 인식의 방향성을 상기함으로써 그는 ‘나’라는 존재가 현실에서 존립하기 위한 최소한이자 근본적인 원초의 철학적 조건으로서의 그 안팎을 구성하는 기반적 원리를 살필 것을 권한다. 그 구체적인 방안 모색의 실마리가 되는 개념이자 형식은 질서다.

질서란 본디 혼란이 없고 순조롭게 이뤄지는 사물의 순서나 차례를 뜻하는 말로, 이 질서의 논리가 있기에 개인은 남들과는 다른 고유한 개체로서 개인을, 집단은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어떤 개별자들의 모임으로서 집단을 성립도록 할 수 있다.[1] 이로써 장입규는 구축된 질서의 가능성을 예비한다. 다만 이 질서의 작동은 개인이 아닌 개인들, 그 집단적인 권한 행사에 의해 이뤄질 수밖에 없으므로, 그가 가시화하는 질서의 양태는 선제적 길잡이를 위한 예시의 기능을 자처한다.

작가가 추동하는 극단적인 일종의 ‘이케아–형(IKEA-type)’ 미적 양식이 전시의 상업적 디스플레이와 유비하는 것은 어쩌면 그와 같은 연유에 기인할 테다.[2] 그러한 가시화 전략을 통해 장입규의 세계관은 크게 세 방향으로의 관계망을 조성하는데, 그중 하나는 바로 자아와 사회와의 관계가 그것이며, 다른 하나는 타자와 사회와의 관계, 마지막 하나는 사회의 범주를 중심으로 새롭게 편성되는 자아와 타자와의 관계다.

다만 작가의 경우, 그의 작업 그 자체를 과정의 결과로써 표상하기보다 이미 이상의 관계성에 대한 나름의 결론을 도출한 이후의 결괏값으로 귀결하는 데 좀 더 초점을 맞춘다. 그 때문에 작가의 작업은 특정한 사상을 최고의 상태로 끌어올린 이상적 상황의 전개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여기서 그가 현시하는 이상이라 함은, 발전적 사관을 지지체 삼는 변증법적 체제를 따르는 대신 진실로 현실에서 도달할 수 있을 일정 정도의 균형 상태를 발견하고자 하는 목표를 갖는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렇게 그는 이룰 수 없을 절대적 이상이 아닌 최소한 미학적으로 시도할 수 있는 실현으로서 다다를 수 있을지 모를 상대적 이상을 밝히는 데 집중한다. 

장입규의 작업에서 주요하게 사용되는 물적 방법론은 바로 잘라내고, 붙이는 행위로 특징적인 건 이와 같은 수행이 동시대로서의 디지털 세계에 안에서 통용되는 일련의 편집 방식을 현실 세계에서의 조형 행위로 치환하는 것과 다름없다. 다시 말해 디지털의 편집 기법과 이를 기반하는 전략 그리고 그 의미를 현실의 시공에서 아날로그적으로 이미지화하는 과정 자체가 곧 작가 작업의 표지라 하겠다.

다양한 장면의 콜라주(college)를 통해 디지털 행위의 수행이 어떻게 아날로그적으로 재현될 수 있을지를 탐색하는 상대적으로 초창기 작업인 〈케이블(원제: Cable)〉(2019)로부터 이상의 방법론이 작업화하기 시작한다. 2020년 작 〈페인트 통(원제: Paint Bucket)〉에서 작가는 디지털 환경과 현실을 잇는 스크린을 상정하는데, 이는 우리가 창 안쪽의 세계를 창밖에서 바라볼 때 감각하는 특유의 평면성을 닮았으며, 이는 마치 현상된 사진 이미지를 보는 것 같은 착시의 디스플레이를 차용함으로써 구현된다.

일정한 장식으로 연출된 가상의 세트는 분명 실재계에 위치하지만, 특정한 지점에서 그것을 응시하는 주체의 감각은 어쩌면 디지털과 아날로그 그 사이 어디쯤을 향한다. 착시의 효과를 통해 삼차원(3D)과 이차원(2D)의 감각이 상호 전환할 수 있는 무엇임을 체험함으로써, 관람의 주체는 비로소 우리에게 내재한 감각의 층위가 불변하는 것이 아님을 돌이킬 기회를 제공받는다. 그 이듬해의 작업 〈자르고 붙이기(원제: Cut and Paste)〉는 제목에서부터 무언가를 자르고 붙이는 행위의 수행성을 공표한다.

원래는 오롯한 원본의 이미지로 존재했던 레디메이드 오브제들을 실제로 파편으로 오리고 다시금 붙이는 와중에 형성하는 균형의 미감을 좇아내며 작가는 완성된 단일체에 내재하는 근원적 불완전성을 폭로하는 한편, 다양한 조합의 수를 두고 발생 가능한 새로운 문법의 수립을 꾀한다. 본 작품의 연작이라 할 법한 〈편집의 미학(원제: Aesthetics of Editing)〉(2022)은 기본적으로 전작과 유사한 식의 시각적 구현을 펼쳐내면서도, 이전과는 달리 본격적으로 무게의 중심을 아날로그화로부터 디지털화 혹은 디지털의 실재화라는 차원으로 적극 이전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는 상징(icon) 형태의 기호를 떠올리는 반복적인 도상의 활용이 한층 도드라지며, 상호 이질한 이미지로서의 오브제들을 설치하는 방식도 수평과 수직을 구조하는 선형적 배치를 따르기도 한다. 이후 개인 컴퓨터 바탕화면을 스크린 캡처(Screenshot)하여 실재의 형식으로 구현한 2023년의 〈데스크톱(원제: Desktop)〉 작업이 바로 앞선 이 두 작업을 이것의 예비로 여기게 한다.

형성된 인식의 감각을 재편하기 위한 시도로서 장입규가 행하는 다른 하나의 양식은 순수 미술의 부문을 실용의 그것과 혼재하여 성취한다. 2021년 작 〈시간선(시계)(원제: Timeline (Clock))〉에서는 미니멀한 시계를, 2023년 작 〈블록체인(원제: Blockchain)〉에서는 전통적 아라비아풍의 카펫을, 동년작 〈현대적 도구들(원제: Modern Tools)〉에서는 문구 집기를 표방한 컴퓨터 운영체제를 대표하는 아이콘 형상의 청동 조각들을 작가 고유의 디자인적 조형성을 투사해 보인다.

이처럼 시각적 재현의 미감이 현실의 시공에서 부각되면 부각될수록 이를 관통하는 보통의 지각과 인식에 있어서 어떤 양극적 괴리를 환기할 수 있게 의지하는 정도라는 것도 함께 증폭하게 된다.

이렇듯 장입규는 디지털 기반의 가상 환경에서 통용되는 수행 양식을 이미지화하여 이를 현실의 세계에서 실재의 형식으로 구현한다. 그 가운데 전자의 미학과 편집적 수행성이 조형의 문법으로 이첩된다. 물리적으로 전시된 현장의 설치는 실은 원본이 존재하는 일차 이미지의 조작된 이차 이미지일 뿐임을, 하지만 그 어느 쪽을 특정하지 않음으로써 다시금 우리의 지각과 인식 체계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를 촉구하는 식으로 작가의 작업은 존재와 그 주변을 환기한다.

작가가 향하는 점진적 질서화의 예시는 마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ctor–Network Theory)’의 입장에 비견하게 무언가를 안다는 사실이 과거의 그것과 유사할 것이라는 일상의 믿음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한다.[3] 보통의 영역에서 어떠한 가정을 통해 다수의 사람들이 세상을 인지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어느 측에서도 최대한 거부감 없이 사유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은 예상보다 언제나 어려운 일임이 틀림없다.

안정된 관계의 상정으로서 보이지 않는 블랙박스(Black Box)의 구조를 폭로하는 일은 단지 그 알 수 없음의 장치를 실제로 분해해서 해체하는 형태로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단수의 상황을 복수의 것으로 이전하고, 그 변화의 과정에서 인식 또한 달라질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이처럼 일대일 대응을 다수의 갈래로 확장 대응하면서 작가는 전파된 혹은 관찰된 사실의 신뢰도를 무화한다. 그리고 이 수행의 과정은 최대한 자연스러울 때 분명 더 효과적일 수 있다.


[1] 각 단어의 뜻은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참조.
[2] ‘이케아–형’이라는 단어는 1943년 설립된 스웨덴의 가구 제조 기업인 이케아(IKEA)가 지향하고 제안하는 스칸디나비아 라이프스타일 기반의 특정한 인테리어적 미감을 지칭하기 위해 필자가 만들고 뜻을 붙여 쓴 조어다.
[3] 이에 관해서는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NT)’과 관련 문헌을 참조할 것.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