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llation view of 《The Shape of a Touch》 © SeMA

이은우는 종종 작품이라는 말 대신에 사물이나 물건이라는 말을 사용하곤 한다. 이은우가 만든 것들은 미술관이나 갤러리 같은 전시공간에 놓인다는 측면에서 작품이라고 불려야 마땅하지만 정작 그는 그것들이 꼭 작품이 아니라 그냥 물건이어도 크게 개의치 않는 듯하다. 이은우는 그의 2014년 개인전에 《물건 방식》이라는 제목을 붙인다. 그는 일상적인 물건들과는 구별되는 예술작품의 고유하고 자율적인 존재방식을 탐구하는 데 관심이 없다.

그에겐 예술작품도 일상용품과 마찬가지로 물건에 속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가? 그것들이 모두 세계에 존재하는 물질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 물질에 특정한 형상을 부여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공원의 벤치든 로댕의 조각상이든 상관없이 모두가 나무나 청동 같은 물질에 특정한 형상을 부여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의미에서 서로 다르지 않다는 얘기다.

이번 전시 《손길 모양》에는 여러 개의 작은 조각들이 모여서 ‘조각 마을’을 이루고 있지만, 이와 동시에 관객들이 실제로 앉아서 쉴 수 있는 세 개의 벤치가 각각 다른 종류의 나무로 제작되어 놓여 있다. 조각작품을 만드는 이은우와 벤치를 만드는 이은우가 한 공간에 함께 있는 것이다. 그가 작품을 창작하여 미술관에 전시하는 조각가임은 분명하지만, 물건을 제작하는 목수와 퍽 닮은 것도 사실이다.

우리가 미술관이라는 제도 안에서 이은우의 전시와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렇다면 이은우가 만든 이곳의 모든 것은 예술작품이며, 그것들을 만든 장본인이라는 점에서 이은우는 엄연한 예술가이다. 이와 같이 미술관이라는 제도를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이은우의 태도는 일견 제도비판 미술의 계보를 따르는 듯하다. 하지만 그가 미술제도에 대해 어떤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이에 대해 답하기는 쉽지 않다.

그에게 미술관이라는 제도적 공간은 비판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그가 무언가를 실현하고 실험할 수 있는 환경이나 조건에 가깝다. 그에게 전시공간은 도화지와 같은 것이다. 무언가를 그리고 세우기 위한 중립적인 공간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그러나 중립적인 공간이라고 해서 완전히 텅 비어 아무렇게나 처분할 수 있는 장소인 것은 아니다.

이은우는 2022년 작성한 작가노트에서 “뭘 해도 괜찮지만 아무거나 해도 괜찮은 건 아니다.”라고 말한다. 중립적이지만 어떤 제약은 존재하는 곳이 바로 미술관이다. 이런 의미에서 미술관이라는 제도적 공간은 타불라 라사가 아니라 어떤 가이드라인을 포함한 조건이자 환경이다.

먼저, 미술관이 부과하는 공간적 제약이란 그 장소의 물질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미술관의 전시공간은 이미 특정한 물질적 배치에 따라 형성된 장소이다. 아직 아무런 작품이 설치되지 않은 전시공간이라 하더라도, 이미 그곳은 벽과 모서리, 방과 벽, 계단과 복도로 구획된 공간이며, 임의의 자재와 공법으로 구축된 공간이다. 이렇게 주어진 공간적 조건이 이미 이은우에게 특정한 가이드라인을 부여한다.

따라서 그에게 전시공간이 도화지에 빗대어질 수 있다면 그 도화지는 아무것도 없이 새하얀 종이가 아니라 점이나 선이 일정하게 열립한 종이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손길 모양》이 열린 전시공간의 모든 벽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은우는 벽 전체에 일정한 간격의 수직선과 수평선을 긋는 것으로 이번 전시의 준비를 시작한다. 미술관이라는 물리적 공간을 마치 커다란 모눈종이처럼 상정하는 것이다.

《손길 모양》이 열린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어린이갤러리는 지하 1층에 위치해 있어서 이곳에 진입하려면 미술관 로비의 계단을 통해 내려가야 한다. 그런데 이 지하 갤러리는 천장이 없이 열린 구조의 공간이라서 우리는 1층의 로비에서 이곳을 조감할 수 있다. 이렇게 높은 위치에서 굽어본 전시공간은 이은우에게 수직과 수평의 평면들로 구축된 공간으로 지각된다. 전시를 막 준비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이곳은 아직 아무것도 놓이지 않은 공간이지만 그렇다고 텅 빈 공간은 아니다.

특정한 재료로 깔린 평평한 바닥이 있고 사방에는 수직의 벽들이 서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벽과 벽이 맞닿는 모서리 중 두 군데는 직각이 아니어서 이곳의 평면도는 일반적인 실내의 직각 사각형이 아니라 불규칙한 사다리꼴로 보인다. 어린이갤러리의 이 모든 물질적 특성이 이은우에게 주어진 공간적인 조건 또는 환경이다.

작가가 이 공간을 균일한 그리드로 채우는 행위는 이러한 공간적 제약을 수용하고 이해하는 첫걸음을 내딛는 것과 같다. 전시공간을 균등하게 분할된 모눈종이처럼 여기고 마치 드로잉에 착수하듯이 전시를 구상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미술관이 이은우에게 공간적, 물질적 제약만 부과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이 특수한 장소에서 감수하는 또 다른 제약은 시간적, 역사적 차원의 것이다. 이것은 미술관이라는 장소가 함의하는 제도적인 권력과 관련된다. 미술관은 그 안에 놓인 사물을 예술작품으로 규정하는 제도적 기능을 행사한다. 제도의 힘은 역사에서 비롯된다. 즉, 미술관은 작가(와 관객)에게 미술사적인 맥락을 부과하는 장소인 것이다.

미술관에서 전시하는 모든 작가가 당연히 미술사적인 맥락을 의식하면서 작품을 만들고 전시하겠지만, 이은우는 그중에서도 미술사에 대한 참조가 두드러지는 작가에 속한다. 그가 여태껏 선보인 입체적인 오브제들은 반복되는 기하학적 형태를 띤 것들이 많아서 1960년대 미국의 미니멀리즘을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사실 그는 조금 더 앞선 20세기 초의 유럽 아방가르드 미술을 주요하게 참조하는 듯하다.

특히, 바우하우스, 데 스테일, 구축주의 등 1920년대 유럽 추상운동의 유산이 이은우가 전제하는 가장 중요한 역사적 조건으로 보인다. 이들은 추상이라는 조형언어로 미술과 일상의 경계를 해체하고자 했다. 이들에게는 창작과 생산, 회화와 디자인, 조각과 건축이 서로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모토를 참조하는 이은우는 〈손길 모양〉의 전시공간에 조각과 드로잉뿐만 아니라 벤치를 제작해 함께 놓는다.

또한 작품의 재료로 나무나 돌, 금속과 같은 일반적인 조각의 재료뿐만 아니라 당구공, 털실, 비즈 같은 기성품, 더 나아가 자연적인 재료의 무늬와 질감을 모조한 시트지도 함께 사용한다. 그의 작은 조각들은 가구나 건축을 닮아 있기도 하고, 그가 일상적으로 그린 드로잉들은 실용적인 목적으로 작도한 도면이나 설계도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이은우는 작품을 창작하는 조각가인 동시에 가구를 제작하는 목수나 실내를 장식하는 디자이너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은우는 미술관이라는 제도적 공간이 부과하는 물질적 조건과 역사적 조건에 반응하고 개입함으로써 미술과 일상의 경계를 준수함과 동시에 위반하는 작업을 선보인다. 그의 포트폴리오에는 다음과 같은 짤막한 작가노트가 실려 있다. “내가 하는 미술은 사물을 관통하는 어떤 사실들과 관계한다. 이것은 물질의 물리적 한계나 특성이기도 하고, 과거의 어느 역사적 순간들이기도 하며, 그 어떤 시공간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자연스럽게 발생되었다 사라지길 반복하는 양식들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나의 미술은 무엇을 향한 오마주나 이미테이션, 가짜와 진짜, 장식과 실용, 노스탤지어나 버내큘러 등을 관통하는 여러 경계선에 위치한다.” 이처럼 이은우는 관념과 진실보다는 물질과 사실을 추구하며, 역사적 시간에 대한 참조를 부정하지 않는다. 물질에 대한 그의 관심은 역시 위에서 언급한 역사적 아방가르드에서 비롯된 것이고, 미술의 맥락에서 그가 참조하는 역사적 시간은 1920년대 유럽의 추상운동일 것이다. 이런 그의 태도가 그의 미술을 위에 열거한 여러 이항대립의 경계선에 위치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은우는 한 세기 전의 미술운동을 그저 반복하는 데 그치는 것일까? 지난날의 추상운동은 미술의 진보뿐만 아니라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이 남아 있던 시기였고, 그들은 미술과 산업을 통합한 새로운 미학을 창안하고자 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에서 작업하는 이은우에게서 이런 정치적 의도나 해방적 제스처를 발견한다는 것은 매우 시대착오적인 발상일 것이다. 이은우는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교훈을 어떻게 자기화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단서를 얻기 위하여 이은우가 작업의 출발점으로 삼는 드로잉에 대해서 좀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미술과 산업, 창작과 노동의 경계를 철폐하고자 했던 지난 세기의 선배들처럼 그는 창작하듯이 노동하고 노동하듯이 창작한다. 그는 생활에서 규율을 지키는 일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의 드로잉은 규율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다. 창작하는 정신과 노동하는 신체 사이의 균형을 잃지 않고 양자 모두를 자기 안에 통합하고자 하는 의지가 그의 꾸준한 드로잉으로 이어진다.

앞서 인용한 2022년의 작가노트에서 이은우는 드로잉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의 드로잉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에서 시작됐다. 출근 후 시간을 정해 그것이 무엇이 됐건 그렸다. (…) 나의 그리기는 5mm 단위로 작은 점이 인쇄된 몰스킨 도티드 노트에서 시작한다. 점과 점을 잇는 직선이나 호(arc)를 하나 그린 뒤 그것에 맞는 도형 하나를 완성한다. 이 도형에 그다음 도형을 이어 그리며 앞서 그린 도형과의 관계나 모양을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리기는 도형을 쌓거나 걸치는 모양을 갖게 된다. 이렇게 모인 도형들에 시트지와 색연필로 재질을 입힌다.”

작가는 규율을 준수하는 노동자처럼 시간을 정해두고 평면의 그리드에 기하학적 형상들을 그린 후에 색을 칠하거나 시트지를 입힌다. 선을 그리고 색을 칠하는 예술적 행위와 시트지를 지지체에 붙이는 산업적 행위가 이은우의 드로잉 내에서 모순 없이 통합된다.

우리는 작가의 이런 드로잉 프로세스가 이번 전시 《손길 모양》을 구상하는 데에도 그대로 적용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1층에서 내려다본 지하층의 어린이갤러리를 거대한 사다리꼴의 모눈종이로 삼아 그 위에 도형들을 쌓고 걸치는 방식으로 바닥과 벽에 평면적이고 입체적인 오브제들을 배치해 완성한 전시는 그 자체로 하나의 공간적인 드로잉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전시에는 이은우의 드로잉이 여러 차례 변주되고 중첩되어 있는 셈이다.

방금 말한 것처럼 전시공간 전체의 배치가 작가의 드로잉 프로세스를 따르고 있고, 그 내부에는 그가 작업실에서 규율에 따라 그려온 A4 용지 크기의 드로잉 57점이 걸려 있으며, 또 한쪽 벽에는 그 드로잉 연작을 캔버스에 확대하여 표현한 4점의 평면작업이 전시된다. 시트지를 붙여 가짜 질감을 부여한 색연필 드로잉과 달리, 그것을 캔버스에 오일 파스텔로 확대해 그린 작업에는 동판, 나무, 천, 가죽 등 진짜 물질이 붙어 있다.

진짜와 가짜, 미술과 디자인, 작품과 상품의 경계가 이은우의 변주된 드로잉들을 통해 교란되고 와해되어 전시공간 내에서 어떤 통합된 세계로 드러난다. 다른 한편, 전시공간 한쪽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이은우의 작은 조각들도 그 구성 원리는 그의 드로잉 프로세스와 다르지 않다. 전통적인 조각의 재료들과 여러 산업적인 기성품들이 함께 쌓이고 걸쳐져 복합적인 기하학적 오브제로 귀결되는 것이다.

이처럼 〈손길 모양〉에서 미술과 일상, 창작과 노동, 진짜와 가짜는 드로잉의 다양한 변주를 거쳐 일치되고 통합된다. 창작의 결과인 작품이 눈으로 감상하는 관조의 대상이라고 한다면, 노동의 결과인 사물은 손으로 사용하는 도구적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과 사물의 통합을 장면화하는 이은우의 전시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갖가지 모양들은 눈길뿐만 아니라 손길의 대상이기도 한 것이다.

이처럼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방법론을 자기화하여 이은우가 추구하는 것은 결국 무엇일까? 《손길 모양》은 하나의 시공간을 구축하는 시도로 보인다. 전시의 동선을 따라 이은우가 마련한 각 섹션의 제목을 되짚어 보자. 미술관 로비의 계단을 내려가 전시공간으로 진입하면 관객은 ‘방’에 들르고 ‘복도’를 통해 외출하여 조그만 ‘조각 마을’을 방문하게 된다. ‘낙엽송’이 주변에 늘어서 있고, ‘벤치’가 군데군데 놓여 있으며, 한쪽에선 ‘공사’가 한창이다. 즉, 이곳은 어떤 동네이다.

조각작품과 건설현장이 공존하는, 예술과 일상이 뒤섞인, 작품과 물건이 구분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상적인 동네인 것이다. 이은우가 만들어낸 이 작은 동네가 과거의 추상운동이 꿈꿨던 유토피아인 것은 물론 아니다. 오늘날의 예술적 진보와 정치적 해방을 철썩같이 믿을 정도로 이은우는 시대착오적이지 않다. 그는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방법론을 재연하되 그들의 낙관론까지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이은우가 창작과 노동을 통합해 꾸민 기하학적 추상의 동네는, 한 세기 전의 미술운동이 꿈꿨던 통합의 이상을 철저하게 재연하고 반복하는 시도 속에서도 여전히 물질세계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하릴없이 되물어야 하는 작가의 모습을 반영한다. 오늘도 이은우는 그가 처한 물질적 조건과 역사적 조건을 머리와 몸으로 곱씹으며 반듯한 규율을 세우고 빈틈없이 따르려 하지만, 언제나 그리드의 공간에는 불규칙한 사다리꼴이 틈입하여 어떤 편차가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가 만들어내는 동네에는 관념의 이상과 물질의 현실이 바짝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 맞닿은 선은 유격 없이 반듯한 직각을 이루다가도 금세 까끌한 질감을 남긴다. 내일이면 이은우는 물질의 감각이 남긴 여운을 털어내고 또다시 직각의 그리드를 따라 선을 긋기 시작할 것이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