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일》 전시 전경(갤러리 SP, 2025) © 이은우

이은우의 작업 노트에는 “생활의 기하학”이라는 말이 적혀있다. 이 표현은 특정한 재현이나 거대한 담론 대신, 일상의 리듬 속에서 작업의 단서를 찾는 그의 태도를 암시한다. 작가 노트의 내용은 다소 담담하다. 아침에 일어나 개와 함께 산책하고, 밥을 먹고, 드로잉을 하고, 운동을 하고, 다시 밥을 먹고, 다시 산책하고, 집안일을 하고, 독서를 하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잠에 든다고 그는 기록한다.

이는 예술가의 창작 행위라기보다는 누구나 반복하는 생활의 단편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로 그 ‘아무 일도 아닌 것’이야말로 이은우의 작업을 지탱하는 기초가 된다.

이은우에게 생활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생활은 곧 작업을 가능하게 하는 바탕이며, 작품을 만들어내는 리듬이 된다. 《집안일》이라는 전시 제목이 말해주듯이, 그는 자신의 생활세계와 예술세계를 구분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활 속에서 몸이 남긴 흔적을 예술로 전환하며, 예술은 다시 생활의 리듬 속에서 잉태된다. 이처럼 그의 작업은 생활과 예술 사이의 경계가 아니라, 생활을 예술로, 예술을 생활로 변환하는 과정 자체를 드러낸다.


몸과 시간: 드로잉의 태도와 반복의 의미

그의 드로잉이 이를 잘 보여준다. 대개 작가에게 드로잉은 회화나 조각과 같은 본 작업을 위한 준비 과정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은우의 드로잉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어떤 계획을 위한 스케치가 아니라, 매일의 시간을 보내며 몸이 남기는 흔적이다. 그는 드로잉을 일종의 태도의 기록으로 간주한다. 이때 태도란 어떤 자세가 아니라, 시간을 견디는 몸의 훈련을 의미한다. 

작가는 모눈종이에 직선과 호를 반복적으로 그으며, “잘하는 것보다 그냥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다. 그렇게 반복되는 드로잉 행위는 흔히 불교의 수행이나, 미니멀 아트에서 볼 수 있는 연속과 반복의 제스처를 떠올리게 하지만, 이은우의 경우 그것은 종교적 구원이나 미술사적 제도 안에 위치하기 보다 생활 속에 존재하는 한 과정에 가깝다.

그렇게 반복된 선들은 대체로 우연히 만나 상자 모양, 집 모양, 주름 모양 같은 것을 만들어낸다. 그 모양 안에 작가는 인테리어 필름을 오려 붙인다. 인테리어 필름이나 장판은 작가가 어린 시절부터 흔하게 접해 온 일상의 사물이었으며, 그것을 통해 작가는 생활의 한 조각을 드로잉에 붙여간다. 말하자면, 이은우의 드로잉은 생활을 예술적 언어로 변환하는 장치이자, 몸의 시간을 기록하는 도구인 것이다.


사물과의 교류: 중교품, 버내큘러, 아마추어리즘

이러한 일상의 태도는 사물에 대한 작가의 시선에서도 나타난다. 그의 집에는 길에서 주워온 가구, 중고 시장에서 발견한 물건들, 이케아의 소파, 직접 만든 원목 가구 등이 뒤섞여 있다. 이 사물들은 단순한 생활 용품이 아니다. 각각의 사물은 저마다의 시간과 기원을 품고 있으며, 작가의 생활과 예술 속에서 새로운 관계망을 형성한다. 이는 고급 예술과 일상의 사물, 산업적 생산품과 수공품 사이의 위계를 무너뜨리는 내밀한 교류이다.

이은우의 작업은 제도적 예술 규범에서 벗어나 ‘버내큘러적 아마추어리즘’을 추구한다. 여기서 ‘아마추어리즘’은 단순한 미숙함이 아니라, 생활의 언어를 존중하며 그것을 예술적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태도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작가의 엘리트 예술의 기하학적 질서나 추상적 형식을 배척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을 추구하지 않을 뿐이다. 대신 작가는 자신이 까 먹은 마카다미아 껍질, 혹은 해변에서 건져온 나뭇가지를 작품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아방가르드 미술에서 종종 발견되는 ‘레디메이드’나 ‘파운드 오브제’의 전략과는 구별된다. 레디메이드가 사물을 예술의 영역으로 편입시키는 방식이라면, 이은우의 작업은 생활 자체를 예술로 전환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예술과 생활, 정제된 형식과 버려진 잔여불은 그의 작업 속에서 하나의 균형을 이루며 공존한다.


드로잉에서 오브제로, 그리고 건축적 공간으로


이은우의 작업은 드로잉에서 출발하지만, 드로잉으로 끝나지 않는다. 드로잉은 곧 조각으로 확장되며, 조각은 다시 건축적 스케일로 변환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러한 확장이 단순한 규모의 확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작은 드로잉에서 큰 건축적 구조에 이르기까지, 이들을 관통하는 것은 ‘태도의 전이’다. 작은 조각은 드로잉으로부터 형태적 태도를 물려받는다. 직선과 곡선의 반복, 우연히 생겨난 상자나 집 모양과 같은 형태는 작은 오브제 속에서 다시 등장한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형식적 유사성이 아니다. 조각은 드로잉의 구체적 형상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드로잉이 지닌 태도(반복, 허용 균형 등)를 이어받아 물질적 차원에서 구현된다. 나무, 금속, 펠트 천과 같은 재료는 드로잉에서의 인테리어 필름과 같은 생활 재료를 대신하여 새로운 물질적 긴장을 만들어낸다.

이처럼 작은 조각이 드로잉에서 탄생했다면, 큰 조각은 다시 작은 조각으로부터 파생된다. 이번 전시에서 새롭게 선보이는 대형 조각은 작은 오브제가 공간적 비례와 구조로 확장된 것으로, 인간이 생활하는 건축 공간의 휴먼 스케일과 맞닿아 있다. 그러나 이은우의 조각이 건축의 질서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오히려 건축적 논리를 비틀어, “약간 좁은 문, 괜히 납작한 창, 쓸데없이 두꺼운 창틀, 벽에 매달린 기둥” 등 실제적이지 않은 조형 장치를 통해 생활 공간의 요소들을 작품으로 재해석한다.

이처럼 작가는 드로잉에서 체득한 태도를 작은 조각으로, 그리고 다시 건축적 구조로 확장시키며 생활의 기하학적 세계를 자신의 조각 속에 구현한다. 그런 면에서 이은우의 조각은 ‘확장된 드로잉’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드로잉에서 시작된 태도는 오브제를 거쳐 건축적 구조로 확장되며, 관람자의 몸을 포함하는 환경적 차원으로 나아간다.


펠트(felt), 균형을 다루는 태도

이번 작품에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을 펠트의 사용이다. 이은우가 펠트를 선택한 이유는 균형을 다루는 감각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처음에 작가는 흐늘거리는 천을 사용하려고 했지만, 그것은 지나치게 유동적이어서 형태를 고정할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재료의 ‘저항’을 체감하게 된다. 천의 부드러움은 역설적이게도 손의 움직임을 따르지 않았으며, 일정한 구조를 거부했다.

이후 선택된 펠트는 이러한 불안정한 관계를 조율하기 위한 대안이었다. 펠트는 부드럽지만 일정한 두께와 밀도를 지녀, 작가의 손길에도 반응하면서도 형태를 유지하기에 적합한 재료였다. 다시 말해, 펠트는 우연을 받아들이는 재료이면서도, 그 안에서 형태를 유지하기 위한 균형의 감각을 요구한다. 흐늘거리는 천이 ‘완전한 저항’이었다면, 펠트는 허용과 저항 사이의 균형을 가능하게 했다.

이러한 불안정한 안정성 속에서 작가는 ‘조금 계획하고 많은 것을 허용한다’는 자신의 철학을 실천해 간다. 작가는 매 순간 재료와 몸 사이의 협의를 이어가듯 작업하며, 이러한 균형의 미학은 조각 전체의 태도로 확장된다.


생활로 돌아오는 예술

서두에 언급했듯이 이번 전시 제목이자 작업의 핵심 키워드인 “집안일”은 직설적 의미를 넘어서, 예술과 삶의 관계를 사유하는 은유이다. 작가가 말하는 집안일은 물리적 공간을 청소하고 정리하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예술이 발생하는 토대이자 구조이기도 하다. 몸은 생활의 반복 속에서 시간을 통과하고, 시간은 드로잉으로 형상화되며, 드로잉은 사물과 결합하여 조각으로 확장된다. 그의 예술은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생활의 흐름과 신체의 리듬 속에서 자연스럽게 태어난다.

작가는 “생활 자체를 말하는 것이 가장 정치적인 행위”라고 말한다. 이는 예술이 더 이상 특정한 담론이나 제도에 포획되어 생활로부터 분리된 영역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발견되는 사건임을 일깨운다. 예술은 갑작스런 영감의 순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일상과 몸의 경험 속에서 발생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이은우는 ‘생활’이라는 ‘언어’를 통해 예술을 말하고자 한다.

《집안일》은 결국 한 사람의 생활과 몸, 사물, 재료, 시간을 통해 예술이 어디에서 출발하는지를 다시 묻는 전시이다. 작가의 손이 움직이고, 재료가 응답하며, 시간과 공간이 얽히는 그 지점에서 이은우의 조각은 서서히 자신의 형태를 갖춘다. 여기서 생활은 예술의 주변부가 아니라 그 중심이 된다. 그의 작업은 조용하고 정제되어 있지만, 그 안에는 시간을 견딘 몸의 리듬과 손의 온기가 단단히 응축되어 있다.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