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와정, 〈저장된 86일〉, 2010, 캔버스 패널, 혼합매체, 가변설치 © 로와정

‘일상’에서 자유로운 예술가는 없다. 예술을 시작하게 하는 일상이 때로 얼마나 더디게 움직이며 좀처럼 멀리 갈 수 없는 제약 조건이 되는지 작가와 관람객 모두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와정의 작업은 대개 그들의 아침과 밤, 같이 맞이하거나 떠나보내온 시간을 닮아있다. 둘의 이동 경로 그러니까 함께 마주 보고 있다가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는 찰나의 시점에서 로와정의 작업은 시작된다.

찰나를 발굴해내는 배경 전부를 일상이라 부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로와정의 작업이 시작하는 출발선에 있는 건 이들의 주변 곳곳을 채우는 ‘뉘앙스’들이라 적고 싶다. 이들 작품에 담겨있는 뉘앙스는 일상의 구조를 조금씩 미끄러뜨리는 일과를 보내며 주변을 구성하는 수많은 것들에 미세한 떨림을 가진 신호를 보낸다.

로와정의 작업을 시적(poetic)이게끔 하는 힘 또한 나름의 동력을 갖고 조금씩 움직이는 사물의 미세한 차이들이다. 이 작은 차이야말로 로와정이 여러 작업을 통해 꾸준히 작동시켜온 ‘관계’에 관한 질문의 원동력이 된다. 이같은 차이는 두 명의 작가가 만나 존재하는 ‘로와정’이라는 둘이자 하나인 정체성에서 비롯된 불변하는 특성이라기보다는, 다른 시각을 견주어보며 조율하는 습성과 같고 다름의 기준을 질문하는 사고의 방식에서 비롯된 유동적인 상태에 가깝다.

로와정의 작업에는 두 명의 작가가 함께 보냈던 시간과 그들 주변에 포진했던 작고 큰 사물들이 흘러보내는 또 다른 시간이 중첩된다. 〈저장된 86일〉(2010)에서 로와정은 86일 동안 어디를 가서 무엇을 하든 이들이 만든 가방을 들고 다니는 여정을 시작한다.

이들이 움직이는 만큼 이 가방 위에는 비 온 날의 흙탕물이나 먼지와 같은 시공간의 흔적이 파편적으로 남는다. 86일의 시간이 가방 안팎에 저장되는 동안, 로와정이 발굴해낸 시간 자국이 생겨나며 두 작가가 움직인 ‘주변’이 함께 만들어낸 우발적인 그림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한편 언뜻 보면 화장실에 걸린 두루마리 휴지 두 개가 나란히 걸려있는 〈두 개의 시간〉 (2013)은 사실 정반대의 형태를 취한 설치 오브제다. 한 쪽은 휴지를 지탱하는 갈색 심지 여러 개를 이어붙여 만들어낸 엇나간 휴지라는 점에서, 심지로 만든 휴지는 상식적인 사물을 뒤집어놓은 거울-상이 되어 옆 자리를 지킨다. 두 휴지를 구성하는 물질은 동일하지만 안팎의 차이로 인해 각각의 휴지가 지내온 시간의 구조는 정반대로 흐른다. 하얀색 휴지는 뚝뚝 끊을 때마다 줄어들겠지만, 반대로 심지로 된 갈색 두루마리는 더 길게 늘여 만들고픈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이들이 주로 다루는 재료는 문장 사이의 쉼표나 음표 위의 악센트와 같이 물질적으로 가벼운 형태를 취한다. 이 가벼움은 어디에서 나와 어디를 향하고 있는 것일까? 로와정은 사물을 위로 올려 공중에 띄우거나 구획을 만들어내며 사물과 그 경계를 재위치시킨다.

팬티 두 장과 조명으로 다각형의 별모양을 만든 설치 〈밤마다 행복했으면…〉(2010)이나 집기들의 구획을 만들어 둥근 원형태의 기념비를 만든 〈생활의 발견〉(2010), 밧줄로 문장을 새겨놓은 캔버스를 공중에 매단 퍼포먼스 작업 〈The thing〉(2014)에 사용된 힘은 모두 중력을 크게 거스르지 않으며 기존 사물이 존재했던 방식에서 아주 멀리 달아나지 않는다. 

사물의 평소 상태를 긴장감있게 유지하고 지탱하는 방식을 통해 로와정은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 오브제를 새롭게 만나며 때론 다 쓴 도마를 향해 작별 인사를 건네기도 한다. (〈bye- bye〉 (2014))  

〈Souvenir of somewhere (frame)〉(2013)에서 볼 수 있는 오묘하고 아름다운 이미지의 채집 또한 파리에 머물던 그들이 동네 헌책방에서 발견한 오래된 잡지들을 기억하는 미래의 기념품이다. 누군가 이미 읽었을 손때 묻은 잡지에서 일부 이미지만 남겨두고 하얀색 아크릴을 칠해 임시 프레임을 만들어낸 이 작품은 수록된 이미지 사이의 경계를 교란시키며 흰 벽 위에 비밀스러운 이미지 아카이브를 세운다. 

인쇄물에 수록된 나무 이미지를 도려내어 수직으로 일으켜세운 〈Souvenir of somewhere (tree)〉(2013)는 최소한의 개입을 하는 로와정의 작업 방식이 얼마나 멀리 흥미롭게 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작업이다. 나무들은 원래 종이 위에 누워있던 것이 아니라 지상 위에 서 있는 것이었으며 따로 또 같이 다른 나무들과 만나 수풀을 이루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신선하다. 

근래 열린 개인전 《그 정도 거리》 (갤러리팩토리, 2014.4.30-5.25)에서 로와정은 미술 전시장에 통상 주변 또는 뒷면에 자리하는 것들의 관계를 다른 방식으로 불러냈다. 서로의 뒤편을 반영하는 캔버스 한 쌍과 아무 것도 인쇄되어 있지 않은 공백의 전시장 도면, 설치에 쓰이는 사다리에 이르기까지. 로와정은 의미로 가득찬 세계가 아니라 온통 비어있는 세계 위에서 서로를 투명하게 반사시켜 보려 했던 것일까. 모두 서로를 방해하지 않으며 각자의 상태로 움직이고 있다. 

References